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흥망 간직한 '왕릉길' 쓸쓸한 여운...
1코스.
매혹적인 선덕여왕릉과 위대한 진평왕릉
▲ 소나무가 호위하고 있는 선덕여왕릉. |
깊어가는 계절 속에서 신라의 옛 향기를 진하게 음미하며 경주의 곳곳을 걸을 수 있는 코스를 소개한다.
그야말로 천년 고도 경주의 숨겨진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걷기 코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코스 안내는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을 출간한 이재호 기행작가가 맡았다.
1코스 매혹적인 선덕여왕릉과 위대한 진평왕릉
사방은 온통 가을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오늘 걷는 이 길은 경주에서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길이다. 그래서 불안감이 든다. 전국적으로 길이 유행이라 지자체 여기저기서 난리다. 길에서 인류의 문화와 역사가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지금의 길은 유행에 편승하여 알려진 길을 나도 한번 걸어보았다는 위안은 줄 수 있지만 진정한 자아를 찾는 데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제주 올레 길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호젓한 산속의 숲길도 사람에 시달리는 관광길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길을 나섰다.
천년고도 경주는 수많은 문화유적으로 이어져 있어 굳이 길을 만들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이 길은 94년부터 경주에 정착한 내가 우리 집에서 크게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길이다.
그러면서 나와 인연되는 수많은 사람들과 감동을 함께해서 이대로 남겨두고픈 마음이 간절한 길이다.
그래서 진정 자아를 찾고픈 마음 맑은 향기로운 분만 찾는 사유의 길이길 바란다.
·왕릉과 왕릉으로
하늘거리는 우리 집 코스모스가 나를 배웅하는 듯해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지척에 있는 효공왕릉이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면서 살며시 누워 있다.
52대가 말해주듯 효공왕은 운명이 다한 신라 말의 혼란기에 왕으로서의 존재감에 얼마나 참담했을까?
왕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그리고 궁예에게 이리저리 땅을 빼앗기고 오늘날 경상도 일대의 땅만 겨우 지탱하는
초라한 왕이었다.
화려한 아버지 헌강왕과 풍운의 여걸 진성여왕을 고모로 둔 나약한 효공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운명의 굴레를 짊어지고 늦가을의 쓸쓸한 여운을 안고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년의 세월을 넘어 당신의 쓸쓸한 여운이 주는 잔잔한 울림의 아름다움에 유혹당한 어느 나그네가
지척에 '어리석은 나를 지킨다'는 수오재(守吾齋) 둥지를 만들어 살면서 이렇게 지나고 있다.
그때는 능 앞에 아름드리 휘어진 소나무가 당신을 더욱 품격 있게 해주었는데
태풍과 인간의 욕심이 나무 하나 없는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효공왕릉을 빠져나오자 황금벌판이 펼쳐지고 점잖은 동네아저씨들은 벼를 손기계로 베다말고
물 한 모금 마시며 하얀 웃음을 짓는다.
저만큼 보이는 동남산은 꿈틀거리며 누워 있고 선덕여왕이 누워있는 낭산(狼山)은 이리 모양 같다고
붙인 이름에 걸맞다.
산길을 오르자 봉고차 2대가 나이 드신 분들을 내려준다.
"아이쿠 허리야 어데 자꾸 가노?"
뒤 처진 어느 아주머니의 일갈이다.
굽이치는 소나무의 아름다움은 상관없고 오직 '선덕여왕' 드라마 때문에
선덕여왕릉에 발자국 한 번 찍고 오는 것이 목적이다.
뒤따라오던 아저씨가 손잡고 이끌어 주니 웃음꽃이 만발한다.
그리고는 "밑에서 보면 되지 뭐 할라고 가노?"
그러자 순식간에 오르고 곧바로 내려오는 아주머니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유물이 얼마나 묻혔겠나."
"국민이니까 인사하는 것이지."
"아이쿠 잘 해놓았고 크다."
"이런 것이 명당이다."
참 많이도 왔다.
내 애인 같이 여기며 사랑하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혼자 와서 얼마나 많은 침묵의 울림을 받았던가.
올 때마다 혼자뿐이었고, 아주 어쩌다 사람을 만났는데 이제는 항상 북적거려 상처받은 애인의 마음 같아
찾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대개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 효과는 6개월 정도 반짝거리고 사라져
사람들이 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참 '선덕여왕' 드라마가 인기 중일 때 주말이면 쉴 사이 없이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 했고 평일에도 많았다.
그러나 대개 왔다가는 기념사진 한 장 찍고는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가버린다.
왜 이럴까.
감성보다 이성적인 사람들이 많은 한국인의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나도 가보았다는 위안의 목적 때문일까?
나를 알아보는 한복 입은 여인이 권하는 차 한 모금하고 다시 걸었다.
'굳이 선덕여왕 당신의 지혜롭고 베포있는 모란꽃 이야기, 영묘사의 개구리와 여근곡, 죽음과 도리천의
지기삼사의 이야기는 떠올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흰 눈이 소복이 쌓였을 때 당신의 봉곳 솟은 봉분은 팽팽한 30대의 하얀 젖가슴이 되어
나를 얼마나 설레게 했는지….
그리고 밤이 주는 침묵의 정적에 달빛 받은 뽀오얀 젖가슴은 마음시린 행복을 안겨주었지요.'
