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복사지'
금당 터 앞 감나무, 수묵화 되어 세월의 영욕 지켜봤네
▲ 숭복사지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특이한 절터이다. 복원해 놓은 숭복사비와 동·서탑 너머 서쪽 하늘에 노을빛이 아련하다. 이재호 작가 제공 |
사계절이 뚜렷할 때는 봄과 가을도 여름과 겨울같이 자신만의 영역이 있었는데, 지구온난화로 봄과 가을이 지극히 짧아졌다. 봄이 올 무렵 추위를 뚫고 향기 피우는 고고한 매화, 붉은 목숨 같은 동백, 봄의 서곡을 알리는 노란 산수유, 곧이어 개나리 벚꽃 진달래 앵두 살구꽃이 연이어 피었다. 그런데 갑자기 더운 봄날이니 꽃이 순서 없이 동시에 피어버려 기다림의 애틋함이 사라졌다.
초월산 기슭에 숨어 있는 듯
다른 곳서 옮겨온 특이한 절터
798년 원성왕 "곡사에 묻어라" 유언
현재 괘릉에 있던 절에 왕릉 쓰고
대신 지은 절 헌강왕이 숭복사로 개명
금석학의 최고봉 '숭복사비'
깨어져 파편 일부만 경주박물관에
경주에는 워낙 스타 절터가 많아 가려졌지만, 숭복사지는 토함산 줄기 초월산 기슭에 비스듬히 기대어
없는 듯이 숨은 의미 있는 폐사지이다.
7년 전부터 매달 한 번씩 문화유적을 걸어서 찾아가는 '경주 길' 회원과 무장사지를 기행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숭복사지를 찾았다.
전국에서 제일 많은 경주의 도로변 벚나무에는 하얀 웃음 같이 피워버린 꽃 사이로 상기된 붉은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수줍음을 머금고 있었다.
■ 그리움 저편으로 잔영은 남아
국도변에서 비스듬히 한참을 오르면 숭복사지가 겉은 무덤덤해도 가슴속 그리움으로 나그네를 맞는다.
이미 서산에 해는 넘어가 버려도 붉은 노을 잔영은 물결처럼 어려 있다.
예전에는 폐사지 주변이 논밭이었는데 주변을 정리하여 정겨움은 사라졌지만
규모는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에 왔을 때는 근래에 지은 숭복사가 셋방살이하듯 조그마한 건물이 차라리 정겨웠다.
지금은 2층 선원이 공장 건물처럼 볼품없이 지어져 분위기를 망쳐놓았다.
속세 사람보다 더 맑아야 할 사람이 종교인인데, 얼마나 더 가난해야 맑은 영혼이 돌아올까.
서쪽 아래로 층층이 펼쳐진 구릉지에 산들이 긴 어깨춤을 추듯이 겹겹이 감싸고 있다.
산과 들 골짜기로 이어진 경주는 이처럼 곳곳에 경이로운 땅이 숨 쉬고 있다.
금당 터 앞에 감나무 한 그루가 수묵화가 되어 좌우 쌍탑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금당 터에는 신라 석물만이 세월의 영욕을 어슴푸레 이야기한다.
3층 동탑은 상륜부와 2층 탑신이 없다.
2, 3층 탑신이 없는 서탑은 지붕돌만 올려놓아 두 탑이 균형을 잃고 어둠을 맞이한다.
발길을 동쪽으로 향했다.
2014년에 복원한 숭복사비다.
귀부와 이수는 여기에 있던 것을 경주박물관 뜰에 옮겨놓았다.
복원하면서 왜 이렇게 할까?
무장사지 아미타비는 전혀 이질적인 백색의 돌을 세워놓았고, 여기는 진품 본떠 새 것을 세워놓았다.
박물관 뜰에 보관해놓은 것을 갖고 와 깨어진 비신만 만들어 세우면 될 것을….
■숭복사는 언제 어떻게 지어졌을까
대개의 절이 지어진 곳에서 일생을 마치거나 이어지는데 여기 숭복사지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특이한 절터이다.
798년 원성왕이 유언으로 곡사(鵠寺)의 자리에 묻히기를 명한다.
하지만 왕릉을 만들며 비록 왕의 땅이라도 공짜로 사용하지 않았다.
주변을 일괄하여 모두 후한 값으로 구했다.
값으로 치른 벼가 모두 2천 섬이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원래 이 절이 있던 곳의 바위가 고니(鵠)를 닮았다고 이름이 '곡사(鵠寺)'였다.
곡사는 지금의 괘릉(38대 원성왕릉)자리에 있었는데 왕릉을 쓰고 대신 이곳에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름도 그대로 곡사로 사용하다 885년 가을에 헌강왕이 숭복사(崇福寺)로 바꾸었다.
다음 해(886년) 봄에는 최치원에게 "선왕 대에 처음 절을 지을 때 큰 서원을 발원하였는데
김순행(金純行)과 너의 아버지 견일(肩逸)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으니, 명(銘)을 지어 한번 일컫게 되면
나와 네가 모두 효성을 다하는 게 될 테니 너는 마땅히 명(銘)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치원은 "나는 중국에 건너가서 갑과에 급제하였으나 그동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효도를
하지 못하고 헛된 영화만 누렸는데 명을 받고 보니 놀랍고 떨리어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슬픔에 목이 멘다"면서 숭복사 비(銘)를 짓는다.
비(銘)를 짓게 한 헌강왕도 수명이 짧아 죽고, 동생 정강왕도 1년 만에 죽어
여동생인 진성여왕 때 이 비가 완성된다.
비의 내용에 이 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다.
798년 원성왕릉을 만들 때 이곳으로 옮겨 885년 헌강왕이 곡사에서 숭복사로 바꾸고, 861년(경문왕 1년)에
원성왕릉 추복(追福)의 장소, 원찰(願刹)을 만들기 위해 중수했다는 것이다.
■ 최치원의 사산비명과 숭복사비
최치원은 880년(24살) '토 황소격문'으로 전 중국에 문명을 떨치는 스타가 되어 884년(28살) 신라로 귀국했다.
887년에 왕명으로 쌍계사 진감선사비를 시작으로 4곳의 비를 짓는다.
이것이 최치원의 사산비명인데 우리나라 금석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중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비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비, 보령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는
아직도 온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경주에 있는 숭복사비만 깨어져 파편 일부만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앞의 3곳은 당대 고승 행적을 적어 놓은 것인데 이 숭복사비만은 왕가(王家)의 능원(陵園)과 거기에 따른
사찰(寺刹)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다.
최치원의 글은 웅혼하면서 화려하다.
보통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깨우친 경지의 글이라 심장이 요동친다.
숭복사비는 왕가의 내력에다 절을 옮긴 사연을 적었다.
신라 왕실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냄새가 나서 글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다.
나머지 세 비문은 고승들의 기록으로 자칫 지루할 수 있는데도,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게 하는 마력이 있다.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도 유불선 모두를 통달하여 문장을 극대화시켰다.
여기의 비문에는 헌강왕을 "젊은 나이에 덕이 높으시고 건강한 몸에 정신이 맑으셨다"며 썼다.
또한 "보잘것없는 재주이고 비록 봇물이 벼루를 씻어 검게 될 만큼 글씨를 쓰지 않았지만, 절묘한
좋은 문장이라는 찬사를 듣게 되기를 바란다"는 속마음도 비친다.
어둠이 밀려오자 달은 더욱 붉어진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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