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
50만 唐 대군과 맞선 통일신라 '불력'의 흔적만
▲ 신라는 당나라의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줄 수 없자 짝퉁 사천왕사인 망덕사를 급히 만들었다. 사진은 눈 덮인 망덕사지 금당터와 동·서 목탑지. 이재호 작가 재공 |
신라를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본심을 드러내 신라마저 삼키려고 50만 병력으로 몰려온다. 8년간의 통일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신라는 어찌했을까? 불력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점령한 몽고가 말발굽을 고려로 돌렸을 때, 고려는 결사항전을 하면서 부처의 힘으로 몽고를 물리쳐달라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신라 또한 사천왕사를 만들어 명랑 스님을 필두로 밀교의 문두루 비법으로 당나라를 물리쳐달라고 빌었다. 신라의 정성에 감응했는지 두 번의 당나라 침입은 풍랑을 만나 실패한다. 당에서는 연유를 알아보기 위해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낸다. 신라는 사천왕사를 보여줄 수 없어 급히 짝퉁 사천왕사(망덕사)를 만들어 안내한다.
사천왕사 짓고 비법으로 항전 빌어
唐 사신에겐 짝퉁 '망덕사' 보여 줘
맨 앞엔 목 잘린 거북석상 처량하고
옆엔 석공의 혼 담긴 아름다운 석교
모진 수난 일제강점기에 극에 달해
철길이 신문왕릉·사천왕사지 갈라놔
망덕사지도 섬처럼 국도·둑길에 갇혀
■ 우울한 사천왕사지
위급한 신라를 구한 사천왕사지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망덕사지는 10분이면 닿는 행복한 거리이다.
그러나 국도 7호선이 두 절을 가로질러 소음이 아주 심해 행복이 달아나 버린다.
사천왕사지 맨 앞에 처참하게 목 잘린 거북이 두 마리가 추위에 떨고 있는듯해 애처로웠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발굴해 이제는 더 이상 발굴할 것은 없다.
동쪽 거북이 옆에는 작고 아름다운 석교가 나와 정교하고 야무진 신라 석공의 혼이 느껴졌다.
언덕을 오르자 좌우에는 목탑의 흔적, 그 뒤에는 금당 터가 버티고 있었다.
여기 목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1금당 쌍 목탑의 시발점이 된다.
그 뒤에 경루 터는 온전한 데 강당 터는 철길이 싹둑 잘렸다.
절 이름은 맑고 깨끗한 수미산 중턱을 지키는 거룩함인데, 현실은 동강 나고 상처 입고 실체가 사라져버린 사바세계 같다.
신라를 구한 호국사찰 사천왕사의 모진 수난은 일제강점기에 극에 달한다.
동해남부선 철로를 놓으면서 왕릉의 기를 잘라버린다고 왕릉을 갈라치기 해 놓았다.
그래서 신문왕릉과 이 사천왕사지는 철로와 도로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저 건너 망덕사지도 국도 7호선에서 남산 가는 도로 아래로 남천이 흘러 삼각형의 고립된 섬 같이 있다.
그래도 사방이 탁 트이고 동 남산이 둘러있어 눈 맛은 좋다.
여기서 출토된 양지 스님의 녹유사천왕상(국립경주박물관 신관)은 신라 예술의 걸작으로 월명 스님이 피리를 불면
달도 멈추었단다.
지금의 미친 듯한 차 소음에 달도 피리도 눈물마저 감추어 버렸다.
여기도 마을이었으나 모두 철거하고 발굴하여 이렇게 흔적만 남겨놓았다.
혼자 있어도 속세 중의 속세 같아 얼른 발길을 망덕사지로 향했다.
■ 뇌물은 짝퉁도 통한다
도로와 둑길에 갇혀있는 망덕사지는 어느 방향으로 가도 된다.
나는 좀 더 운치 있는 남천둑길을 택하여 정문으로 갔다.
논가에 석재 유물이 가지런하게 박혀 있다.
경사진 언덕에 올라서니 망덕사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좌우 목탑지와 금당 터 그리고 강당이 제 모습을 잃고 어지러이 석물만 나뒹군다.
