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발명의 천재 '장영실'은 [부산사람]이었다.

금산금산 2014. 9. 3. 14:03

'장영실'은  [부산사람]이었다!

 

 

 

미천한 신분 뛰어넘어 과학조선 세운 발명왕

 

 

 

                                                                                     

 

 

 

발명의 천재 장영실은 [부산사람]이었다.

세종대의"측우기""자격루"와 같은 [천문기구의 제작]으로 우리나라 천문학의 수준을

당시 세계 최고로 끌어올린 장본인이 바로 장영실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으나,

그가 부산 동래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영실의 출생에 대한 자료는 매우 미약하다.

단편적이나마 기록에 의하면...  "세종실록"15년 9월 을미조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사람이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아산장씨족보에는 아버지가 고려말 정3품 전서의 벼슬을 지낸 장성휘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어머니가 동래현의 관기였다는 점에서 신분이 미천한 관노출신이었다.


비록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을지라도 제련 축성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

남다른 과학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장영실의 재주가 특출하다는 소문은 점차 널리 알려지면서 세종에게 발탁된다.

1421년(세종3년)에는 천문기기의 연구를 위해서 중국에 파견되었고

 2년후 정5품인 상의원 별좌( 별좌)에 올라 [관노]의 신분을 벗게 된다.

이후 세종14년엔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당시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면서

그의 과학적 재능이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세종대의 천문기구들은 거의 1432년에서 1437년 사이에 제작되고 있다.

대부분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천문기구들이 유독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은 일정한 동기가 있었다.

바로 세종의 농사정책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집약적인 농업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했으며 이를 뒷받침할 천문기술이 절실했던 시점이었다.

장영실이 발명한 대표적인 측우기는 새로운 효과적인 조세의 수취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기구였다.

지역에 따른 풍흉의 영향과 토지간의 생산력의 차이에 따라 조세를 차등부과하려면

강우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기구가 현실적으로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인 발명품 가운데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최초의 물시계로 태조 7년의 경루가 있으나

이는 고려말기의 물시계와 같은 형식인 유입형 물시계이다.

 

그 뒤 1423년(세종5년) 청동 물시계가 제작되었다.

청동물시계는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장영실이 만든 것으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새로운 모델이라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이시계는 세종7년 10월에 준공된 경복궁 서운각의 보루각에 설치,가동되었다.

이는 장영실이 만든 최초의 물시계로 중국 유학에서 얻은 결실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자동물시계를 발명하게 된다.

1434년(세종16년)에 만들어진 [자격루]가 바로 그것이다.

자격루는 파수호4개, 수수호2개, 살대 12개, 동력전달장치, 자동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띄워 올리면 그 부력이 지렛대와 쇠사슬에 전달되어

격발하여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자동장치는 11세기 송나라의 소송이 제작했던 천문시계와 원 순제의 명에 의해 제작된 궁정물시계,

아라비아의 Aljazari의 자동물시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그러나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의 추진방식격발방식은 이들 자동물시계와는 다르며

기술적으로 매우 앞선 독창적인 모델이다.

이로 인해 장영실은 이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정4품 호군으로 승진한다.

장영실이 죽은 뒤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의 고장을 수리하지 못하여 사용이 중지된 적도 있으나

1543년(중종 29년) 새로운 자격루가 만들어지기까지

1백여년동안 장영실의 자격루는 조선의 물시계로 그 기능을 다했다.



이후 장영실은 천체관측을 위하여 혼천의를 제작하고 당시의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도 관여한다.

1437년(세종19년)에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도 제작한다.

그 이듬해에 종3품 대호군으로 승진한 장영실은 세종을 위하여 특별히 옥루라는 물시계를 발명한다.

이 시계는 흠경각에 보존돼 1백년 넘게 임금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초에 경복궁의 실화로 불타 소실됐다

1554년(명종9년)에 장영실이 남긴 설계도로 다시 복원된다.



드디어 그는 1441년(세종23년)에 세계 최초의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발명,

그 공로로 정3품 상호군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다음해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세종의 승여가 부서지는 바람에

불경죄로 투옥되어 장형을 받은 뒤 파면당한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과학이라는 용어가 생소했던 시절, 여기다 신분제가 철저했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장영실은 단지 관노출신의 재능있는 장인으로서만 인정받았을 뿐이다.

비록 신분은 미천하였을지라도 그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한다면 특히 신분제 사회 속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만으로 자신의 신분을 벗어난 점, 조선 전기 최고의 군주인 세종이 그의 과학적 재능을 인정한 점에서 볼 때

그는 충분히 과학자로서 평가를 받을 만한 [자랑스런 부산의 인물]이다.

장영실의 후손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지난 82년 "과학선현 장영실선생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 장영실 묘역을 단장, 84년 추모기념비를 제막했다.

/김정자.경성대강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