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폐사지를 찾아서] '황룡사지'

금산금산 2015. 3. 11. 20:47

황룡사지

 

 

 

 

 

 

'세상의 중심' 황룡… 옛 영화 간데없고 아련한 흔적만

 

 

 

 

 

 

 

 

▲ 신라 3대 절이었던 황룡사의 흔적은 우리 기억을 아련하게 만든다.

사진은 어둠이 내린 황룡사지 장육존상이 있던 금당지와 목탑지. 이재호 작가 제공

 

 

 


신라의 대표적인 3절을 꼽으라면 황룡사, 감은사, 불국사이다.

임진왜란 다음 해(1593년)에 불타버린 불국사는 중수에 중수를 거듭하다

우리 시대에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현되었지만, 황룡사와 감은사는 절의 기능은 상실하고

흔적만이 우리 기억을 아련하게 한다.
 


이 삼사는 신라사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황룡사는 삼국 중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가장 넓게 땅을 차지하는 정복왕인 진흥왕 14년(553)에 시작해 진지,

진평, 선덕여왕의 4왕 93년에 걸쳐 완성한 2만여 평으로 동양 최대의 절이었다.

감은사는 삼국을 평정한 통일기념 사업으로 동해 변에 세웠다면,

불국사는 동악인 토함산의 발목쯤에 통일 이후 문화의 최절정기에 마침표를 찍는

신라 불국토의 염원을 담았다.

 

 

 

 



감은·불국사와 함께 신라 대표 사찰
진흥·진지·진평·선덕여왕 거쳐 완성

남문 터 앞에는 주춧돌· 장대석 등
다양한 모양의 석물 널려 있어

80m 높이 '9층 목탑'의 경이로움
신라 위상 높이고 내부 결속 다져

 

 

 




■ 황룡사지를 서성이며



겨울의 절정인 1월의 늦은 오후, 황룡사지를 찾았다.

좀 전에 왔을 때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 다시 찾으니 차가 한 대 있었다.

내려서 누가 인사하는데 문화재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오세윤 작가였다.

그는 황룡사지 남쪽 끝인 여기를 제일 좋아한단다.

어느 분야든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기막힌 장소를 찾아낸다.


나는 평소대로 분황사 정문에서 황룡사지로 들어가지 않고 남쪽에서 들어간다.

그쪽은 황룡사를 뒤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남문 터 앞에 수없이 널려 있는 석물 위를 걸었다.

주춧돌, 장대석 등 온갖 다양한 모양의 석물이 널려 있었다.

보면 볼수록 가슴이 찡해왔다.

유물 하나하나에 정이 흐르고 사연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어디라도 문화재와 함께 삶이 이어졌다.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이나 노서, 노동동 고분군, 첨성대에는 민가가 꽉 들어차 있었다. 이곳 황룡사지에도 100여 가구가 살다간 흔적이 아련히 남아 있다.

신라 주춧돌이나 석물에 구멍을 내어 곡식을 찧고 빻아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저녁 연기 허공에 맴돌던 정경을 생각하다 발길이 추억의 장소에 다다르자 잔잔한 그리움의 미소가 새어나왔다. 부산일보의 백태현, 최학림 논설위원, 최원준 시인 등 한 낭만 하는 지인들이 달 뜨는 봄날이나 가을날

산성막걸리 한 말 들고 여기 호박돌에 가득 부어 쪽 바가지 띄워놓고 달이 막걸리에 빠지도록 마시는

 '달술' 모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산에 기울어져도 한 뼘이나 남았던 해는 순식간에 산을 넘어가 버렸다.

여름 해가 지루하게 넘어가는 데 반해 겨울에 지는 해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바람은 차고 매섭게 부는데, 앙상한 가지의 감나무에 얼기설기 엮어 만든 까치집에는 석양이 담겨 있었다.

남문지를 들어가 중문을 지나고 황룡사 9층 목탑지에 섰다.


■ 신라 대표 선수 황룡사와 9층 목탑의 위용

목탑 지는 중간에 거대한 심초석을 두고 사방 6칸 총 64개의 기둥으로 1층을 삼았다.

그 흔적은 주춧돌이 무언으로 전해주고 있다.

이 거대한 목탑은 9층 80m 높이로 아파트로 치면 약 26층이다.

