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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 <14> '물 좀 주이소'-임시수도 부산의 '물 기근' 이야기

금산금산 2014. 5. 24. 21:31

 

부산 사람도 모르는 <14>

'물 좀 주이소' - 임시수도 부산의

'물 기근' 이야기

물없어 사이렌만 울리던 소방차 … 임시수도 시절 '불의 도시' 오명 배경

 

 

일제 강점기 부산 성지곡 수원지. 이 수원지는 1909년 축조됐다. 부산박물관 제공

 

 

- 1952년 부산 상하수도 시설
- 34만 명 충족분 설치 상태서
- 피란민 몰려와 인구 100만
- 심각한 물부족은 당연지사

- 市, 급수 제한으로 해결 시도
- 시내 3일·영도 4일마다 공급
- 우물 있는 집 문 걸어 잠그고
- 물장수들 지게로 나르며 팔아

- 판자·거적으로 지은 집 많아
- 조그마한 불씨도 화마 변해
- 소방차들이 현장 도착해도
- 소화전에선 물 안나와 낭패

 

 

■ 땡볕 가뭄에 타는 부산의 민심

   

임시수도 시기 부산 동천에서 빨래하는 풍경.

당시 시민은 대개 인근의 하천에서 빨래를 했다. 김한근 제공

우리나라는 날씨가 건조하고,

장마철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계절풍 기후이다.

장마가 오기 전 땡볕 가뭄이 계속되면 곡식뿐만 아니라

민심까지 타들어 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기우제가 성행했다.

오직 하늘이 내려주는 빗물에 의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부산에도 기우제를 지냈던 장소가 많다.

조선시대 태종대에서 동래부사가 기우제를 지냈고,

해운대 장산에는 주민이 치성을 드렸던 기우제 장소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자성대에서 기우제를 치렀으며,

1950년대까지 용두산 정상에서 도우제를 올렸다.


1952년엔 정말 지독한 가뭄이 부산을 덮쳤다.

삼복더위와 입추를 지났는데도 몇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수원지에는 물이 말라갔고, 땅은 쩍쩍 갈라졌다.

부산의 각 마을에서는 간절하게 기우제를 지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부산 사람을 바짝 마르게 한 이때의 물 기근은

자연재해 탓만은 아니었다.

당시 부산에는 34만 명을 충족할 수 있는 상하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시기 피란민이 몰려와 100만 인구가 됐으니 물 부족은 당연했다.


■ 목마른 임시수도의 풍경

임시수도 부산에서 물싸움은 목불인견이었다.

수도과 직원과 시민이 다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고, 거리의 수도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새어나오면

서로 차지하느라 싸움을 벌였다.

물 도둑질도 횡행했다.

공공수도전의 수도 마개를 뚫어 물을 훔쳐갔으며, '보따리장수'라는 부정 수도업자들이 판을 쳤다.

보따리장수는 몰래 수도관에 구멍을 뚫는 공사를 하는 업자를 말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물 없는 지옥이 된 부산을 "물을 위한 비극과 먹기 위한 참상이 갈증에 애끓는 부르짖음과 더불어 때아닌 말썽이 비일비재하였다"고 개탄했다.

상수도 시설이 갖춰지기 전 공동우물은 물을 공급하는 원천이었다.

마을 주민은 여기에서 뜬 물을 마시고, 밥과 음식을 해 먹었다.

우물은 주민에게 생명수뿐만 아니라 주민 간 소통의 역할도 했다.

신성하고 깨끗한 장소였던 우물도 임시수도 시절에는 시련기를 맞았다.

물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이 공동우물의 밑바닥에 깔린 물조차 박박 긁어 썼다.

결국, 사시사철 맑은 샘물이 솟던 우물도 급증한 식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냈다.

수질도 나빠졌다.

관리가 소홀한 우물에는 더러운 물이 역류해 각종 세균이 들끓기도 했다.

우물이 전염병의 근원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자 1952년 8월,

한 대학 약학부는 부산 각처에 있는 우물의 수질검사에 착수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시설

부산은 최초의 근대 수도 시설이 설치된 물의 도시였다.

보수천을 취수원으로 하여 죽관을 설치한 때가 1886년 즈음이었다.

일본 거류민의 증가에 비례해 물의 수요가 늘어나자 상수도 시설이 설치됐다.

1894년께 보수천에는 집수 제언 시설이 만들어졌으며, 대청정(大廳町)에는 배수지가 구축됐다.

