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고도경주 속살걷기] '신문왕릉이 품어내는' 긴장감 일품

금산금산 2015. 5. 13. 20:33

'신문왕릉이 품어내는' 긴장감 일품

 

 

 

 

 

                                                   

 

 

                                                   

 

 

 

 

3코스: 쓸쓸한 가을바람 같은 왕릉들

신문왕릉 입구에 들어서자 가을바람이 우수수 몰려온다.

산수유나무는 계절의 전령사인지 이른 봄 노란 꽃망울로 봄의 서곡을 알리더니 새빨간 열매로

가을의 전령사인양 반긴다.

오는 사람 없다고 동쪽 출입문과 중앙의 신문(神門)은 아예 닫혀 있고, 나오는 문인 서문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신문왕릉은 참 기품있지만 국도 7호선 산업도로의 소음 때문에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그래도 왕릉이 품어내는 긴장감은 일품이다.

찾는 사람이 없어도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단장해놓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불국사에 갔다가

 여기서 점심을 먹고는 "왕릉인데 왜 이리 초라하냐"는 한 마디에 이렇게 주차장에 담장 쳐놓은 것이다.

둘러보고 글 쓰는 순간에 두 쌍의 청춘남녀가 다녀갔다.

둘 다 왕릉을 한 바퀴는 돌고 가는데 한 쌍은 아직도 설레는 사랑인지 꼭 붙어 다녔고, 한 쌍은 덤덤한 사랑인지 떨어져 다녔다.


여기 신문왕과 왕비의 사랑이 생각난다.

문무왕 5년(665)에 태자비를 맞이하지만 정략 결혼이라 사랑이 없었는지 아이도 없었다.

681년 왕이 된 지 한 달여 만에 왕비를 총애하지 않자 장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킨다.

장인은 역적으로 죽이고 왕비는 쫓아낸다.

즉위 9년(689) 귀족들의 기득권을 약화시키고자 서울을 달구벌(대구)로 천도하고자 했지만 이것도 실패한다.

사랑도 쓸쓸했을 것이고 권력도 지금처럼 우수수 불어오는 바람처럼 왔다가 흘러가버렸다.

삼국사기에 '가을 7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 했고

아들 효소왕을 "망덕사(望德寺)의 동쪽에 장사지냈다"하였다.

기록대로라면 여기는 아들 효소왕릉이고, 신문왕 당신은 낭산 동쪽에 붙어있는 황복사지 3층 석탑의 동쪽

논가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갈대는 바람에 일렁이고

남천둑길을 걸었다.

물은 흘러가고 바람은 불었다.

억새도 갈대도 사각거리며 노래하는데 농익은 들국화가 수줍게 속살을 흔들어댄다.

꽃과 풀잎들, 흘러가는 물결, 어느 것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생의 무거운 짐 내려놓고, 가방 메고 카메라 든 나그네는 진정 행복한 걸음이다.

아주아주,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강물은 흘러야 된다.

일부 어리석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자연에 지은 죄 어찌 감당할지….


왕자 구하러 왜로 떠난 박제상을 뒤쫓다 여기서 목 놓아 울었다는 박제상 부인,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해도

다리 뻗고 일어나지 않아 벌지지(伐知知)라 불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해놓았다.


그 벌지지 비석에서 논길을 따라 소나무 숲 언덕을 오르면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멋스럽게 서 있다.

여기도 무슨 명당이라고 목탑지 앞에다 우악스럽게 묘를 만들어 놓았다.

생활의 지혜로서의 생활 풍수는 몰라도 명당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풍수쟁이들의 허구다.

차라리 자신의 일에 매진하다 저승 같다 살아온 망덕사 선율 스님 같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절터 주위 논에 벼는 익을 대로 익어버렸다.

일부 벼 걷이 한 논 여기저기에 신라시대 유물들이 세월의 흔적만큼 아련한 사연을 안고 뒹굴고 있었다.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 6년(697), 망덕사 낙성식 때 초라한 옷차림의 어느 꾸부정한 스님이 법회에 참석을 청하자 효소왕은 "누구에게도 국왕이 친히 불공드리는 자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며 당부하자

스님은 "폐하 또한 누구에게도 석가의 진신을 공양했다고 말하지 말라"며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듯이,

세상은 함부로 지위를 인격과 능력으로 착각하며 잘난 척 하는 것 아니라고, 망덕사 흔적들이 일깨워 준다.


다시 내려와 남천 둑길을 걸었다.

역광을 받은 갈대가 은빛으로 흔들리고 재두루미 한 마리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물속에 서서 떠날 줄을 모른다. 아스팔트 길이지만 통일전으로 가는 우회도로라 차들은 많지 않고 길 좌우는 나무숲으로 이어져

새로운 신선함을 준다.


경북산림환경연구소에 갔다. 오른쪽 야생초 동산에는 수많았던 꽃들도 계절의 무게에 자취를 감추었고, 어쩌다 남아있는 시들은 꽃들도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꽃은 지고 낙엽은 뒹굴고 사람 하나 없으니 깊은 산속은 아니지만 사색에 잠길 만하다.

침엽수와 메타세콰이어가 줄지어 있는 길도 걸을 만했다.

전체면적 12만평에 910종 444천 본의 수목이 제 자신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솔숲에 고요히 누워있는 왕릉과 마을

다시 나와 쭉 가다가 오른쪽 새남산길로 접어들었다.

