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37

부산 경마구락부의 경마대회

일제 강점기! 말(馬)이 도박의 수단으로 변질 되었다. 말(馬) 자원의 육성을 위한 경마가 점차 돈벌이 수단으로 추락했던 것이다. 일제는 1921년 부산진 매축지에서 처음으로 경마대회가 열렸다. 수익 창출을 노린 부산 경마구락부는 관람자들에게 마권을 발행하였다. 부산 경마대회에서 뛰는 말과 환호하는 인파 그리고 출렁이는 사행심이 도가니 속처럼 들끓었다.경마가 있을 때면 교통 편의를 위해 임시전차를 운행하고 버스 요금도 할인 하였다그만큼 경마장은 연일 수많은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2gjVJwo6OWQ

비공식 미군 물자 유출과 부산 경제

주한미군이 사용할 물자를 미국에서 공수해 오면 임시 보관하였다가 전국의 미군 부대로 공급하는 일을 하야리아 부대가 하였다. 하야리아 부대의 물건이 부산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이 마을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무원이나 카튜사와 같은 군인들이 하나 둘 씩 들고 나오는 휴지나 오렌지들이 유통되기도 하였고 양공주와 중간상인 아줌마들이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좀 더 국제적인 이미지로 만든 공로자인 셈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xg2vDTraz4

탁주의 독점으로 오히려 술맛이 떨어졌다!~

1937년 부산의 막걸리 양조장이 난립하자, 탁주업자들은... 지역별로 합동회사를 차리려고 시도 하였다. 당시 부산에서는, 비교적 큰 탁주 양조장이... 28곳이 있었다. 탁주를 소규모로 생산하는, 업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고... 합동회사 설립에 따른 주식 배당 문제도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막걸리가... 그때 생겨난 것이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4E0puUjE2jA

부산진구 범전200 본동마을,옛 하야리아

옛 하야리아 부대!정확히 말하자면, 부산진구 범전2동 본동마을! 도로 주변 몇몇 상가건물을 제외하고는, 본동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백양산 계곡물로 농사를 짓던 마을 주민들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경마장에게,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하야리아 부대에게 그들의 농토 대부분을 내어준 뒤, 현재는 시민공원에게 집터 마저 내어주고 공중분해 되어 버린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7mF3VzlNYk

담배 같은 것을 주면(?) ‘전기를 공급’ 해주었던 시절도

담배 같은 것을 주면(?) ‘전기를 공급’ 해주었던 시절도 L씨는 함경남도가 고향으로, 1·4후퇴 때 피난을 내려와서 미군 부대의 '하우스보이' 등을 전전하다가 20대 초반에 태화고무 공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태화고무에서 동양고무, 삼화고무 등으로 옮겨다니며 조수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롤러를 돌리는 롤러 기술자가 되었다고 한다. 뽀얀 고무 가루가 날리고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밀가루 공장 같은 느낌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3kTRZYYAmc

라떼, 운동회 추억!

어렸을적 운동회 날이었다땅!하는 신호음과 함께 뛰어나가서 사다리를 통과하고 뜀틀을 뛰어넘어 빈 가마니까지 뒤집어 쓰고 뛰었다. 저만치 앞에 놓인 쟁반 위의 밀가루에 얼굴을 파묻고는 양손을 등뒤로 한 채 접혀진 종이를 입으로 물었다.그리고는 관중석을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그러나 접혀진 종이를 펼치는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뿔사! 접혀진 종이에 할머니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https://www.youtube.com/watch?v=gV_3pTlOdNw

우리 땅 VS 저거들 땅 하야리아

하야리아 부대가 부산시로 반환되기 전까지 이 부대는 미군에 점령당한 우리나라 땅의 일부였다. 높은 담벼락과 그 위에 둘러쳐진 철조망은 반미운동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방음벽과 같아 보였다. 미국과 관련이 많았던 한국의 정치적 사건 불균등한 한미 간 무역 분쟁 혹은 압력 미군들의 횡포로부터 국민이 희생당할 때면 부대 앞에서 양키 고 홈의 목소리가 들리던 곳이었다. 경찰이 하야리아 부대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zu1WnDIeK4

‘하야리아’의 역사&시민공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전쟁에서 패한 일제가 퇴각하면 우리에게 돌아올 줄 알았던 땅이 또 다른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군이 물러가면서 일본 주둔지에 대한 점령군의 자격으로 한국에 입성한 미군은 38선을 경계로 남한 지역의 군정을 실시하였다. 하야리아 부대 안팎에는 위락시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마 트랙이 설치되면서 중단되었던 경마 대회도 다시 재개 되었다. 1949년 가을 한국마사회가 추계경마대회를 열자 하야리아 부대의 장교 클럽은 임시 마권 발매소로 활용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P6lX9K1CYE

라떼, 노란 월급 봉투

컴퓨터와 전자기기가 없었던 당시는, 월급 계산을 주산과 수기(手記) 등으로 하였다중소 공장에서는 직원 수백 명의 월급 계산을 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노란 월급봉투에다가 만 원짜리,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을 일일이 손으로 세어서 넣었다 어떤 직원은 봉투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몰래 빼낸 뒤 돈이 모자란다고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TX4GP7Injmc&t=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