·황복사지와 황금벌판
선덕여왕 소나무 숲을 지나자 저만큼에서 시내가 아스라하게 보인다.
흙길 옆에는 매화나무가 아직 싱싱함을 피우는데 매화 향기는 없어도 가을 잠자리들이 떼 지어 놀고
새들은 자신의 고운 소리를 뽐내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핏빛 고운 팥꽃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오른쪽 모퉁이길을 돌아서자 바람이 가슴에 안기면서 보문벌판의 노오란 황금물결이 그림 같이 일렁인다.
그리고 굽이굽이 휘어지는 길을 보니 왠지 모를 그리움이 꿈틀거린다.
저 모퉁이에 어느 그리운 여인이 나올 것 같은….
논 한가운데 농로가 사정없이 휘어져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저 멀리 보문마을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느 도시 아줌마가 메뚜기잡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 황금벌판의 트랙터 소리는 긴장을 몰고 온다.
사람이 낫으로 벼를 벨 때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기계는 황금벌판을 2~3일이면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황복사지 3층석탑(국보 37호 경주 구황리삼층석탑) 앞에 섰다.
당당하고 옹골찬 힘을 품어내고 있었다.
석탑에서 황금벌판 사이로 꼬물꼬물 이어지는 농로길 그리고 진평왕릉과 마을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히 절정의 아름다움이다.
진평왕릉은 언제나 아름다움이다.
텅 빈 초록의 왕릉 앞에서 차를 마시다 나를 알아보고 일어나 내 책을 감동스럽게 읽었다는
경주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반긴다.
벌판 가운데 한국서 가장 작은 연화문당간지주가 서산에 붉게 넘어가는 해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경운기를 논두렁에 세워 놓고 혼자서 낫으로 벼를 베는 농부의 모습이 거룩한 성자 같아 보인다.
석조를 지나 벌판에 솟아오른 금당터에 올랐다.
여기저기 신라의 흔적이 풀섶에 뒹굴고 서산에 해가 넘어가 사방은 어둠의 적막이 밀려온다.
울음을 토할 것 같은 내 사랑하는 보문벌판에 서성이다 집에 왔다.
1코스(5㎞, 소요시간 2~3시간): 효공왕릉-선덕여왕릉-황복사지-진평왕릉-연화문 당간지주-보문사지 석조·금당터·당간지주-수오재-효공왕릉
목 잘린 거북 두 마리 사천왕사터 호위
2코스.
신들도 노니는 낭산의 둘레길
▲ 사천왕사터 입구에 있 는 목 잘린 거북 비석. |
실성왕 12년(413) 8월 가을에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나 바라보니 흡사 누각과 같았고
강하게 향기 풍겨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아 왕은
"이는 반드시 신선이 내려와서 노니는 것이니, 이곳은 복지(福地)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로 사람들이 나무를 베는 것을 금했다.
이처럼 낭산은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신라 때 매우 중시했다.
사천왕사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걸었다.
거북이 두 마리는 목이 잘린 채로 힘차게 누워 있었다.
아직도 사천왕사지는 발굴을 하고 있다.
선덕여왕 임시주차장은 평일이라 차도 사람도 하나도 없었다.
마을 길에 접어드니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강선마을은 두 칸짜리 옛집과 허물어져가는 빈집에
까만 고양이가 방에 놀고 있다.
중간선. 상강선 마을 집집마다 둘러보았다.
마을 이름은 선녀가 하강하는 마을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가난이 졸졸 흐르는 마을이다.
신라시대 가난한 백결 선생이 아마도 이 강선마을에 살았을 것이다.
고추 말리는 아낙들의 손길이 바쁘다.
해외 유학파 스타스님 의상도 이 황복사지서 고뇌의 풀을 잘랐지.
마을 산길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아 빙 둘러서 독서당에 갔다.
철길과 산업도로로 날샌 것들이 줄기차게 다녀 소음이 극에 달했다.
접근성이 안 좋아 찾아오는 이가 없으니 완벽하게 방치 수준이다.
기와는 새것으로 입혔는데 청마루는 내려앉았고 방 천장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먼지 뽀얀 청마루에 앉지를 못해 돌 위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 조기 유학을 가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어지러운 신라를 구하려 했던
반체제 지식인 최치원은 세상이 허락하지 않아 해인사서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여기 독서당에서 공부했지만 지금같이 단 1초도 쉬지 않고 울려대는 차 소음에
최치원의 혼도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다시 내려와 차 소음을 들으면서 문무왕을 화장했다는 능지탑을 지나 가난한 절 중생사에 갔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는데 시린 불빛도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지장전 마애불에 촛불 하나가 바람에 일렁인다.
그제야 개들이 달려오고 스님이 나온다.
보살도 없고 스님 혼자서 손수 공양 하신단다.
나도 발길이 급한데 한사코 차 한 잔 하고 가라신다.
연잎차 한 잔에 30세에 이 절에 와서 40년 동안의 구구절절 이어온 사연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해탈이 개와 노스님 그리고 적막한 중생사, 언제 와도 눈물이 날 것 같다.
2코스(4㎞, 2시간~2시간 30분): 사천왕사지-하강선마을-중강선마을-상강선마을-황복사지 석탑-독서당-능지탑-중생사-사천왕사지
kjsuo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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