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폐사지를 찾아서] '무장사지'

금산금산 2015. 3. 18. 14:58

'무장사지'

 

 

 

 

 

투구·병기 묻고 전쟁의 상흔 보듬은 곳… 깊은 울림에 젖다

 

 

 

 

 

▲ 우리나라 3천여 개의 절터 가운데 무장사지는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곳으로 꼽힌다. 사진은 천 년의 슬픔을 안고 서있는 무장사지 3층 석탑. 이재호 작가 재공

 

 

 

 

 

 

인류가 평화롭고 다정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전쟁을 해왔다.

엄밀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고대의 노동력과 땅따먹기에서 시작해 중세, 근·현대의 종교와 제국주의, 이념의 전쟁까지 숱한

고통과 야만의 아픔으로 점철되었다.

 지금도 가장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종교가 세상을 지배했는데도, 오히려 나와 다름을 인정 못 하는

경직된 종교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눈을 돌려 우리나라라고 별천지가 아니었다.

이 절을 지은 신라 시대도 왜의 침입과 고구려, 백제와 각축을 벌이며 피 터지게 싸웠다.

그리고 전쟁의 상징인 투구와 병기를 묻었다는 무장사지(무 藏寺址)는 평화와 화해의 상징이며

깊은 슬픔을 보듬어 녹여주는 곳이다.

 

 

 



깊고 깊은 오묘한 계곡 둔덕에
절묘하게 터 잡아 그윽함 더하니
일연 스님 "신령스러운 곳" 감탄

역삼각형으로 맨 앞에 3층 석탑
중간에 금당,그 뒤에 사적비 위치

임 향한 슬픔 피눈물을 토하듯
남편 소성왕 극락왕생 빌었던
계화왕비의 아미타불 조성비 처연

 

 

 



■ 무장사지 가는 길

깊은 산골짜기 절터를 늦은 오후에 가면 해가 일찍 져 낭패를 당한다.

그래서 좀 이른 오후에 찾아갔다.

보문단지를 지나고 암곡 산길로 접어들어 고개를 넘자 생기 잃은 덕동호수가

긴 슬픔의 서곡 마냥 고요함에 젖어 있었다.

 수몰지 상류에는 아직도 철거 못 한 시멘트 건물이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역할 끝난 옛 왕산초등학교, 버스종점과 가게, 그 위에 새롭게 단장한 넓은 주차장.

길 좌우에 갑자기 생겨버린 비닐하우스 포장마차가 즐비하다.

걸어서 10리길 계곡 깊숙이 숨은 듯이 들어앉아 예전에는 찾는 이 없었지만, 지금은 무장산 정상 능선에

억새밭이 새로운 명소로 부각되면서 주말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길옆의 비닐하우스 간이식당들이다.

제일 위에는 커피집까지 있었지만, 겨울에다 평일이라 모두 다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이 무장산은 신라 이래로 가장 많이 붐비는 사람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래서 국립공원관리소에서 개울에 다리도 놓고 편의시설도 해 놓아 걷기는 편해도

뭔가 아련한 태곳적 신비는 사라졌다.

아무리 좋은 자연과 문화유적이라도 차가 들어가면 끝이다.

그래서 자연 최대의 적은 인간인 것이다.

 

 


깨어진 비신을 다시 세운 무장사지 아미타 조성비.

 

 

우리나라 3천여 개의 절터 중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이 무장사지를 나는 첫 번째로 꼽는다.

내 슬픔과 영혼을 치유하는 곳.

혼자서 때로는 인연이 되는 수많은 답사객과 함께 왔던 아련한 추억이

첫사랑보다 더 찐하게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이 무장사지는 봄이면 또-옥 또-옥 신록의 싹 터지는 소리가,

여름이면 지친 가슴에 서늘한 생기를,

가을은 깊은 사유를,

겨울에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나는 풍성함과 성숙함을 비워버린 늦가을과 초겨울의 쓸쓸함을 제일 좋아했다.

그때는 더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허공의 침묵으로 잔잔한 슬픔이

그리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온 계곡에 어려 있기 때문이다.

 

 



■ 깊은 계곡, 걸을수록 맑아지는 영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사랑한 만큼 제일 먼저 개울물이 반갑다는 기쁨의 합창을 속삭이며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계곡에 접어들자 봄날 같은 따스한 겨울에 그렇게 맑았던 하늘도 먹구름에 찬 기운이 일렁인다.

