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폐사지를 찾아서] '감은사지'

금산금산 2015. 3. 5. 09:15

[이재호의 폐사지를 찾아서] '감은사지'

 

 

 

 

육중한 석탑, '통일신라 위엄' 전하는 말 없는 울림

 

 

 

 

 

 

 

 

 

 

 

▲ 경주 감은사 폐사지에는 다른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적막감이나 쓸쓸함이 없다.

사진은 운명적인 감은사지 동·서탑의 쌍탑.


 

 

 

 

우리 시대, 감은사지만큼 폐사지로 각광 받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접근성이 따라주지 않으면 많이 찾지 않는다.

감은사지는 탑 그 자체가 던져주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문화유적이 산재한 경주라는 특수성에

문무왕릉과 이견대가 푸른 동해바닷가로 연결되고 인근에 주상절리의 기묘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더욱 많이 찾게 된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던 80년대 초에 처음 찾았을 때 육중한 탑이 주는 묘한 느낌이 나를 압도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왔지만, 답사객들을 안내하거나 혼자서 찾을 때면 될수록 늦은 오후를 택한다.

감은사지는 어둠이 내릴 때에만 육중한 탑이 가슴으로 밀려오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의 흔적·잔영만 남은 폐사지

쓸쓸한 아름다움에 때론 가슴 먹먹

진국사 짓다가 숨진 문무왕 기리려
동해에 거대한 탑 세우고 절 지어

석탑 '쌍탑 1금당' 형식의 출발점
불국사 석가탑서 완벽한 조형미 표출

 

 


 

세상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지는가보다.

30여 년 전인 80년대 중반 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으면서

가장 큰 울림과 말 못할 아름다움을 안겨준 것이 폐사지의 흔적이었다.

풀 섶에 탑만 홀로 처연히 서 있고 돌덩어리 기왓조각들만 흩어져있던 그 아련한 침묵의 울림은

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번져 내 가슴에 안겨버렸다.

이제 그때 그 마음으로 다시 찾아 흩어져 있는 구슬을 꿰듯이 영롱하게 엮어낼 생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무디어져 버린 내 감성을 어떻게 추슬러 감동의 글을 쓸지 막막하면서도 나를 믿는 수밖에 없다.

 

 



■ 쓸쓸하지 않는 감은사지

감은사지는 집에서 30~40분이면 닿는 곳이라 느긋하게 오후에 집을 나섰다.

보문호수도 고요히 잠들어 있었고, 봄 신록과 가을 단풍이 지극히 아름다운 굽이굽이 도는 추령 길도

 겨울의 사연을 살며시 보듬고 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추령터널을 빠져나오자 옛길 새길 어지럽게 널려 길의 야외 전시관 같다.

전국 어디를 가나 확장하고 뚫고 다리 세운다고 난리다.

가히 토건족의 나라 '길 공화국'이다.

인구는 줄어드는데 길은 넓힌다.

얼마나 더 빨리빨리 가야 욕망이 멈출지, 감은사지 끝까지 길을 계속 넓히고 만들고 있었다. 



감은사지에 닿았다.

배가 닿았던 곳의 신라 때 쌓았던 석축은 고요한데 갈대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받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사람 하나 없는 감은사지에 육중한 석탑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참 당당하고 위엄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보고 또 보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든 유물이나 사람을 볼 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감은사지 탑같이 큰 탑은 너무 가까이서 보면 미감이 사라진다.

1959년 이 감은사지는 우리나라 절터 발굴의 시작이 된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20여 가구의 초가를 헐고 오늘날 같은 모습으로 해놓았다.

'폐사지'라는 그 단어만으로도 뭔가 울컥거리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향이 피어오르고 풍경소리, 염불 소리 낭낭이 울리다 상처의 흔적과 잔영만 남은 폐사지는

쓸쓸한 아름다움을 마음 깊이 심어준다.

그러나 감은사지는 혼자 있어도 다른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적막감이나 쓸쓸함이 없다.

건물은 없어도 잘 정리되어 있고 깊은 산골도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수시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넓은 도로에 차가 쌩쌩 달리니까 더욱 그럴 것이다.

 

 

 



■ 운명적인 감은사지 쌍 탑

탑은 부처님의 무덤으로 모든 폐사지에서 가장 확실성을 담보하면서 핵심이 된다.

부도탑이나 주춧돌 기단석 같은 것도 폐사지의 중요한 유구이지만, 흙더미나 잡초에 묻혀

시각적으로 확 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탑은 아무리 작아도 하늘로 솟구쳐 한눈에 인식되어 들어오고,

무너져도 탑의 기단석이나 면석이 큰 덩어리라 절의 규모나 크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다 마침내 신라에 의해 평정된다.

통일군주 문무왕은 이제는 바다 건너 왜(倭)가 무거운 걱정거리였다.

치고 빠지는 유격전식의 왜의 침입은 신라를 초기부터 괴롭혔다.

그래서 문무왕(661~681년)은 왜를 진압한다는 '진호국가(鎭護國家)'의 준말 진국사(鎭國寺)를 짓다가 죽는다.

마치 유사시에 승병이 되는 절이나 수군 주둔지에 남쪽을 진압한다는 진남루(鎭南樓)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왕위를 이어받은 신문왕(681~692년)은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는 부왕의 은혜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이곳이냐.

