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리사지'
신라 수도 최전방 지키던 호국사찰… 탑신만 '덩그렁'
▲ 장항리 절터는 봄이 무르익어 벚꽃이 하얀 웃음을 날릴 때 오면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사진은 장항리 절터의 동·서탑과 석물들. 이재호 작가 제공 |
질투는 속 좁은 인간들만 하는 줄 알았지만 신들도 하는 것 같다. 유난히도 포근했던 겨울에 봄마저 일찍 와버리니 얼마나 속상했으면 3월에 호된 추위를 몰고 왔을까. 그러나 광풍이 이틀 밤낮으로는 치지 않듯이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도 며칠이면 물러간다. 다시 훈훈한 봄의 평온을 찾았지만, 호된 추위를 견딘 매화가 안쓰럽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듯, 매화라고 다 고매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우리 집 수오재에도 여러 그루의 매화가 있다.
대문도 없는 입구 세 그루의 매화 중에 유독 지난달 2월에 핀 홍매화가 있다.
대개의 매화는 겨울에도 몽우리가 맺혀 금방이라도 나올 듯해도
꽃망울은 함부로 터트리지 않는 묘한 구석이 있다.
그 홍매화 꽃망울은 유독 도톰하게 물이 올라 밤낮으로 마음을 주었다.
나의 애타는 기다림에 피어버린 매화는 눈을 덮어쓴 설중매가 되어 모진 추위와 바람에 시달려야했다.
옆에 있는 홍매 청매는 3월 중순인 아직도 완전한 봄을 기다리는 듯하다.
대기만성도 있다지만 고매한 매화의 특징은 사라졌다.
비록 얼어 죽을지언정 눈 속에 피어야 향기 팔아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하고, 향기로 말해주어야 참 매화다.
매화 몽우리 도톰할 때는 흡사 마음 시린 여인의 속정 같고, 꽃망울 터트릴 때는 향기 머금은
미인의 엷은 웃음 같아 나는 매화를 가슴으로 사랑한다.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장항리 절터를 찾아 나섰다.
언제 폐사 됐는지 모른다는 절터
보물 도굴꾼들이 폭발물 설치해
남은 탑조차 일제강점기 때 붕괴
3층 위주 신라 석탑 중 드문 5층탑
탑신 인왕상들 표정 정겹고 다양
동·서탑, 금당 터와 나란히 위치
산기슭 짧은 공간 활용 융통성 보여
■ 기묘하게 변한 장항리 절터 가는 길
장항리 절터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80~90년대 초까지는 추령고개 넘어 장항리 입구(지금의 한수원 본사)에서 비포장 길 10리를 걸어,
징검다리 7개 건너, 홀연히 나타나는 감동의 절이었다.
그 깊은 산골짜기의 장항리 절터는 토함산 자연 휴양림을 지으면서 도로가 나서
지금은 긴 터널로 산이 뻥 뚫려 버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내가 본 세 번의 강산이 변하는 시간에 절 아래 계곡은 할퀴어졌고,
앞산은 산사태로 밀려왔고, 도로와 터널로 변해버렸다.
강산이 어쩌면 이리 변했을까.
옛길을 생각하면서 장항리 입구에서 천천히 올랐다.
마을과 허브농장을 지나고 중간쯤 마을에서 돌담에 낡은 빈집을 보니 정겨움이 울컥하였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계곡 길 따라 최상류마을을 그림 같은 아련함으로 걷던 길은 사라졌다.
다리 3개에다 산 중턱을 잘라 길을 만들어 마을이 산 아래에 포위되어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
그 아름다웠던 산골 마을은 윤기 잃은 쓸쓸함만 흘렀다.
맑은 개울물 위로 구름다리를 건너자 물소리 새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마지막 계단에 오를 때쯤 아래 개울가에서 인기척이 들려 살펴보니
아무렇게나 옷 걸친 구부정한 산신령 같은 할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 91세 고운 할머니의 모진 삶과 탑의 수난
지팡이에 보자기로 빈틈없이 둘러맨 머리, 한 손에 보따리를 들고 오다
나를 보자 몇 발자국 걷더니 풀썩 주저앉는다.
"할머니 어디서 오십니까."
"저 골짜기에서."
할머니가 든 까만 비닐봉지에는 부지깽이 나물, 하얀 봉지에는 어린 쑥이 들었다.
주말에 장항리 절터에 오는 분들에게 팔 거란다.
"할머니 오늘 것은 저가 다 살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할머니는 소설보다 더한 일대기를 보따리보다 더 많이 풀어놓는다.
스무살 대학생이던 작은아들이 이 계곡에서 전기로 물고기를 잡다 감전사했고,
큰아들은 동생의 시체를 묻어주고는 정신이 나가 집을 나가고,
그 누나는 동생 찾아 전국으로 헤매다 어느 절에서 몇 년 전에 찾았단다.
할머니는 평생 불국사 앞에서 산나물을 뜯어 팔다 지금은 장항계곡에서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 없는 장항계곡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 같은 논픽션을 주고받았다.
할머니와 작별하고 100개가 넘는 직선 계단을 올라 절터에 닿았다.
장항리 절터는 언제와도 좋다.
아직은 산천초목이 봄 준비에 자신의 고운 자태를 감추지만, 봄이 무르익어 산 벚꽃 수줍어
하얀 웃음을 날릴 때와 가을 억새 사각이며 쓸쓸한 여운을 우수수 남길 때는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절터는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일제강점기에 탑 안에 보물이 탐나 한밤중에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탑을 무너트렸다.
온 산천에 찢어지는 굉음이 울릴 때 아랫마을 사람들은 무서워서 밤새 벌벌 떨다가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가보니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서탑을 다시 세울 때 계곡 아래에 떨어져 있던 동탑의 부재들은 다 찾지 못해
1층 몸돌(탑신)만 애처롭게 서 있다.
동탑이 서탑과 금당 터 사이에 놓여있는 것은 동탑 자리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 호국사찰의 벨트
이 깊숙한 산골짜기에 무슨 연유로 이렇게 큰 탑과 불상을 가진 절을 세웠을까?
신라 석탑은 3층이 위주인데 왜 힘들게 5층 탑을 세웠을까?
같은 토함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석굴암과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다.
즉 동해로 들어오는 길목에 감은사에서 삼각으로 좌우에 기림사 골굴암,
여기 장항리 절과 뒤에서 굽어보고 있는 석굴암이 있다.
다 신라를 지키는 호국 사찰이다.
군사적으로는 신라 수도의 최전방이다.
금당 터 중앙에 불상이 서 있던 대좌(경주박물관 북쪽 뜰에 있음)에
제일 온전한 사자는 두 발을 웅크리고 왼팔은 힘차게 뻗었다.
힘은 있어도 익살스러워 부드러운 정감이 흐른다.
탑신에 새겨진 인왕상들은 하나하나 어찌나 표정이 다양하고 정겨운지 미소 짓게 한다.
동탑 뒤에 놓여있는 부재를 보면 절의 규모가 보통이 아니었을 것 같다.
다만 금당 터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조그마한데 아주 멋을 부려 돌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동·서탑은 보통의 역삼각형이 아니라 금당 터와 옆으로 일직선으로 나란하다.
그 이유는 산기슭이라 짧은 앞 공간을 활용한 융통성이다.
날이 어두워지니 글 쓰는 손이 시리다.
산새 소리 물 소리 적막에 묻혔는데 돋아나는 쑥의 생기가 느껴졌다.
내려오다보니 할머니는 밭에서 알찬 농사를 위한 생명의 불을 태우고 있었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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