오늘날같이 첨단장비도 없는 상태에서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세웠다는 사실은 온 국력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기록상으로는 귀국길에 오른 자장 스님이 신인(神人)을 만나 너희 나라 황룡사의 호법용은 나의 장자로

절을 수호하고 있는데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조공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적대국 백제의 아비지(阿非知)의 도움으로

선덕여왕 14년(645)에 탑을 완성한다.


삼국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면서도 내부적으로 보이지 않는 경쟁도 한다.

서로 국력을 과시하면서 우월감을 나타낸다.

백제가 미륵사로 국력 과시와 문화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면, 신라는 이 황룡사에 모든 역량과

자존심을 걸고 근 100여 년에 걸쳐 완성한다.

특히 여기 세웠던 9층 목탑은 신라 수도의 한복판에 높게 솟구쳐 군사적으로는 망루 역할을 했다.

세상 모든 것은 한 가지의 목적만으로는 정성을 쏟기 힘들다.

큰 절을 지어 나라의 위상을 높이면서도 내부 결속, 그리고 군사적인 목적이 어우러져

이 황룡사 목탑을 만든 것이었다.

이 거대한 높이의 9층 목탑을 초고층이 즐비한 오늘날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그 옛날 단층 높이의 건물만 보다가 광활한 평지에 80m 높이의 탑은 경이로움이고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고려 문인 김극기(1,150~1,204)가 이탑을 직접 오르고 쓴 '황룡사' 시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층층 계단은 빙빙 둘러 하늘에 나는 듯(層梯 繞欲飛空)/ 온산과 물이 한눈에 들어오네(萬水千山一望通)/…/ 굽어보니 수많은 경주의 집들이(俯視東都何限戶)/ 벌집과 개미 구멍처럼 아득히 보이네(蜂과蟻血轉溟몽).



■ 황룡사와 아홉 용

목탑지에서 내려와 절의 가장 중심건물인 금당 터에 갔다.

중간에 4.8m의 큰 불상은 없어지고, 불상을 세웠던 돌들은 그 자리에서 옛 영광의 상처를 말해주고 있다.

진흥왕 14년(553) 왕명으로 궁궐을 짓다 황룡이 나와 황룡사 절을 짓는데, 그렇다면 용은 무엇인가.

서양에서 용(dragon)은 불을 뿜고 파괴하며 인간들과 대립하는 사악한 존재지만, 동양에서 용은 성스러운 동물로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는 전지전능한 조물주 역할을 한다.

물을 관장하는 용을 인간은 생명 수호의 신이라 신성시했다.

황제와 왕들은 용을 빌려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무임승차했다.


최고의 용은 청룡인데 왜 황룡이라 했을까.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4신도도 있지만, 용을 방위로 나타낼 때 좌청룡, 우백룡, 남적룡, 북흑룡,

중황룡이니 신라를 세상의 중심, 아니면 왕이나 황룡사를 구심점으로 국력을 모으자는 것인가?

이 황룡사를 위시하여 분황사, 황복사 등등의 아홉 절이 있었다고 지금도 구황동이다.

경주에는 여기 구황동을 위시하여 황남동, 황남 초등, 황오동, 황성동 등 황자의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구룡은 우리나라에서 무수히 등장한다.

통도사 구룡지, 치악산 구룡사, 관룡사 화왕산의 구룡승천, 천관산의 구룡봉, 금강산의 구룡폭포….

온통 용의 나라이다.

이러다 보니 아직도 지렁이 수준인데 용이라고 우기며

대권을 꿈꾸는 '잠룡'들이 많지만, '잡룡'이 안되었으면 좋겠다.

여론조사용 용들은 신라가 황룡사의 구층탑으로 삼한통일의 염원을 이루었듯이,

황룡사지를 거닐며 남북통일의 원대한 꿈을 꾸는 진짜 용이 되길 바란다.


침묵의 황룡사지를 느끼기 위해 어제와 오늘 새벽에 두 번, 석양이 물들고 어둠이 밀려올 때 두 번 왔지만

여전히 용이 심술을 부리는지 매서운 찬바람이 뼛속까지 적신다.

자장이 '보살계론'을 이틀 밤낮으로 설법할 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강당을 덮었고,

원효가 절묘하게 '금강삼매경론'을 강론할 때는 경탄의 신음이 났을 것이다.

신품노송도의 솔거, 보살행 보시의 정수 스님의 향기도 아른거린다.

목탑지 차가운 돌에 앉아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통곡의 불바다가 된 황룡사를 생각하니

갑자기 온몸이 뜨겁게 울컥 인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