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 <7-1> [유엔공원에 핀 휴먼스토리]생사를 초월한 인연 - '제임스 그룬디' 이야기

금산금산 2013. 9. 15. 19:18

이야기 공작소 <7-1> [유엔공원에 핀 휴먼스토리]:생사를 초월한 인연- '제임스 그룬디' 이야기

'시신처리兵' 열여덟 지미 … 암과 사투 벌이면서도 매년 한국땅 찾아

6·25  63주년 정전 60년

 

 

영국군 참전 용사였던 제임스 그룬디(오른쪽 두번째) 씨가 부산에 사는 한 지인의 집에 초대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정전 후 영국에 돌아가서
- 척추암이 발병했고 아내와는 이혼했다

- 유엔묘지에 묻혀있는
- 전우들이 그리워서
- 1988년부터 부산을 찾았다
- 그들의 묘비를 쓰다듬는 것이
- 큰 위안이 되었다

인연이란 이런 것일까. 제임스(지미)는 식탁 위에 놓인 붉고 탐스런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녀딸이 출근하면서 아침 간식으로 챙겨두고 간 것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과 한알과 바나나 한쪽, 스크럼블드 에그로 된 조촐한 아침이다. 제임스는 동양의 미지의 나라, 한국과의 인연이 이렇게 질길 줄 몰랐다. 광안리 앞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아침, 빨간 사과 한알을 앞에 두고 제임스는 60년 전 기억속으로 빠져들었다.


#1. 한국으로 간 지미


   
그룬디 씨의 젊을 때 모습.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바닷바람은 지독히도 매서웠다. 지미는 배에서 내리기 전, 양팔에 면역주사를 맞고 유서를 썼다. 갓 훈련병 딱지를 뗀 신출내기 군인.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국가의 일을 하게 되었다는 묘한 긴장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1950년 12월, 18세의 청년은 파견 명령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단지 국가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곳이 어디든 가는 것이 애국이고 충성이라 생각했다.

부산항 정박을 기다리며 지미는 옷깃을 여미고 나와 한국 땅을 바라보았다. 지독히도 춥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항구에 나온 한국사람들은 이렇게 추운 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서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 여학생들이 양쪽으로 둘러서서 붉은 사과를 하나씩 나눠줬다. 건내준 사과는 뜨뜻했다. 온기가 느껴지는 사과를 받아든 지미는 마음이 이상해져 가방 속을 뒤졌다. 아껴뒀던 쿠키를 꺼내 여학생에 쥐어주면서 가난하고 후진적인 나라란 선입견과 달리 이 나라에도 따뜻한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1951. 2. 15)


#2. 전투보다 힘든 전투

전쟁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났다. 지미가 속한 부대에서 '시신처리 전담팀(Recovery Unit)'을 만들기 위해 지원병을 모집했다. 혈기왕성하고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 군인들은 대부분 전장에 나가 싸우기를 원하는 분위기였지만, '원하는 병사는 손을 들라'고 했을 때 지미는 무엇에 끌린 듯 손을 들었다. 시체처리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총탄에 쓰러진 젊은이들이 논밭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지미는 곧 UN군 시신처리 전담팀에 배치되었다.(1951. 3)

지미가 속한 시신처리팀은 5인 1조로 운영되었다. 상부지시에 따라 배정된 장소를 수색했고 시신수습과 매장을 준비했다. 전장에서 발견되는 시체는 총탄이나 미사일 부상으로 심하게 훼손된 경우가 많았다. 피와 살이 뒤범벅 된 전우들의 모습을 매일 본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것은 어린 지미의 무의식에 날카로운 트라우마를 새겨놓았다. 

시신 수습을 위해 산등성이를 뒤지다 보면 종종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지뢰였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곳. 매일 매일이 지뢰밭. 하루에도 수십 구의 시신을 수습하던 지미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1951. 4)


#3. 삶과 죽음의 냄새

수습한 시신에는 온갖 벌레들이 기어다녔다. 죽은 자는 온전히 자기를 다른 생명체에게 내맡길 수밖에 없다. 수습된 시신은 먼저 신분확인 과정을 거쳤다. 군번표식이나 지문, 소지품으로 신분 확인이 되지 않으면 며칠이고 보관해야 했다. 물에 빠져 불은 시신은 며칠동안 건조 과정을 거쳐 일일이 손가락 지문을 찍어 서류와 대조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었을 사람.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을 전우의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이만큼 가치롭고 중요한 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메슥거림을 참았다. 약품처리를 했다 하더라도 시신을 보관하는 막사에 들어서면 삶과 죽음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그 묘한 냄새에 무감각해질 때쯤 지미의 눈앞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한국에서의 첫봄이었다.(1951. 5)


