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와 억새 사각거리며 '지친 영혼' 위로
'5코스' 강길 따라 둑길 따라
▲ 3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민자전차상회 |
언제부턴가 강과 길을 보면 끝까지 걷고 싶은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낙동강 강바람을 마셨고, 남강의 푸른 물결을 보았다.
섬진강은 마음으로 안았고, 태화강 고래바람도 가슴에 담아 보았다.
경주의 형산강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침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신라 2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 경주는 보문단지를 흘러 형산강과 합치는
북천과 남천 사이에 위치해 있는
복된 땅이다.
경주 터미널에서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내 형산강과 남천이 만나고 남천을 따라 걸었다.
갈대와 억새가 뒤섞여 반겨 주었다.
갈대·억새의 사각거림은 지친 영혼을 일시에 맑게 해주었다.
둑길 아래 낚싯대를 드리운 두 아저씨가 있었다.
"고기 좀 잡았습니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입질도 안합니까? 언제부터 왔습니까?"
"아침 10시에 와가지고 애가 닳아 앉아 있습니다. 잡으면 놓아 주려고 합니다.
낚일 때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허허…."
까만 안경에 모자 눌러 쓴 다부진 다른 아저씨는 말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좌우 두 개 정도는 이해하겠는데 낚싯대 다섯 개는 나의 이해 폭을 뛰어넘는 욕심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서려있는 남천 길
옛 문화는 물길 따라 이어졌다.
배를 타고 다리를 건너면서 수많은 애환과 사랑이 익어갔다.
오릉교 다리 밑에는 사람 떠난, 지난 여름의 어지러운 우리시대 문화가 엿보인다.
청록다방, 신라다방에 치킨, 반점까지.
낙서 수준의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다리 아래서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해결 되었다.
머리를 잔뜩 치켜세운 거북 세 마리가 다리를 받치고 있었다.
하천 건너에는 솔숲 사이로 오릉이 숨은 듯이 보일락말락 했다.
둑 아래에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느릿느릿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었더랬다.
문천교를 건너자 반가운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30년째 이곳에서 자전거 수리하는 주인은 사람 없는 점포에서 헌 자전거와 한몸이 되어 낡은 의자에 앉아서
세월을 낚고 있었다.
1974년 이 앞 도로가 포장되고부터 자전거 수리가 줄어들었단다.
아스팔트에서는 고장 날 확률이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갈 길 바쁜 나를 음료수라도 한 잔 하라고 권한다
.
지난 6월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런닝, 구' 촬영 이야기며, 공무원 안부러웠던 좋았던 그때를
그리운 아쉬움으로 회상에 잠기신다.
30년째 달려있는 '시민자전차상회' 간판이 언제까지 그대로일지….
다시 일어나 걸었다.
'김유신 생가' 터 재매정을 스치듯 보고, 선비들 어른거렸던 사마소를 지나 월정교를 건넜다.
'최 부자 집'도 있고 신축 중인 교촌한옥마을도 있다.
다양하게 지어야 한옥의 맛과 멋이 있는데 규격과 모양 비슷한 박제된 느낌이라 아쉽다.
경덕왕 19년(760)에 만든 월정교는 한창 복원공사 중이다.
왼편은 반월성을 휘돌아가는 남천을 정비 중이고 우측에는 당의 힘을 빌리기 위해 당에 불모로 남겨두었던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위해 지었던 인용사터를 꽤 오래전부터 발굴하고 있다.
가려놓은 가림막에 여러가지 유물 그림과 연구원 박미옥, 박영호의 얼굴 그림도 있어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반월성 끝자락을 지나 반월매운탕집 앞으로 걸어서 경덕왕 때 월정교와 함께 만들었다는 일정교에 갔다.
어마어마했던 다리 흔적들은 수풀에 가려 어른거렸다.
도자기를 연구하거나 판소리를 연구하는 여러 곳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문화를 몸으로 실천한 사람들
한 굽이 돌자 동남산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이 나온다.
다리 하나를 두고 아름답게 살다간 두 분의 흔적이 아련하다.
크게 배우지는 못해도 한 분은 한글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던 최햇빛 님이고, 다른 한 분은 신라를 온몸으로
사랑했던 고 윤경렬 선생이다.
고청 윤경렬 선생 생가는 시든 석류와 감들이 제 빛을 잃고 매달려 있었다.
대문에는 '고청추모사업회' 현판만 쓸쓸히 서있고 생기 잃은 집은 을씨년스러웠다.
마을을 지나 둑길을 걸었다.
왼쪽에 배반 벌판을 끼고 오른쪽엔 남천과 남산을 방패 삼아, 멀리는 토함산을 바라보며 걷는 즐거움은
무엇에 비길까?
절로 발걸음도 가볍고 가벼운 흥분이 된다.
예전의 흙길이 무척 좋았다.
지금은 농기계가 다니는 시멘트 길이 돼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흘러가는 물결이 침묵으로 위로해 준다.
등 뒤에서 어둠이 내려 앉는다.
어둠으로 물들 때 흘러가는 물결은 한 폭의 그림이다.
위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이 극적인 아름다움을 훔쳐 보는데 일하고 오는 어느 아낙이 한 손에 애호박 들고 바지 걷고 징검다리를 걷는다. 어둠이 짙어가는 석양, 아낙과 징검다리, 어찌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한참을 취했다.
통일전 가는 화랑교를 지나자 물소리가 어둠을 뚫고 귓가에 울린다.
화랑교 건너 오른쪽 둑길은 드문드문 농원들이 있어 시멘트길이라 건너지 않고
아직도 흙길인 왼쪽으로 걸었다가 낭패를 당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낭만의 길이었다.
그러나 둑과 하천에 바싹 붙은 조립식 농원서는 길이 정상이 아니었다.
풀이 무성하고 길이 없어 가을걷이한 논으로 걸어서 가보아도 길이 없었다.
몇 번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돌아서야했다. 뭐랄까?
철조망이 가로놓여 갈수 없는 고향길이 이런 심정일까.
어둠이라도 남천 끝까지 걷겠다는 계획은 아쉬움으로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5코스(5㎞ 3~4시간): 고속터미널-재매정-월정교-일정교-윤경렬 생가-화랑교
'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도 경주 속살 걷기] '7코스' 호수 따라 가을은 깊어가고 (0) | 2015.06.03 |
---|---|
[고도 경주 속살 걷기] 산등성이 '여기저기 수많은 고분들' 솟아 (0) | 2015.05.27 |
[고도경주 속살걷기] '신문왕릉이 품어내는' 긴장감 일품 (0) | 2015.05.13 |
[고도경주 속살걷기] '칠불암 소나무 사이'로 토함산 보이고… (0) | 2015.05.06 |
신라 흥망 간직한 '왕릉길' 쓸쓸한 여운...[고도 경주 속살걷기] (0) | 201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