암곡이란 이름에 걸맞다.

이 계곡은 바위와 흙과 나무가 묘하게 공존하는 별천지였다.

나무가 살고자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와도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까지도 수용해 주었던 바위였다.

이제는 그 나무뿌리가 떨어지는 바위 덩어리를 온몸으로 껴안아 은혜를 갚는 거룩한 장면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갑과 을은 상황에 따라 뒤바뀌는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언제쯤 공존의 조화를 이룰까?

세상에 가장 못난이가 약자에 군림하고 강한 자에 비굴한 것이다.

 

 



무거웠던 영혼의 발자국이 걸어오면서 가벼워졌다.

개울가 큰 바위에 마음이 당겨 찬찬히 살펴보니 무슨 글자나 암각화를 새겼는데 물을 묻혀보아도 알 수가 없다. 다음에 탁본해서 살펴보아야겠다.

몇 번의 징검다리를 건너서 무장사지에 닿았다.

1980~2000년대까지는 팻말 하나 없는 수풀 우거진 절터였는데

이제는 친절한 팻말에 절터까지 말끔히 정리해 놓았다. 

 

 



■ 깊고 그윽한 무장사지에 앉아서

참 절묘한 자리의 절터다.

가늘고 길게 꼬불거리며 이어지다가 뒤에는 턱하고 버틴 산 좌우 계곡에 흘러 합쳐진 둔덕에 절을 세웠다.

역삼각형의 맨 앞에 3층 석탑이, 중간에는 금당이, 그 뒤에는 사적비가 놓여있다.

원래의 길로 가면 탑을 제일 먼저 만나지만, 오른쪽 뒤쪽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길로는

어느 몰지각한 사람이 써놓은 묘를 제일 먼저 만난다.

그 옆으로 가면 너무나 하얀 돌이라 영 이질적인 비신(碑身)을 세워놓았다.

목 잘린 쌍 거북이 처연했는데 2011년에 비신 세울 때 인근에서 찾아 오른쪽 머리도 붙여놓았다.

이 아미타불 조성비는 신라 39대 소성왕이 겨우 왕 노릇 1년 5개월(799년1월~800년 6월)하고 죽자

 계화왕비가 "매우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하였다"고 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여기에 남편(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아미타불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그 불상은 사라지고 비신도 깨어져 파편만 박물관에 보관했다가

이번에 파편에 남겨진 글씨만 다시 새겨 넣은 것이다.

원래 것은 김육진이 왕희지 글씨를 모아 집자 하여 지은 것이다.

더구나 귀부의 이 쌍 거북은 소성왕과 계화 왕비 같아 애처롭다.

이 무장사지는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숙부 파진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1760년(영조 36년) 경주 부윤이었던 이계 홍양호가 직접 오지는 않고 아전을 시켜 가져온 탁본을 보고

이 무장사비편을 최초로 밝혔다.

그 뒤 금석학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32살이던 1817년(순조 17년) 재차 밝혔다.

이처럼 역사의 파편 하나에 깃든 관심과 애정으로 문화를 복원해낸다.


폐사지에서는 탑이 압권이고 스타이다.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당차거나 우수한 석탑은 아니지만 슬픔을 보듬고 침묵을 간직한 탑 같다.

예민한 촉각으로 불과 몇 미터 아래에 홀로 경계하는 수꿩을 보았다.

숨죽이고 숨죽여 한참 동안 짜릿한 긴장을 맛보았다.

사람 하나 없는 깊은 산골에서는 거의 동물적인 감각이 생기는가 보다.

탑 모퉁이에 앉았다.

일순 먼-먼 태고의 정적이 감돈다.

물소리 바람 소리 소리 내어 통곡하지 않아도 더욱 울림이 깊다.

속세의 찌꺼기를 버린 알몸이 되자 겨울 산은 비로소 더 깊이 품어준다.

가식을 묻어버린 3층 석탑도 수더분하여 자연과 벗할만하다.

비와 석탑을 분석할 때는 들리지 않았는데 글을 쓰다 그냥 하염없이 앉아만 있어도 비로소 자연이 품속에

들어오고 내가 자연 속에 묻혀버린다.

이 계곡을 일연스님은 "그윽한 골짜기는 마치 산을 깎아 놓은 듯 몹시 가파르고 어둡고 깊어 저절로 텅 비고 순박한 마음이 생겨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만한 신령스러운 곳이다"고 기막히게 압축해 놓았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