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코스' 호수 따라 가을은 깊어가고
골목 담벽에 눈물어린 애환 주렁주렁
▲ 명실마을서 바라본 덕동 |
나는 깊은 늦가을을 즐긴다.
바다도, 사람 붐비는 한여름은 피하고 사람 떠난 늦가을의 쓸쓸한 바다를 거닐기를 좋아한다.
계절의 깊이를 느끼려면 산속 호숫가를 걷는 것도 괜찮다.
강한 바람이 가을의 깊이를 재촉 한다.
바람에 바싹 마른 잎들이 길 위에 바삭거린다.
그 소리가 경쾌하다.
주말이면 사람 넘쳐나는 보문단지도 한적하여 오히려 쓸쓸함을 안고 있는 듯했다.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자 덕동호 수몰 이주민 마을이 나온다.
온 마을이 규격화돼 운치가 없다.
암곡동 가는 길은 언제나 깊은 슬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암곡 경로당에 내리니 순간 정적이 밀려왔다.
느티나무 몇 그루가 세월의 연륜을 안고 곱게 물든 자신의 모습을 속삭이듯 보여준다.
다리 밑에는 맑게 흐르는 물결에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자신의 속살을 비벼대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 2차선 아스팔트길.
확장공사를 하고 있어 낭만이 확 달아나 버리지만 남광농원부터는 옛길이라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물결 속에 원효의 잔영이 어른거리고
호수(덕동호)를 끼고 길을 걸었다.
길 좌우에는 붉게 익은 사과들이 풍성함을 더해 주었지만, 곳곳의 묘지는 흉물스럽다.
하필이면 저렇게 흉물스럽게 묘를 쓸까.
그래도 추수 끝난 논바닥에 주저앉아 콩을 털고 있는 아주머니와 경운기에 볏단을 싣고 있는
농부의 모습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 진다.
얼마 가지 않아 길 아래에 시래골 마을이 보인다.
습관대로 마을을 둘러 본다.
모두 여덟 가구.
무너지고 휘어진 골목길 담벼락에는 눈물어린 아름다움이 있고, 온갖 애환이 묻어나는 집에는
아련한 사람의 정이 흠뻑 배어 있다.
동네 어귀 논에서 늙은 농부 혼자서 볏단을 걷고 있는 모습.
성자 같다.
마을 가운데 이층 집 한 채는 별로 반갑지 않지만, 허름한 동네에 어울리게 단정하고 소박하게 앉아있는
집이 눈에 띈다.
검소하게 꾸며놓은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예전에 달밤에 와서 술 한 잔 했던 인연이 있는 집인데, 주인은 부산서 한의사 하다 사위에게 물려주고
자아를 찾아 나그네처럼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자신을 정갈하게 가꾸어 가는 분이다.
집은 주인의 인격이다.
정감이 묻어난다.
붉게 익은 감, 담벼락과 마당 사이에 세워놓은 콩 묶음, 오토바이 두 대, 처마 끝에 쌓아놓은 추수한 벼 포대,
주렁주렁 매달린 옥수수, 대문가에 개 한 마리….
주인은 부엌 옆에 앉아서 무언가 손질한다.
마을 앞길로 걸어 호숫가로 갔다.
원효 스님이 주석했던 고선사 터를 바라보니 서산에 걸린 해가 시선을 방해한다.
손으로 가리고 훔쳐보듯 보아야 한다.
물결은 찰랑이고 갈대는 흔들린다.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있는 육중한 고선사지 3층 석탑이 저 물속에서 어른거린다.
수몰되기 전 한적했을 마을과 아득한 신라시대를 상상해본다.
원효 스님은 이 골짜기를 어떻게 품었을까.
지혜의 밝은 마음으로 넉넉히 안았을까.
호숫가에 문득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장애인 딸과 톱질하는 농부,
나무를 주워 담는 아내. 장애 자식을 둔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쓰릴까.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은 고통이었으리라.
자식이 건강하게만 태어나도 감사하고 복된 일이라 생각해야 되는데 세상 부모들은 자식들이 잘나고,
공부도 잘해야 되고, 돈도 잘 벌고, 그렇게 끝없는 욕심을 부린다.
장애 자식과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성자다.
여기 부모도 성자 같아 보인다.
·깊어가는 가을 길
시래골 마을을 나와 다시 길을 걷는다.
걸을수록 가을이 깊어간다.
온통 가을이 몸속에 들어와 버렸다.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는 영롱한 음악이 되어 울린다.
몇 굽이를 돌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명실마을이 나온다.
덕동호숫가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마을이다.
뒷산이 큰 병풍이 되고 계곡에서 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아름다운 산골마을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은 형형색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마지막 정열을 발휘하여 밝고 따뜻하게 비추니 산과 마을은 고운 빛이 되어
마지막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만춘정(晩春亭) 3칸 정자가 길 가는 나그네를 반겨준다.
10가구의 아담한 산골 마을은 집집마다 가을의 풍성함이 흐른다.
곡식은 쌓여있고 감도 익었고 호박은 뒹군다. 이집 저집 기웃거린다.
누런 개 한 마리는 집안을 구경하고 사진까지 찍어도 특유의 선한 눈으로 짖지 않고 나를 바라만 본다.
갑자기 아련한 그리움에 가슴이 울컥거린다.
산 개울가에 들어서자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른다.
등 뒤에 햇살 받으며 산을 올랐는데 내려올 때는 어둠을 등지고 내려온다.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와 버린 것이다.
걸음이 빨라진다.
한참을 걸어 덕동마을에 이르자 초승달이 산 위에 걸렸고 저녁 노을은 붉은 마음을 토한다.
7코스(약 5㎞ 3~4시간): 암곡교-남광농원-시래골마을-명실마을-덕동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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