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바다] 134

최대 밀수 소굴이었던, 아치섬 '조도'를 기억하십니까?

아치섬이라고도 하는 조도는, 1950년대 국내에서 악명을 떨치던 최대 밀수 소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967년 방파제 공사로 조도가 육지와 이어지고, 1974년 6월에는 한국해양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 오면서 캠퍼스단지로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조도가 밀수조직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부산 시내와도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며 인근에는 부산항의 외항선 묘박지가 있어서 밀수품을 양륙하는데도 최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WPu8ZDXUuE

映畫역사(조선키네마와 나운규)2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서 세운 영화 제작사였습니다. 중구청에서 출발해 남성여고 입구를 지나면 한성각이라는 중국집이있었습니다. 그 일대가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인 조선 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gb4QPRvhxs

밀수 (대마도 특공대) 3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밀수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습니다 호형호제하던 한국필마저 사형대에서 이슬처럼 사라질 판국에 수배자인 이정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은신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특공대 밀수선을 타고 일본 대마도로 밀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bkweKfXg

밀수(대마도 특공대)2

1965년 당시 이즈하라항에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평균 30여 척의 밀수선이 정박을 해 놓고 있었고 이들에게 일본 상품을 공급하는 무역상도 20여 개나 되었습니다.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밀수가 극성을 부렸고, 대일 밀무역의 절반 가량인 48%가 대마도 이즈하라항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이즈하라항이 밀수 본거지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밀항자 이정기가 밀수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tLzhMeXNV4

밀수(대마도 특공대)1

1950년 중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간의 민간무역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달려든 것이, 특공대 밀수꾼이었습니다. 특공대 밀수는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한국경제가 한창 발돋움하려는 1969년까지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를 무대로 한 해상밀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Bjn3nLtIc

밀항(密航)

6.25를 전후해서 국내에서는 부산항이 밀항과 밀수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특히 1960년대 초반에는 4·19, 5·16 등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살기 힘든 시기에 밀항자가 많아졌습니다. 몰래 일본 군함을 타고 도착한 곳은 나가사키 항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밀항자와 관련이 있는 시설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형기(刑期)가 없는 수용소라고 불리우던 '오무라 외국인수용소(大村外國人收容所)'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MJFp8wWTi4

부산 사상초등학교 50회, ‘광안리 밤바다’ 위에서

광안리 밤바다 위에서, 지난 9월24일 토요일. 부산 사상초등학교 50회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동안 보지 못한 꼬치 친구들도 보였고... 친구들아!~ ‘오래 살아라!’하는 말은 요사이 “덕담”이 아니고 “악담”이라카더라, 우쨌던 사는 날 동안 ‘아푸지 말고 우리 건강하게 살다’가 가제이!... 충구. 성진 친구 고맙데이! 그라고 임원진 친구들도 욕봤데이! https://www.youtube.com/watch?v=JQakdn98MF4&t=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