쭉 늘어선 탱자나무들에는 노란 열매가 토실토실 달려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느티나무와 잘 생긴 소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간혹 옛 모습 그대로인 흙 담장의 정겨운 집을 대하면 눈물 나는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든다.

화랑교육원을 지나 49대 헌강왕릉 입구에 들어서자 태고의 신비에 빠지고 풀벌레들은 귓전을 울린다.

오후 5시쯤인데 솔숲에는 어둠이 와락 밀려와 버린다.

왕릉을 오르는 흙길은 소나무 뿌리로 인해 천년의 침묵이 아름다운 왕릉길이 되어버렸다.

길은 맑고 청신하여 마치 여인의 속살 같은 느낌이다.



내려와 50대 정강왕릉에 올랐다. 직선거리로 300여m나 될까?

형(헌강왕)과 동생(정강왕)은 서로 비슷한 데가 많다.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일으켜 세우려 몸부림쳤으나 명(命)이 도와주지 않아 둘 다 20대 중반에 죽었고,

더구나 정강왕은 1년간만 왕을 하다가 죽었다.

죽은 날짜는 7월 5일로 똑같아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해 놓았다.

왕릉 가는 길도 어쩜 그리 닮았고 매력적인지….

 

다만 헌강왕릉을 오르는 길은 휘어지면서도 자연스러워 편안한 느낌을 주지만, 정강왕릉을 오르는 길은

우직한 느낌에 거친 긴장감을 던져준다.

봉분도 비슷하지만 헌강왕릉은 4단의 둘레돌에 봉긋하고, 정강왕릉은 2단의 둘레돌에 펑퍼짐하다.

그러나 솔숲과 어우러진 두 왕릉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나는 행복한 나그네가 되어 어둠을 안고 내려왔다.

 

3코스(3km, 2~3시간) : 신문왕릉-망덕사지-경북산림환경연구원-마을-화랑교육원-헌강왕릉-정강왕릉

 

 

 

4코스: 동남산 칠불암 가는 길

 

 

어제 이어서 정강왕릉 입구 근처의 통일전 주차장에서 걸었다.

서출지 주위에는 웬 아줌마들이 무엇을 열심히 보따리에 주워 담고 있다.

필사적으로 뛰고 있는 살 오른 메뚜기와 이미 자신을 던져버린 은행알을 줍는다고

야단이었다.

신라 21대 소지왕과 사금갑(射金匣) 사연으로 유명한 서출지(書出池)에는 말라버린 연잎이 깊어가는 가을을 알리고 있었다.

남산 칠불암 가는 길은 단순하면서 오묘하다.

가는 길에 남산마을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릴 수 있고,

신라시대 석탑을 보는 눈복(眼福)도 누릴 수 있다.

다만 크고 우악스럽게 지어놓고 높은 담으로 꽁꽁 둘러놓은 집들을 보면

눈복이 감퇴된다. 옛부터 집은 주인의 인격이라 했다.

염불사에 닿았다.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옛 신라 석탑을 세워놓았다.

몇몇 석탑의 부재들은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인데 동·서 쌍탑이 제 위치라면

절은 삼각형 꼭지점에 있어야 된다.

그러나 최근에 세운 염불사는 원 위치가 아니다.

탑은 하늘거리는 우아한 맛이 흐르는데 단을 네모 반듯하게 석축 쌓듯이 쌓아 놓은 것이 눈에 거슬린다.

전(傳) 염불사지였다는데 삼국유사에는 "어느 스님이 시간을 정해 하루에 몇 번씩

나무아미타불, 염불 부르는 소리가 온 서라벌 장안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그가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17만호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헌강왕(875~886) 이후의 신라 하대다.



·산길 극락으로

차를 타면 길이 있는 끝까지 가는 습관이 있다.

여기도 주말이면 등산객들의 차로 빽빽하다.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쇠줄을 쳐놓았다.

팻말에는 '칠불암 1.9km'라 적혀 있다.

사과농장을 지나자 염소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데 개는 어찌나 짖어대는지…. '감전주의'라는 친절한 경고판을 총총히 걸어놓았다.

그래도 사과밭 지나자 산길이 호젓이 반겨준다.

이처럼 산은 자신의 품에 안기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마음의 평온을 선물한다.

길가에 보이는 유치한 영어와 불법묘지가 눈에 거슬렸지만, 화요일 오후

사람 하나 없는 산길을 걸어가는 나그네 가슴에 물소리가 졸졸거리고

솔향기가 스며든다.

태고의 정적이 이럴까?

이윽고 '칠불암 300m
' 팻말이 나온다.

칠불암 석축이 보이고 "날마다 좋은날 되세요"라는 문구가 물 한 모금 마시라고

권한다.

굽이굽이 석축을 오르자 제법 번듯하게 지어놓은 암자가 나온다.

칠불암.

참 오밀조밀하면서 당차고 세련된 칠불은 장쾌한 시야를 선사한다.

참 좋고 아름다운 곳이다.

휘어진 소나무 사이로 토함산과 벌판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한참만에야 눈을 마주친 처사님께 합장하니 울산에 사신다고 했다.

속기 벗은 순박한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기와조각에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오늘 하루를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벽암록 말씀을 인용해 놓았다.

상선암 마애불에는 오르지 못하고 칠불암 마애불의 말없는 침묵을 뒤로한 채

어둠이 밀려와 처사님의 차대접도 마다하고 서둘러 내려왔다.

욕망의 속세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4코스(4km, 3~4시간) : 통일전-서출지-남산리 3층석탑-염불사-칠불암

kjsuoja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