어떤 석물은 정교하게, 어떤 석물은 몸을 처박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사방에 놓여있다.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를 끝으로 삼국을 평정했는데 백제·고구려 유민과 국지전에 이어 당나라마저 몰아내어야 하는
어려움에 휩싸인다.
675년(문무왕 15년), 50만 대군을 몰고 쳐들어오는 당나라를 어떤 방법으로 막아야 되는지 난감했을 것이다.
물리적 힘이 약할 때는 정신적으로 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천왕사를 급히 지어 명랑 스님의 주관하에 문두루 비법으로 빌었다.
건물은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벽체는 오방색 비단으로 임시로 만들고, 그 뒤 5년에 걸쳐 문무왕 19년(679년)에
완성했다.
이때 사신으로 왔던 당의 예부시랑 악붕귀에게 당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지은 사천왕사를 보여줄 수가 없어
짝퉁 절을 지어 안내했다.
그러나 악붕귀는 망덕요산(望德遙山)이라며 들어가지 않았다.
황금 1천 냥을 주니 흡족해하고 당에 돌아가서는 "신라에서는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다"는 거짓 보고를 한다.
졸지에 짝퉁 사천왕사지가 망덕사(望德寺)가 된다.
이 절도 사천왕사같이 처음에는 임시로 지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문무왕 19년(679년), 삼국사기에 신문왕 4년(684년)에 지었다고 기록해놓았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뒤로 사천왕사지가 보인다. |
■ 호국의 목탑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치 않을 것 같은 사랑, 굳센 맹세, 단단한 돌도 언젠가는 깨어지고 사라진다.
내구성이 약한 목재는 불에 치명적이다.
두 절이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망덕사지는 고려 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절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석탑이야 무너지고 불에 타도 어느 정도의 윤곽은 알 수 있지만 목탑은 흔적도 없다.
1593년 임진란 다음 해에 완전히 불타버린 불국사도 석가탑 다보탑이 존재하지만,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 황룡사의 9층 목탑은 흔적도 없다.
망덕사지와 사천왕사지 목탑도 이처럼 사라져 버렸다.
목탑지에 올랐다.
사천왕사지의 목탑은 몇 층인지 알 수 없지만, 망덕사지 목탑은 삼국사기에 13층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짧은 정면 3칸 측면 3칸 정사각형 기초석의 이 좁은 공간에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본다.
성덕왕 원년(737년)에 당의 백우경이 세웠다는 아담 사이즈 정혜사지 13층 석탑에서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목탑일까?
이상하리만치 황룡사, 사천왕사, 망덕사, 황복사, 보문사 등 이 주위의 절은 호국사찰에다 폐사지이고 전부 목탑이다.
아마도 주변 아홉 나라의 시달림을 벗어나고자 세운 염원인 황룡사 9층 목탑을 생각했을 것이다.
황룡사는 자장 스님의 건의로 세웠다.
사천왕사·망덕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신라 밀교의 시조인 명랑 스님의 외삼촌이 자장 스님이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한번 사라진 목탑은 형체도 없지만 여기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 남산 탑곡마애불에 새겨진 9층 목탑 흔적에서
황룡사 9층탑, 7층탑에서 사천왕사지 목탑, 그리고 정혜사지 13층 석탑에서 망덕사지의 목탑을 떠올려본다.
어제는 진종일 흐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새하얀 3월의 눈이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하여 급히 망덕사지와 사천왕사지를 찾았다.
엷은 비가 하얀 눈을 가슴으로 녹이고 있었지만, 눈 속에 파릇한 보리는 솟아올랐고, 버들강아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재호
기행작가
'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폐사지를 찾아서] '숭복사지' (0) | 2015.04.15 |
---|---|
[폐사지를 찾아서] '장항리사지' (0) | 2015.04.08 |
[폐사지를 찾아서] '원원사지' (0) | 2015.03.26 |
[폐사지를 찾아서] '무장사지' (0) | 2015.03.18 |
[폐사지를 찾아서] '황룡사지' (0) | 2015.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