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6-2> [송상현 광장 스토리텔링]- 팩션-동아시아를 움직인 '충렬공의 여인'들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말렸다
"송상현의 여인을 건드려 좋을 게 없습니다"
매년 10월 열리는 동래읍성 역사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인 '동래성 전투 재현' 현장극. 송상현 동래부사(의자에 앉은 이)는 '길을 비켜줄 수 없다'며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이곳에서 그를 섬기던 애첩 금섬 등도 함께 숨졌다. |
왜? 귀신이라도 붙은겐가?
송공의 애첩 금섬을 죽인 뒤로
조선여인의 순사가 줄을 잇고
기왓장으로 저항하던
두 여인을 죽인 뒤로
전국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
임진년(1592년) 4월14일.
이십만 명의 왜군이 칠백여 척의 배를 타고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왜군들은 정발 첨사가 지키는 부산진성을 반 나절만에 함락한 뒤 북으로 진격해 오후부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 오만 명이 동래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송상현은 밤새 성을 지키는 관민들을 독려한 뒤 망루에 올라 멀리 금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왜군이 쳐들어온 것보다 평소에 장수라고 호령하는 자들에 대한 실망이 컸다. 부산진성이 무너지자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경상좌수사 박홍은 재산과 제 식구들만 챙겨 도망갔다. 심지어 울산군수 이언눌은 적장의 길 앞잡이가 되어 왜군과 함께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다.
여명이 동틀 무렵, 둥둥 둥둥 진공의 북소리가 울렸다. 수많은 적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성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적군은 오만 명, 아군은 이천 명. 중과부적이었다. 싸우다 성을 베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송상현은 애첩 김섬과 이양녀를 불러 조복을 가져오게 했다.
송상현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망궐례를 하고 일어서자 금섬이 말했다.
"저희 둘을 베어주십시오. 놈들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소천(所天·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의 칼에 죽고 싶습니다."
송상현은 금섬의 말을 듣고 황산벌의 계백처럼 식솔의 목을 베고나가 죽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송상현은 칼로 그녀들의 목을 베는 대신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로 시 한 수를 부채에 적었다.
孤城月暈 외로운 성은 달무리 지듯 포위되고
列鎭高枕 이웃한 여러 진은 잠든 듯 고요하네
君臣義重 임금과 신하 의리 무거운 것이오매
父子恩輕 아비와 자식 은정 가벼이 하오리다
송상현은 피로 쓴 혈선도(血扇圖)를 좀 더 젊은 이양녀에게 주며 말했다.
"내 손으로 너희들을 죽일 수 없다. 너희 둘은 아직 젊으니 반드시 살 길을 찾도록 해라."
날이 밝자 적장 고니시는 깃발에 글을 써서 송상현에게 다시 한 번 전의를 물었다.
"우리와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
송상현도 깃발에 글을 써서 단호하게 결사항전으로 응수했다.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비켜줄 수 없다.(戰死易假道難)"
송상현은 성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적들을 활과 칼로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2
일본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양녀(李良女)는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았다. 도요토미가 머무르고 있는 오사카성은 해자를 겹으로 두르고 거대한 무사의 위용처럼 하늘을 깎아지른 듯했다. 이양녀가 5층 천수각에 불려들어가자 도요토미는 춘화도가 그려진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도요토미가 부채 너머 원숭이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소문대로 과연 절색이로구나. 이제 송상현도 죽고 조선 땅도 내 손아귀에 떨어졌다. 절개 따윈 필요 없어."
그녀는 송공이 죽기 전 피로 그려준 혈선도를 활짝 펼치며 말했다.
"신하가 두 왕을 섬기지 않듯이 조선 여인은 두 낭군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 천하에는 단 하나의 주군,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밖에 없다. 그러니 어서 벗어라!"
"제 낭군을 죽이고 조선반도를 피로 물들인 관백에게 절대로 제 몸을 허락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뭣이라고? 참으로 발칙한 년이구나. 어이, 도쿠가와!"
도요토미는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불렀다.
"예, 장군님."
"당장 이 년의 목을 베어 성문 밖에 걸어라!"
도쿠가와는 고개를 반쯤 조아린 채 차분하게 말했다.
"송상현의 여자들을 건드려서는 좋을 게 없습니다."
"왜? 무슨 귀신이라도 붙은 겐가?"
"전에 금섬을 죽인 뒤로 조선여인들의 순사(殉死)가 이어지고, 기왓장으로 저항하던 두 여인을 죽인 뒤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생 금섬이 왜장의 능욕에 사흘 동안 저항하다 칼에 쓰러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영성 이기대에서는 두 기생이 왜장을 껴안고 동해바다로 투신했으며, 진주에서는 기생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고, 평양에서는 평양기생 계월향이 성문을 열어 왜장의 목을 베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의 여인들은 '일개 기생마저 절개를 지키고 나라를 구하는데 하물며 우리 부녀자들이랴'며 왜군이 쳐들어오는 곳마다 의병과 함께 궐기해 죽음으로 맞섰던 것이다.
도쿠가와는 이어 말했다.
"지금 병사들은 '문록의 역'(임진왜란의 일본말)에 나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인데 후방에 계신 관백께서 충절의 여인을 베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도요토미는 도쿠가와의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일일이 조리 있는 말이라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 2인자로 커버린 도쿠가와의 말을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었다.
