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16> 합천
'밤마리 오광대'
홍수로 떠내려온 '탈 · 놀이대본' 건져 양반들 허세 조롱
합천 밤마리오광대가 지난 5월 경남 하동군에서 열린 제37회 경상남도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해 신명난 춤판을 벌이고 있다. 합천 밤마리오광대 제공 |
- 낙동강 끼고 있는
- 밤마리, 내륙물동량 중간기착지
- 거래처 간 주인 기다리던 하인들
- 무료함 달래려고 시작한 놀이
- 얼굴 가리기 위해 다양한 탈 발전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흥이 많은 민족이다. '영남은 춤, 호남은 소리'라 할 정도로 낙동강을 낀 영남지방의 춤은 유별났다. '영남의 춤' 한가운데는 경남 합천의 '밤마리오광대'가 있다. 부산의 수영야류와 창원(마산), 통영, 가산오광대 등이 모두 밤마리오광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는 밤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밤마리라 불린다. 또 낙동강 변에 위치해 큰물이 나면 번번이 홍수피해를 입던 곳이다. 오죽했으면 1817년 백성들이 경상감영에 호소해 밭 세 석지기(한 섬의 씨앗을 심을 만한 넓이의 논밭)를 지원받아 '높은 대(活人臺)'를 쌓아 홍수피난처를 만들었을까.
이처럼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곳에서는 특별한 놀이문화도 생겼다. 강을 중심으로 내륙 물동량의 중간기착지 역할을 한 밤마리에서, 거래처로 간 주인을 기다리던 하인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놀이가 춤으로 진화했다. 재미있는 것은 양반을 비웃고 놀리는 춤꾼이 누구네 짐꾼이며, 누구 집 하인인지를 숨기기 위해서 얼굴을 가렸던 것이 점점 탈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탈춤의 효시
오광대 발상지임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도로 변에 세워져 있다. |
이 탈놀이는 주로 하인들의 놀이였던 탓에 양반의 허세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실제 오광대놀이에는 100명의 양반을 잡아먹으면 하늘로 승천한다는 영노(이무기)가 등장해 마지막 100번째의 양반과 맞닥뜨리고는 '도포를 보니 영락없는 양반이구나'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양반은 '나는 양반이 아니니 도포를 벗을란다'며 체통도 잊은 채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에 하인들은 박장대소한다. 이 탈춤은 부산의 동래와 수영, 마산(지금의 창원), 통영 , 고성 등지로 전파됐고 이후 김해, 가산 등지로 확산됐다.
그러나 밤마리오광대에 뿌리를 둔 각 지역의 탈춤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보전 전승되고 있으나 발상지인 밤마리오광대는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잦은 홍수로 문헌이나 탈 , 대본 등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그나마 있던 자료도 한국전쟁 당시 모두 불에 타거나 분실됐기 때문이다.
■활발한 복원운동
조선 시대 후기까지 이어졌던 밤마리오광대는 주민의 단합과 결속을 우려한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중단됐다. 지난 1970년대까지 몇 차례 복원이 시도됐지만 빈약한 자료에다 '상놈들의 놀이'라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성과가 미미했다.
그러던 중 1980년 오광대 복원이 본격화됐다. 당시 초계종합고교 교장이었던 이영기 씨가 숱한 문헌조사와 현지실사 등을 거쳐 초계 대광대(竹廣大)를 되살려냈다. 나중에 합천교육장까지 지낸 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재현행사와 함께 지역 문화제인 합천대야문화제에 가장행렬로 참여하는 등 재조명의 불씨를 지폈다. 이후 그는 10여 년간 발굴작업과 함께 보존회를 만들어 전승의 기초를 다졌다.
1990년 덕곡면장으로 부임한 최호준 씨도 오광대 복원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오광대의 발상지인 덕곡면 율지리에 장승공원 조성과 대형 오광대 모형설치 등을 통해 문화마을로 육성했다. 마을 골목길 담벽락에는 오광대를 그림으로 그리고 해마다 정월 대보름과 한가위에는 주민과 함께 밤마리오광대 시연행사를 열었다. 초계 대광대와 밤마리오광대는 복원 경쟁을 벌인 끝에 '합천 초계밤마리오광대'로 통합, 지금의 '합천 밤마리오광대'로 자리 잡았다.
합천군은 지난 2005년 율지리에 3억 원을 들여 전수회관을 건립한 데 이어 탈 제작 체험장도 만들었다. 지난해부터는 57억9500만 원을 5년동안 연차사업으로 투입해 야외공연장과 체험객 숙소, 캠핑장, 쉼터 등을 조성하는 등 마을 전체를 오광대와 연계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보존대책 마련돼야
밤마리오광대의 발원지인 덕곡면 율지리 주민은 모두 45명이다. 50대까지 그나마 젊은 층이 14명, 60대 이상이 34명이다. 여기에다 주민의 절반인 20명은 여성이다. 공연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근 마을 주민까지 참여를 독려하고 1인 3역, 5역을 맡아야 겨우 공연을 할 수 있다. 주인공인 말뚝이와 양반 할미 등을 맡는 어르신이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양반역을 맡은 이성걸(76) 씨는 최근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당분간 공연은 하지 못한다. 대본이라야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부분이 많아 기억력이나 청력이 좋지 않으면 공연이 매끄럽지 못할 수밖에 없다. 공연을 이끄는 태평소는 인력을 구하기도 힘들고 비용도 비싸 아예 6명의 주민이 직접 배우고 있다.
밤마리오광대보존회 총무를 맡은 임미경 씨는 "보존회원들은 밤마리오광대의 활성화가 지역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각오로 전승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문화융성을 위해 기능보유자를 양성하고 관련 전문가의 강연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무형문화재 지정 때까지 연습 또 연습 할겁니다"
■ 성영기 밤마리오광대 보존회장
'합천 밤마리오광대' 보존회 성영기 회장이 밤마리오광대의 유래와 탈의 용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완용 기자 |
밤마리오광대 보존회장을 맡은 성영기(62) 씨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원형 복원을 강조했다. 주민 5명과 함께 매주 한 차례 태평소를 배우고 있는 그는 "오광대를 공연하기 위해서는 태평소가 있어야 분위기를 끌어갈 수 있는데 연주자를 구하기도 힘든 데다 구하더라도 공연비가 비싸 아예 태평소를 배우고 있다"며 "무엇보다 직접 태평소를 불 수 있으면 공연시간도 마음대로 잡을 수 있고 연습도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성 씨의 말마따나 시골에서 오광대를 보존·전승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춤사위에 대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싶어도 비싼 출장강습료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30여 명의 주민이 같은 날에 일손을 놓고 연습을 하기란 더욱 쉽지 않다. 한 사람이라도 집안에 큰일이 생기거나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는 날에는 다른 29명 모두 연습을 못 한다. 보존 회원에 대한 보상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농촌 일손이 부족한 마당에 1만~15000원 수당을 받고 공연이나 연습에 나서기란 말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다.
성 회장은 "지금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밤마리오광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며 "어려운 여건이지만 공연 때마다 빠짐없이 참가해 주시는 회원들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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