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8> 사천
[구계서원]과 구암 선생
퇴계·남명과 교유했던 이정, 서원 세 곳 세워 후학양성
지난해 열린 사천 구암제의 과거시험 재현 행사에서 시제를 발표하는 임무를 맡은 사천시장이 어가를 타고 과거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 사천 출신 조선시대 유학자
- 서악·옥천·구계서원 건립했지만
- 교육에 힘쓴 업적 재조명 못돼
- 문화원, 학술세미나·구암제 개최
조선시대 통치 이념이자 우리나라 사상의 근간은 누가 뭐라해도 유학이다. 조선시대 이후 수많은 유학자 가운데는 단연 퇴계와 남명이라는 양대 거유가 으뜸이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이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11살이나 적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퇴계와 남명과 교유하면서 서원을 세우고, 교육에 힘 쓴 구암(龜巖) 이정(李楨)선생은 그리 잘 알지 못한다.
구암은 1512년(명종 7년) 지금의 사천시 사천읍 구암마을에서 태어났다. 25살의 나이에 문과별시에서 장원급제했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 신분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갔으며, 29세때 이조정랑을 거쳐 30살에 영천군수가 됐다.
구암은 영천군수 때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을 만났고, 도산서원을 찾아가 퇴계와 조우했다. 주세붕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인물이다. 구암 선생도 나중에 경주부윤을 지내면서 서악정사(후에 사액을 받아 서악서원이 됨)를 세웠고, 순천부사로 재직할 때는 나중에 전라도 최초로 사액을 받은 옥천정사(옥천서원)를 건립했다. 30여 년 간 공직생활을 해 온 구암은 55세때 모든 공직을 사임했다. 58세 때 고향인 사천에서 구암정사(구계서원)와 대관대(大觀臺)를 준공한 뒤 후학양성에 매진하려 했지만 60세인 1571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구암은 사액을 받은 서원 세 곳을 세운 인물이다. 조선시대 사립대학이자 성리학 발전의 구심체인 서원을, 그것도 세 곳이나 건립한 기록은 구암이 유일하다.
■구암의 생애
사천 구계서원에서 유림과 후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제향을 올리고 있다. |
퇴계는 30대에 관직에 나갔기 때문에 11살 어린 구암과 퇴계는 비슷한 시기에 공직생활을 했다. 남명은 과거 예시시험에는 여러번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해 과거를 포기하고 산림처사로 일생을 보냈다. 구암은 55세에 순천부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주로 외직을 맡았다. 서울의 조정에서 내직을 맡는 벼슬길도 있었겠지만 10여 년의 사임기간을 제외하고는 영천군수, 선산군수, 청주목사, 경주부윤, 순천부사 등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외직에 있었다.
구암은 영천군수 재임 때인 30세때 주세붕을 알게 됐다. 32세 때는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에게 학문을 배운다. 이 때 퇴계학파의중심인 경북 안동권에서 명현들과 교유했다. 이는 성리학의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된다.
경주부윤 때는 왕릉이 흐물어져 논밭으로 개간되자 백성들을 설득해 복원했으며, 무열왕릉과 김유신묘에 제사하는 등 풍속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또 선현들을 기리고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서악정사를 건립하기도 했다. 순천부사로 있을 때도 김굉필의 유문과 사적을 수집 정리해 경현록을 만들고 옥천정사를 지어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구암을 세상밖으로
장창현 구계서원대관대 유계회장이 구암제 때 제향에 앞서 구암 선생의 위패를 닦고 있다. |
구암의 30여 년 관직생활에서 드러난 성리학적 업적과 백성을 사랑한 치적은 거의 재조명 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후학이 끊어진 탓도 있지만 후손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구암이 작성한것으로 보이는 수백통의 서한문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퇴계가 보낸답신 성격의 편지글이 100여 통이 넘는것으로 볼 때 같은 량의 구암 편지글도 있었을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구암은 사천문화원이 10여 년전부터 구암사상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조금씩 세상밖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학문적 결정체인 구암집을 발간하는 한편 구암의 유학· 문학사상, 구암연구의 반성, 구암의 주자학과 경학 등을 주제로 하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또 지난 2010년부터는 구암제를 열고 있다. 과거시험을 재현하고 청소년 백일장과 어린이 미술그리기 행사도 갖는다.
구계서원대관대유계회 장창현 회장은 "성리학적 업적이 지대하고, 목민관으로서의 업적도 두드러진 구암은 반드시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며 "구암학문을 계승할 연구기관이 설립될 때까지 재조명 사업을 꾸준히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 구암제
- 과거시험 재현, 매년 300여명 성시…한시 200편씩 탄생
구암 이정 선생을 재조명하고 시민들에게 친근감 있는 지역 인물로 다가오게 할 취지에서 치러지는 구암제는 지난 2010년부터 시작됐다. 당초에는 2009년 첫 행사 계획이 잡혀 있었으나 당시 불어닥친 신종플루의 영향으로 모든 행사가 취소됐다. 그 전에는 사천문화원이 2005년 께부터 행사를 구상해왔지만 예산 지원이 뒷받침 되지 않아 번번히 미뤄지다 이 때부터 열리게 됐다. 박동선 사천문화원장은 경남도에 예산지원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태호 당시 지사에게 "사천 구계서원에 구암과 함께 배향된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 선생이 상산(商山)김씨로 김 지사의 선조인데 이렇게 홀대해서야 되겠느냐"고 따져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구암제의 백미는 과거시험 재현이다. 구암 선생이 장원급제를 했기 때문에 이를 되새겨 보자는 의미다. 첫해에는 전국에서 230여명이 참가했고 이듬해에는 250명, 지난해에는 270명으로 응시자 수가 늘었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과거시험이다. 대부분 60∼70대로 향교 등지에서 한시를 배운 이들이다. 국왕 복장의 사천시장이 즉석에서 시제를 발표하는데 조선시대 과거시험과는 달리 한자어 5글자 가운데 4글자는 미리 알려주고 이날은 남은 한 글자만 발표한다. 그것도 여러개의 글자 가운데 추첨으로 한 글자를 뽑기 때문에 누구도 시제를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한시를 배운 나이 많은 사람들도 답안지를 제출하지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구암제의 과거시험 재현에 응시생이 몰리는것은 채점의 공정성에 신뢰가 있어서다. 주최 측은 답안지가 제출되면 답안지 끝의 제출자 성명을 오려내고 번호를 매긴 뒤 심사위원들에게 전달한다. 심사위원들은 제출자의 성명을 모르기 때문에 답안지만 갖고 우수한 작품을 선정한다. 이런 이유에서 응시자들은 누구라도 '좋은 작품이 선정됐다'는 말을 하게 된다.
시제를 발표하는 왕의 행차나 나중에 장원급제자가 스승이나 고관을 찾아 인사하는 유가행렬 등도 조선시대 당시의 복장과 절차를 재현했다. 과거시험도 첫해에는 사천고교 강당에서 시작했다가 다음해부터는 종합문화제가 펼쳐지는 선진리성 입구의 주 행사장에서 열렸다. 구계서원에 향사된 구암을 시민과 관광객 속으로 끌어 내기 위해서다.
사천문화원 공대원(46) 사무국장은 "구암제에서는 해마다 구암과 사천에 관한 한시가 200여 편이나 만들어지고 있다"며 "문화원은 수익을 남기기 보다는 의미있는 행사를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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