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5

“일제가 조선의 경제발전을 위해 철도를 부설했다”는 親日친일...

일본에서 선박을 통하여 만주까지 갈 경우에 16일 이상이나 소요되던 것이 관부연락선과 철도를 이용하면, 단 6일이면 충분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부터, 시모노세키까지 이어진 철길과 한반도를 관통해 내려온 철도! 그리고 양국의 중심에서 이들 철길을 연결해준 관부연락선!이어 1930년 12월 20일 광주와 여수 간에 광주선이 개통되면서 시모노세키와 여수 간에도 관여(關麗)연락선을 띄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M8WCvgcAM

교육 2024.10.12

'사의 찬미' 윤심덕 동반자살 VS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일제의 철저한 계획속에 1905년 9월 11일 대륙 침략의 선봉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현해탄 항로에 관부연락선을 취항시켰습니다 초창기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학생이었습니다. 학도병과 위안부 할머니들도 연락선을 통하여 비애의 현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성악가인 윤심덕은 1926년 8월 4일 '사의 찬미'를 레코드 취입하고 현해탄을 건너오다가 목포 갑부의 아들이자 유부남인 애인 김우진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며 검푸른 바다에 함께 몸을 던진 사건도 유명합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관부연락선 곤륜환이 전쟁물자 수송선 역할까지 하며 승무원을 합해 총 655명을 태우고 일본의 시모노세키 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중, 1943년 10월 4일 밤 23시..

교육 2024.10.05

고무신의 메카(Mecca)가 된 부산!~

1930년대 후반 고무 원료 수입이 어려워지자, 상점에서 또다시 나막신을 진열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무공업이 재개된 것은 해방 이후였습니다일본인의 귀속재산을 민간에 불하하면서 고무공장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각종 기업들이 속속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피란민 유입으로 신발 수요도 덩달아 늘어났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wpJLQapZ7Q&t=6s

순종을 군함에 태워 일본으로 납치한다는 소문&일제의 식민지로 전락...

순종이 부산에 도착한 때는, 1909년 1월 8일 오전이었습니다부산역에는 순종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만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교차로마다 순행의 경축을 상징하는 녹문(綠門)을 세웠으며, 집집마다 한·일 양국기를 게양하였습니다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군함에서 예포를 쏘아대니 축하 분위기가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부산의 순행도, 일제의 의도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5uEV9I-nM

교육 2024.05.30

해방이 되었지만, 콜레라 때문에 반갑지도 않아...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귀환동포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귀환동포들이 반갑지도 않은 것은 그놈의 콜레라 때문이었습니다.  1946년 5월 귀환동포 3150명을 싣고 중국에서 온 수송선이 일주일이 넘도록 부산에 입항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배 안에 호열자가 창궐하여 2명이 사망하자 이들을 수장했기 때문입니다.  미 군정의 방역부에서 소독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그 해 부산에서는 하룻밤에 80명씩이 호열자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호열자 환자를 장롱에 감추었다가 한 동네가 몰살을 당했으며, 아미동 화장터에서 연기가 날아온다고 화장터를 부수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또 시신 운반을 거부하는 운전사에게 권총을 들이대기도 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6ULElF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