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부산기업 스토리] '국제상사'

금산금산 2015. 1. 3. 09:58

'국제상사'

 

 

 

 

국제상사부산이 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신발회사였다.

22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거느렸던 국제그룹의 모태가 된 회사다.

그런 국제상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우연에 가깝다.

1948년 4월 창업자 양정모 회장의 부친 양태진이 운영하던

정미소(현 부산진시장 주차장 자리) 에 불이 난 것이다.

부산공업학교(현 부산공고) 출신으로 평소 제조업에 관심이 많았던 양 회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미소 사업을 접고 신발 공장을 차리는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적산기업이었던 삼화고무가 매월 25만 켤레를 생산하는 대기업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등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런 역경 속에서 국제상사가 성장의 발판을 다진 것은 6·25 전쟁 때였다.

군납 업체로 지정을 받는 특혜를 누린 것이다. 

 

 


 
부산이 낳은 세계 최대 신발회사
5공 정권과 불화설로 온갖 억측

 

 

 


전쟁 특수가 끝나면서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린 것도 제2의 성장을 가져왔다.

박정희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1970년대에 현장 종업원만 3만 명이 넘는 세계최대 신발회사로 등극하면서 금융, 건설, 화학 분야로

속속 진출한 데 이어 전국 4번 째 종합상사로 지정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1985년 초 확장세를 이어가던 국제그룹이 갑자기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그러던 1985년 2월 21일,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 이필선 행장이 전격적으로

국제그룹 해체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석연치 않았다.

당시 이 행장은 발표문을 읽기만 했을 뿐 국제그룹 해체는 전두환 전 대통령김만제 전 재무부 장관 간의

밀실회담에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드러 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양 회장이 청와대 회의에 지각 참석하는 바람에 미움을 산 결과"라거나

"일해재단 조성용 정치자금을 어음으로 낸 데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격노한 나머지

공중분해를 지시했다"는 등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급기야는 헌법재판소1993년 7월 19일

"5공 정권이 국제그룹 해체에 관여한 것은 위헌이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구체적인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국제상사 역시 아련한 추억 속의 기업으로 멀어져 갔다.

 

논설위원 정순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