#4. 살아남은 자의 귀환

드디어 한국을 떠나는 배에 올랐다. 엠파이어 프라이드 호를 타고 함께 왔던 800여 명 중 살아 돌아가는 사람은 지미를 비롯하여 150여 명뿐이었다. 힘들었던 지난 2년. 죽음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용케도 살아남아 귀국선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미안하고 괴로웠다. 마음의 빚을 지고 돌아가는 길. 서서히 멀어져 가는 코리아를 바라보며 지미는 어쩌면 이 나라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1953. 6)

영국으로 돌아온 지미는 가능한 바삐 살려고 노력했다. 한국에서의 기억들을 망각 속에 묻어버리고, 좋은 생각, 밝은 생각, 따뜻한 생각만 하려고 애썼다. 보통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회사생활 하면서 오순도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불현듯 되살아나는 전장의 트라우마는 말못할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기다리던 아기는 생기지 않았고 척추암이 발병하면서 아내와도 이혼했다.


#5. 인연에서 영원으로

지미는 당곡(부산 대연동의 옛지명) 유엔묘지에 묻혀있는 전우들이 늘 그리웠다. 같은 날 같은 배를 타고 왔지만 생사가 엇갈린 사람들. 그들이 보고 싶어 1988년부터 부산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묘비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면서 더 밝게, 더 활동적으로 생활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도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면 마음이 설렌다. 몰핀주사와 함께 친구들에게 나눠줄 초콜렛도 종류별로 한뭉치씩 준비한다. 항암치료 담당의사가 자제를 부탁하는 데도, 일년에 한 두번은 꼭 한국을 간다. 참전용사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제임스 자신 말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그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진다.

제임스는 얼마 전 영국 맨체스터 '한국전 참전용사모임'에서 동료들과 함께 '아리랑' 노래가 담긴 CD를 샀다. 그에게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한국 이야기할 때 제임스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거린다. 청춘을 함께 한 나라. 감사할 줄 아는 나라. 예의가 바른 나라. 나를 가족으로 받아준 친구와 손녀가 있는 나라. 언젠가는 내가 묻힐 나라…. 제임스의 한국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취재 후기

- 영국 할아버지 씩씩한 웃음 속 짙은 고뇌

지난 2006년 봄, 유엔공원에서 파트타이머로 근무할 때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직원 까페테리아에 들어 섰을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헬로우, 뷰티풀 영 레이디!"  

나는 깜짝 놀랐다. 당시 나는 전혀 영(young)하지 않았고 더욱이 뷰티풀(beautiful)하지도 않았기에 필시 나를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건 영국인 할아버지의 유머 섞인 인사였다. 이것이 한국전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82) 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제임스 씨는 밝고 씩씩했다. 말기암 환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웃음의 밑바닥에는 꺼내기 힘든 인간적 고뇌가 서려 있었다. 가족이 없는 제임스 씨에게는 한국인과의 작은 인연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 같았다. 2010년부터는 한국 방문시 한국인 양손녀 집에서 지낸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6·25 이후 내가 살아있는 것은 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살아남았지. 하루하루 고마운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내 손으로 묻어준 동료들이 보고 싶을 때는 한국으로 안 오고는 못 배기죠. 이제 한국은 고향같아요. 오랫동안 다니다보니 한국인 친구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제임스 씨를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지난 5월초였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해마다 한국을 찾고 있지만 언젠가 마지막이 되고 못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그는 전쟁에 대한 말을 극도로 아꼈고, 한국전쟁 바깥의 일에 대한 언급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 기억을 꺼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조심스럽기 때문인 것 같다.

대연동 유엔공원 상징구역에 서서 주묘역을 내려다 본다.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는 공간. 용사들의 무덤에는 영산홍과 장미가 붉은 꽃다발처럼 피어오른다. 6월 25일이다.



김정화 (사)부산스토리텔링 협의회 기획부장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정보산업진흥원

※ 후원: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