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11> '박권농'과 그 아들

금산금산 2014. 3. 29. 12:58

[부산의 전설 보따리] <11> '박권농'과 그 아들

구해준 도둑 양아들 삼자 가세 날로 번창

 

 

동래교(서천교) 위로 부산도시철도 1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 장소: 동래구 명륜동
- 술 취해 의식 잃고 쓰러진 뒤 순라군에게서 옷도둑 보호
- 보답으로 준 200냥 밑천 삼아 서동 김씨 딸과 혼례도 주선
- 이후 박 씨 후손들 모두 유복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박권농(朴勸農)이란 사람이 동래에 살았다.

그는 아무 일이나 가리지 않고 해주고 품삯을 받아 살아가는

비천한 사람이었다.

내일을 위한 꿈이라고는 없는 권농에겐 술만이 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만취한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미남동 앞을 지나

서천교(西川橋·지금의 동래교)에 이르렀을 때 술에 너무 취해

의식을 잃고 냇가의 모래밭에 쓰러져 잤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눈을 떠보니 검정 옷을 입은 사나이가 옷을 벗기고 있는 것이었다.

도둑은 권농의 남루한 옷을 모두 벗겨갈 작정이었다.

이때 이곳을 순찰하던 순라군(밤에 도둑과 화재를 감시하고 통행인을 보살피던 군졸)이 이 광경을 보고

 "그곳에 있는 자가 누구냐. 박권농이 아니냐. 이 밤중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권농이 "이분은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입니다. 소인이 술에 취했기에 저를 집까지 업고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순라군은 "그래, 조심해서 집으로 가거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고비를 넘긴 도둑은 감격한 어조로 고개를 숙이고

 "감사하오, 당신이 만약에 나를 도둑이라 말했으면 내 손에 맞아 죽었을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제 등에 업히시오. 제가 집까지 모셔드리죠"라고 말한 후 권농을 업어다가 집까지 왔다.

   
동래교 아래에는 온천천을 따라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권농은 도둑을 방으로 안내하고 식사라도 같이 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권농은 "내 슬하에는 어린 것이 하나뿐이니

내 아들이 되어 줄 수 없을까"라고 묻자,

도둑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한 뒤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늦게 권농을 찾아온 양아들은

"아버지, 그간 별고 없었습니까. 제가 돈 200냥을 구포 만덕고개의 아무 지점에 묻어 두었으니

오늘 밤중으로 집으로 옮겨 가용에 쓰십시오"라고 말했다.

권농은 처음엔 사양했으나 하도 간곡하게 말하는 양아들의 말에 못 이겨

돈을 가지고 온 후로 생계가 유복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농의 외아들은 속리산으로 피란갔다가 전쟁 후 동래로 돌아왔다.

이때 동래 서동(書洞)의 명문 김씨 댁에는 출생 때부터 얼굴뿐 아니라 온몸을 보자기로 덮어 쓴 듯

어떤 껍질로 덮혀 입과 밑구멍만 내어 놓고 밥을 먹고 숨만 쉬던 괴물 같은 딸 아이가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딸 때문에 그 부모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이 혼기를 놓친 노처녀에게 권농의 아들이 청혼을 했으니,

그녀는 물론 부모들도 반가운 마음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결혼식 후 첫날밤에 신랑은 대(竹)를 칼모양으로 예리하게 장만해

그것으로 신부의 전신을 덮고 있던 껍질을 벗기니 놀랍게도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부부 사이의 금실은 말할 수 없이 좋았거니와

서동 김 씨의 세력으로 박 씨의 후손들도 모두 번창했다고 한다.


가마골 향토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