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폐사지를 찾아서] 경주' 천관사지'

금산금산 2015. 4. 22. 21:38

경주' 천관사지'

 

 

 

 

서산 붉은 노을, 김유신·천관녀의 '슬픈 사랑' 수놓은 듯…

 

 

 

▲ 쓸쓸한 천관사지에 두 탑의 흔적만이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을 머금고 있는듯하다. 이재호 작가 제공

 

 

 

세상을 호령하고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도, 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선비도 사랑이 없었다면

후세 사람들이 기릴 매력이 있었을까.

천하의 혁명아 허균도 조선 3대 기생인 부안의'매창'과 성과 속을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에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퇴계도 단양 군수할 때 기생'두향'과 매화 같은 사랑이 있었기에 임종할 때 "저 매화 화분에 물 주어라"

할 수 있었고, 근엄한 학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선비로 빛난 것이다.

사랑 한 번 해보지 않고 문학과 예술을 하면 무미건조하다.

남에게 감동은커녕 작은 느낌도 주기 힘들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도 신분 낮은 천관녀와 가슴 아픈 사랑이 없었다면 전쟁 잘하는 '신라 명장'

혹은 성공한 '전쟁 CEO'로 남을 뻔하였다. 


 
■ 있는 듯 없는 듯

꽃피고 새우는 이런 봄날은 움츠렸던 가슴에도 새로운 생기가 꿈틀거린다.

지금 경주는 꽃이 만발한 '울긋불긋 꽃 대궐'의 동요 가사가 적절할 것 같다.

구경에는 꽃구경만큼 좋은 것이 없어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에 도로에는 차가 기어간다.

막히지 않는 남천 둑길로 하여 반월성을 끼고 천원마을에 들어섰다.

논에서 못자리 준비하는 농부, 낡은 집 담벼락에 화사한 꽃들, 느릿느릿 어스름 저녁,

진리와 극락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뛰어넘을 수 없었던 '신분의 벽'
비슷한 사연 간직한 김유신 모친
아들과 천관녀 사랑 못 받아들여

방황하던 유신 단칼로 사랑 끊은 후
전장으로 떠나 통일의 명장이 되고

여인은 가슴에 유신 품은 채 죽어가
늙은 유신 뒤늦게 천관사 짓고 눈물

 


문 닫힌 '천원' 가게, 사람 없는 경로당, 그 앞에는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흙 돌담벼락,

 집은 찌그러져 사람 떠난 흔적은 완연한데 화사한 봄꽃에 왠지 쓸쓸함이 묻어났다.

그 마지막 집을 지나자 잡초 우거진 천관사지가 생기 잃은 채 나를 맞아주었다.

예전에는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정갈하게 곡식을 가꾸어 생기가 흘렀는데, 지금은 어수선하다.

천관사지 주위의 논밭을 발굴 후에 보고서만 쓰고는 그대로 방치해서다.

천천히 걸으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남쪽은 지척에 남산이 누워있고, 북쪽은 경주 시내가 신라의 흔적을 드러낸다.

서쪽에는 선도산 너머 서방정토에 붉은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산에 지는 해는 시간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고 직감과 느낌, 감각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김유신과 천관녀도 지금처럼 절묘하게 잘 익은 홍시 같은 붉은 해를 바라보며 순정을 불태웠을까?

 

 



■ 사랑과 출세

사랑과 출세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사랑하면 출셋길에 지장이 있을까.

지극히 주관적이고 정답 없는 것이 사랑이다.

김유신과 천관녀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중매가 조건 대 조건의 관계라면 연애는 서로가 느낌이 와야 된다.

사랑이 없어도 조건 보고 결혼할 수도 있는 것이 중매라면, 연애는 조건을 뛰어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귀족 김유신과 천관녀와의 사랑에는 신분의 조건을 뛰어넘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항상 현실이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도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아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부모 다 왕족이었던 어머니는 신라 최고의 뼈대 있는 성골이었지만, 아버지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구형왕의 손자로 신라에서는 일개 귀족에 불과했다.

김서현과 불붙은 만명 부인의 사랑은 아버지의 노여움에 창고에 갇히고 나서도 뛰쳐나와

만노군(오늘의 진천)으로 달려간다.

만노군 태수였던 김서현과 부모 허락 없는 동거 생활로 김유신이 잉태된 것이다.

이런 사연이 있는 어머니로서는 아들과 천관녀의 사랑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신은 어머니의 단단한 훈계에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유신은 어머니의 아픔을 알아서일까.

아니면 마마보이였을까.

단순한 출세를 위한 매정함일까.

 

 



■ 명마는 목이 달아나고

지금처럼 온천지 사방의 꽃이 순정을 잡아당길 때 사나이라면 선술집에서 어찌 술 한잔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애마에 올라탔지만 술향기 꽃향기에 온몸이 뜨거워진다.

무엇보다도 천관녀의 웃음꽃을 가슴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약속이 '이성'이라면 천관녀와의 사랑은 '감성'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유신은 말이 안내하는 대로 갔다.

천관녀와 봄꽃 같은 뜨거운 사랑은 했지만, 어머니와의 약속은 머리를 쥐어짜게 하는 현실이었다.

주인의 머리보다 가슴을 알아버린 명마는 김유신의 단칼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이런 유신이었으니 위기의 신라를 구하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는 명장이 되었다.

여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자는 별 볼 일 없고, 치마폭을 자신의 의지대로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은

 매력적이고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

사랑도 못 하는 사람이 말해서 무엇하랴.


매정하게 떠나버린 유신을 원망도 했지만 큰 뜻 품은 님이라 가슴으로 삭이며 서서히 죽어간 여인이 천관녀였다. 남자는 출세하면 옛 애인이 생각나게 되어 있다.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늙은 유신은 옛 애인 천관녀의 집에다가 천관사를 짓고 무릎 꿇고 향 피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여기 천관사지에서 그때도 이처럼 서산에 붉은 해가 슬픔을 삭이면서 넘어갔을 것이다.


이 사연이 영화나 연극, 소설의 스토리텔링으로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꽃 피고 새 울고 꽃 바람 흐르는 지금은 향기 품은 사랑을 하고 싶다.

해는 졌는데 어디선가 천관녀가 엷은 미소를 흘린다.

귀공자 유신이 늠름하게 말을 타고 걸어오고 사랑이 꽃바람에 실려 온다.

어두울수록 사랑은 익어 가는데 명마는 고개를 땅에 떨구었다.

건물터만 5곳, 우물 3곳은 풀숲에 보이지도 않고, 서로 다른 두 탑의 잔재만 놓여있다.

여기서 나온 가루라상은 국립경주박물관 신관 입구에 놓여있고, 석재는 경주고등학교 교정에 갖다놓았다.

유물이 흩어져 있듯이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도 사방에 맴돌고 있다.

발굴은 했지만 여전히 석탑 무너진 흔적은 그대로이고 석조 유물은 풀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