이것은 일본 거류민을 위해 추진된 사업이었으나 부산이 근대적 수도 시설을 갖추는데 밑거름이 됐다.

부산 인구가 급증하면서 물을 담아 가두는 수원지도 축조됐다.

1902년께는 구덕 수원지, 1909년에는 성지곡 수원지가 축조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법기 수원지, 해방 직후에는 회동 댐이 건설돼 물 공급량을 늘려나갔다.

그렇지만 이런 수도시설을 통한 물 공급은 일본인이 사는 지역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민가에서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했으며, 하천 인근 주민은 강물을 이용했다.

1970년대까지도 낙동강 하중도 주민은 낙동강 물을 떠서 식수로 먹었다고 한다.


■ 양동이 행렬과 야박해진 물인심

 

1·4 후퇴 직후 부산에 피란민이 몰리자 부산시는 수도 확장공사에 착수했다.

당시 인구로 볼 때 4만 t의 물이 필요했으나 공급되는 양은 2만 t에 지나지 않았다.

부산시는 5억 원이 소요되는 배수망 확충 공사를 계획하면서 부산 시민의 갈증이 곧 해결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이는 장밋빛 전망에 불과했다.

시내 여러 곳에 공동 수도를 설치했건만 물 공급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수원지를 증설해 생산량을 늘린 것이 아니거니와 수도관이 낡아 누수율이 40%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와 부산시는 해답을 제한 급수에서 찾았다.

부산 시내에는 3일에 한 번씩 급수했고, 영도 방면 급수는 4일 이상이 걸렸다.

급수 시간도 2시간 남짓이었다.

급수가 시작되면 공동 수도 앞에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양동이가 꼬리를 물어 수백m가 넘는 행렬을 이뤘고, 먼저 물을 얻고자 새치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물싸움이 벌어졌다. 이렇게 물 전쟁을 치러도 받는 물은 기껏 한 가구당 세 동이에 불과했다.

물 기근이 계속되자 물 인심도 야박해졌다.

수도시설과 우물이 있는 집에서는 피란민의 물 동냥을 감당 못 하고 문을 잠가버렸다.

물 도둑질을 우려해 우물 뚜껑에도 자물쇠를 채웠다.

 

 



■ 귀한 존재가 된 물장수

급수가 제때 안 되자 물장수가 등장했다.

물통을 지게에 얹거나 물을 담은 드럼통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물을 팔았다.

물을 계속 사용해야 했던 음식점은 제 발로 물을 들고 찾아오는 물장수를 귀한 존재로 여겼다.

상수도 당국도 물을 골고루 공급해주는 물장수를 고마워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물 기근 속에 물장수가 파는 물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1952년에는 물 한 지게1000원까지 했으니 헐벗은 피란민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너무 값비쌌다.

처절한 물 기근 속에서 씻지 못하여 얼굴에 때가 끼고 초췌한 부산 사람이 많아졌다.

격일제로 물이 공급되는 공중목욕탕에라도 가고 싶지만 비싼 목욕료를 지불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기가 있는 집에서는 빨래 때문에 걱정이 컸다.

다른 세탁물은 대개 인근의 하천에 가서 빨래를 했지만, 아기가 쓰는 기저귀는 깨끗한 물로 씻지 않을 수 없었다. 간신히 얻은 수돗물로 기저귀 빨래를 했지만 식수 생각에 엄마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 불의 도시, 오명 뒤에 숨은 물

물이 고갈된 임시수도에서 화재가 잇따랐다.

임시수도 부산 시내에서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3건 이상화재가 발생했다.

부산이 '불의 도시'라는 오명도 생겼다.

시내 곳곳에는 판자와 거적, 종이 등을 얼기설기 엮은 임시가옥이 촘촘히 있었다.

이런 집에는 아궁이 시설이 없기 때문에 피란민들은 아무 데서 불을 피웠다.

그러다 불씨가 날려 판잣집에 붙으면 삽시간에 인근의 집들을 집어삼키는 화마가 되었다.

이 화마를 진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물 뿐이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뿌릴 물을 찾을 수 없었다.

소방차가 도착해도 사이렌 소리만 요란할 뿐, 소화전에서 물이 뿜어 나오려면 10분 이상이 걸렸다.

송수관의 수돗물을 화재 지역으로 돌리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동안 불은 판잣집 수백 동을 집어삼켰다.

임시수도의 지독한 물 기근은 부산이 불의 도시가 된 원인 중 하나였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