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17

‘외딴 섬’에서 부산으로!~

Y 씨는 1958년 전남 진도의 작은 섬에서 태어나 돈을 벌려고 어린 나이에 부산으로 온 그는 영도 청학동의 친구집에 머물면서 태화고무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재봉과에서 속칭 '시다' 보조원 일을 하였습니다미싱 돌리는 언니 앞에 앉아 있다가, 작업한 것을 받아서 실밥 튀어나온 부분들을 쪽가위로 다듬는 작업이었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wzjmLz80Mhc

최초의 '관부 연락선'일기환(壹岐丸)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운항하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은 1905년 9월 11일 취항하였습니다. 이날 밤 1천 680t 급의 정기 연락선 일기환(壹岐丸)은 시모노세키항을 떠나 다음날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신속하게 병력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철도와 한국의 물자를 최대한 빨리 일본으로 옮겨갈 수 있는 노선 지금의 경부선 철도의 원형은, 이렇게 해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정기 연락선 취항은 일본 자국의 산요선 철도와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연결하여 일제의 대륙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송선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un6bOoUMVk&t=25s

교육 2024.09.21

일제강점기까지도 배가 드나들었었던 ‘동천(東川)’!~

일제강점기 동천은 죽은 하천이 아니라 배가 다니는 운하였습니다고무신의 주원료인 고무는 전량 동남아에서 수입하였고 고무 수입항만이 바로 동천이었습니다 1936년 조선방직과 대선양조 등 동천 주변의 다섯 회사가, 동천에 퇴적물이 쌓여 배가 드나들지 못해 경제적 손실이 크므로 동천 입구 대선 양조에서 서면에 이르는 구간에 동천 운하를 준설해 달라는 진정서를 부산 부윤 시장에게 내었습니다 동천 주변으로 신발회사가 성업하면서 자연히 하나둘씩 부산진구에 신발회사가 늘어났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8U2BY0IDbM&t=8s

“돈내기(?)”

1960년대 부산의 신발공장은 인기가 높은 직종이었습니다일자리가 많고 큰 업체여서 구직자들이 대거 몰렸습니다 그때 신발공장에서는 일명 '돈내기'로, 자신이 작업한 만큼 돈을 받아갔습니다 부서는 주야 교대로 24시간 풀 가동 되었습니다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어떻게든 취직을 할려고 했던 곳이라, 모두가 일밖에 몰랐었고 쉬는 날도 거의 없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rGKvKsQsfg&t=7s

고무신의 메카(Mecca)가 된 부산!~

1930년대 후반 고무 원료 수입이 어려워지자, 상점에서 또다시 나막신을 진열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무공업이 재개된 것은 해방 이후였습니다일본인의 귀속재산을 민간에 불하하면서 고무공장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각종 기업들이 속속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피란민 유입으로 신발 수요도 덩달아 늘어났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wpJLQapZ7Q&t=6s

순종을 군함에 태워 일본으로 납치한다는 소문&일제의 식민지로 전락...

순종이 부산에 도착한 때는, 1909년 1월 8일 오전이었습니다부산역에는 순종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만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교차로마다 순행의 경축을 상징하는 녹문(綠門)을 세웠으며, 집집마다 한·일 양국기를 게양하였습니다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군함에서 예포를 쏘아대니 축하 분위기가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부산의 순행도, 일제의 의도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5uEV9I-nM

교육 2024.05.30

해방이 되었지만, 콜레라 때문에 반갑지도 않아...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귀환동포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귀환동포들이 반갑지도 않은 것은 그놈의 콜레라 때문이었습니다.  1946년 5월 귀환동포 3150명을 싣고 중국에서 온 수송선이 일주일이 넘도록 부산에 입항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배 안에 호열자가 창궐하여 2명이 사망하자 이들을 수장했기 때문입니다.  미 군정의 방역부에서 소독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그 해 부산에서는 하룻밤에 80명씩이 호열자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호열자 환자를 장롱에 감추었다가 한 동네가 몰살을 당했으며, 아미동 화장터에서 연기가 날아온다고 화장터를 부수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또 시신 운반을 거부하는 운전사에게 권총을 들이대기도 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6ULElFeM..

개항과 함께 ‘부산을 덮쳤던’ 콜레라!~

근대 시기까지도 몸서리치게 무서운 병은 역병이었습니다. 호열자는 역병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병이었습니다. 전파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치사율도 높았습니다.  호열자를 호역(虎疫)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호랑이가 살점을 뜯어내는 고통을 준다는 뜻으로 호열자에 관한 공포 관념이 담겨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kpjqPyl1FY

건강 이바구 202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