이곳은 동해로 나가고 들어오는 입구인 동해구(東海口)다.

또한 수도 신라에서 동해로 드나드는 최단거리라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국찰(國刹)의 격에 맞는 거대한 탑을 세우고 절을 지었다.

신라는 통일 이전의 황룡사 9층 목탑이나 분황사 탑같이 1탑 1금당인데 사천왕사지에서 쌍 목탑이 출현한다.

석탑으로는 여기 감은사탑같이 좌우에 같은 탑을 세우는 쌍 탑 1금당 형식의 출발점이다.

여기서 출발한 쌍 탑 가람이 전국에 펴져 70여 년 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완벽한 조형미를 표출한다.

금당과 역삼각형의 균형미를 이루는 것은 안정감도 있고 평지가 아닌 산과 언덕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공간이 부족해 쌍 탑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쌍 탑의 출현에 대해 명쾌한 답은 없지만, 1탑 1금당은 앞의 공간이 충분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3층탑은 신라에만 존재한다.

탑은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주어야 하는데 3층으로 어떻게 상승감을 줄까를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 역할이 지대석이다.

상, 하지대석은 층수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상승감도 주는 역할을 한다.

뾰족하고 높은 상륜부는 안정감과 상승감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감은사지 석탑에서는 상륜부는 없어지고 지주 역할을 하는 철 찰주만 하늘을 찌를 듯이 외롭게 서 있다.

이 감은사지 석탑은 반도를 통일한 신라의 문화적 역량과 왕권의 위엄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통일기념사업이었다.

대개의 기념사업이 규모만 거창하고 미적으로는 뒤 떨어지는데

여기 감은사지 탑은 규모에다 미적인 아름다움까지 동반되기에 오늘날까지 각광받고 있다.

 

 



■ 이견대에 올라

서산에 해 넘어가고 산 그림자 드리울 때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하고 모퉁이 돌아 이견대에 올랐다.

탁 트인 동해가 파도소리 따라 물결이 철썩이고 있었다.

80m 높이의 황룡사지 목탑도 군사적인 전망루 역할도 했듯이

여기도 대종천과 동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했을 것이다.

정상은 평평하고 넓었다.

건물지의 흔적은 어느 몰지각한 후손이 장군 묘를 써놓아 망쳐버렸다.

감은사를 완성한 신문왕은 동해에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 내려와 파도 따라왔다 갔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견대에 와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했다.

그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단다.

지금 우리 시대 이런 피리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다름을 틀렸다고 싹을 잘라버리고, 갑은 을에 군림만 하고, 가진 자는 베풀 줄도 상생할 줄도 모르는

오늘날 대한민국에 만파식적의 피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소통의 출발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인데 독선과 아집만 난무하는 암울한 시대에

신문왕 같은 겸손과 베풂, 수용을 떠올려본다.

 

 



■ 통일군주 문무왕과 석양의 감은사지

이견대에서 내려와 이견정으로 갔다.

석굴암 대불에서 바라본 방위는 정확하게 감은사지를 관통하여 이곳 이견정으로 향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대왕암으로 갔다.

탁 트인 시원한 바다는 무속인의 꽹과리 징소리 온갖 뒤섞인 소리가 점령군같이 온 바다를 울리고 있었다.

이제 대왕암은 무속인의 메카가 되었다.

통일군주 문무왕은

"무덤이란 한갓 재물을 허비하고 역사책에 비난을 남길 뿐, 헛되이 사람들만 수고롭게 하고

죽은 사람의 혼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유언에서 나는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여기 파도에 자갈 구르는 소리는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중의 하나이다.

 겨울 해풍에 오징어 말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갈매기는 그 곁을 떠날 줄을 모르고 나의 발길은 다시 감은사지에 갔다.

해는 이미 서산에 넘어가 버렸고 산 그림자가 무거워 지고 있었다.

역시 사람 하나 없어 좋았다.

폐사지에서는 철저히 혼자여야 많이 느끼고 많은 울림을 받는다.

금당 터 오르는 좌우에 어디에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기다란 석물이 놓여있다.

중간에는 태극무늬가 선명하고 좌, 우에는 길게 톱니바퀴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금당 터에 올랐다.

건축적으로 힘들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주춧돌 위에 긴 장대석을 걸쳐놓았다.

동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아버지 문무왕이 쉬어갈 수 있도록 동쪽에 용혈을 만들어 놓았다.

 잎이 떨어진 당산나무(느티나무)사이로 서탑을 보면 어두울수록 극도의 짜릿한 긴장감이 몰려온다.

서산에 해 기울어 숨어주니 천지가 아득하다.

어두울수록 감은사지는 더욱 살아나는데 새해에는 우리들의 삶도 고통 없는 잔잔한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한 해를 보내면 언제나 다사다난했다.

작년에는 거짓을 참이라 속이고 속이며, 다양성을 틀리다고 억압하는 한해였는데

교수들이 고른 사자성어도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지록위마(指鹿爲馬)였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여행작가

  1994년 삶의 터전을 경주로 옮기고 한옥 수오재(守吾齋)를 지어 살고 있다.

  민예총 창립발기인이자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초대 총무로 1987년부터

 유홍준 교수와 함께 전국의 문화유산을 기행해왔다.

  파괴되고 사라져 가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살리고 대안을 만드는 문화 운동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