"도쿠가와. 그럼, 골치 아픈 이 여자는 네 손에 맡길 터이니 네가 알아서 처리하렷다."
"감사합니다, 전하."
도쿠가와는 동래부를 점령한 왜군들의 능욕도, 왜장 고니시의 유혹도,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협박도 모두 이겨낸 이양녀를 존경의 염으로 바라보았다.
도쿠가와가 이양녀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자신의 첫 정실부인 츠키야마(築山·츠루히메라고도 함)가 자신의 부하와 간통하자 아내의 목을 베어 죽인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 맞아들인 젊은 부인 가메히메를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해왔는데 충절의 여인 이양녀야말로 자신의 아내를 가르칠 스승으로 적합한 여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도쿠가와는 후시미(伏見)에 이양녀를 기거시키면서 자신의 부인뿐만 아니라 일본 여인들에게 조선의 법도와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게 했다.
#3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은 비록 조선을 도우는 명군의 장수로 왔지만 국가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 여인들의 죽음은 그를 매우 놀라게 했다. 송상현을 죽인 왜장조차도 그 충성스런 죽음에 감복하여 시신을 거둬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두사충은 절의가 곧고 아름다운 송공의 여인들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 금섬은 사흘간 왜장을 꾸짖다 장렬하게 순사해 조선여인의 모범이 되었고, 이양녀는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어도 절개와 법도를 지켜 일본 관백까지 그 덕을 칭송할 정도였다. 더욱이 동래부의 이름 모를 두 여인인 이촌녀(二村女)는 동래관아의 지붕에 올라가 왜군에게 기왓장을 던지면서까지 싸우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온 왜놈의 칼날에 최후의 맞았다.
두사충은 오히려 죽은 송상현을 부러워했다.
'아, 송공의 그늘이 지나간 곳에는 이름 모를 아낙네들조차 순절(殉節)을 하는구나.'
임진왜란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갔으나, 귀국한 명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과 같았다. 북방 오랑캐인 금나라의 말발굽에 짓밟혀도 송상현과 같은 충성스런 장수는 찾아볼 수 없고, 송공의 여자들처럼 충절의 여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충의와 삼강오륜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조선 땅이 그리웠다.
1597년 조선에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두사충은 아들과 사위와 함께 재빨리 원군에 지원해 다시 조선에 왔다.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두사충이 조선 땅에 다시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충렬공 송상현과 금섬의 시신을 거둬 청주 묵방산 명당자리에 묻어준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정유재란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아들과 사위와 함께 충렬의 땅,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은 달구벌(대구)에 자리를 잡고, 모명재를 짓고 주변에 뽕나무를 심었다. 하루는 그가 뽕나무에 올라가 뽕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아리따운 아낙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두사충이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송공의 여인들처럼 절의와 기품이 빼어난 여인이었다. 두사충이 매일 뽕나무에 올라가 뽕을 따며 그 절구 찧는 여인을 보며 애를 태우자, 이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들이 중간다리를 놓았고, 둘은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이후 조선 땅에서는 '님도 보고 뽕도 따고'라는 속담이 생겼는데 그 속담의 발상지가 두사충이 살던 대구 모명재 뽕밭이었다.
#4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군대를 패배시킨 도쿠가와는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그가 권좌를 차지하고 난 뒤 첫 과업은 도요토미가 두 번에 걸친 '문록·경장의 역'으로도 이루지 못한 조선정벌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휘하의 무장들은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잠시 멈추었던 조선정벌을 계속해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에도 저택에 들어갔다.
도쿠가와의 부인 가메히메가 조선차를 내오며 말했다.
"요즘 조정에서 조선 정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지요? 조선은 결코 무력으로 정벌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선은 송상현과 같은 충렬지사가 별처럼 많고 남편을 따라 순사하는 송공의 여인들이 모래처럼 많은 나라이니 결코 정복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어 전쟁보다 화친을 도모하는 것이 도요토미 가문처럼 단명하지 않고 도쿠가와 가문을 오랫동안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가메히메, 그런 생각이 어디서부터 나왔지?"
"당신이 스승을 삼아준 송공의 여자, 이양녀 사마가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도쿠가와는 이양녀의 눈동자에 살아있던 불길들을 기억했다. 조선으로 진공하려면 먼저 동래부에서 저항하는 무수한 송공의 여인들부터 베고 지나가야 할 것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조선차를 마시며 말했다.
"음, 가벼운 일본 차 맛으로는 조선 차의 깊고 구수한 이 맛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
■ 송상현 광장 길을 걸으며
송상현 부사의 애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송환된 열녀 이양녀의 정려각. 청주시 수의동에 있다. |
그 중에서도 송상현의 두 번째 첩인 이양녀는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충절의 모범을 보여 도쿠가와 부인을 비롯한 뭇 일본 여인들의 스승이 되었고, 돌아와서는 청주에 가서 본처와 함께 송공의 묘소를 지키다 죽었다. 그만큼 송공의 충의와 인품이 높았기 때문에 여인들이 목숨으로 따른 것이리라.
지금 부산 양정동과 부전동 일대 중앙대로에는 송상현 광장이 조성되고 있다. 머지않아 송상현 광장 길을 걸으며 일본과 중국까지 떨친 송공 여인들의 아름다운 향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김하기 작가
▶작가 약력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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