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2> 휴식과 일탈의 공간, '금강 공원'

금산금산 2013. 9. 21. 18:55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2> 휴식과 일탈의 공간, '금강 공원'

日人이 만든 '개인정원', 해방 후 시민들 놀이공간… 영욕의 흔적

 

 

 

일본인 자본가 히가시 바라가 일제강점기 시절 개인 정원으로 만든 금강공원의 현재 모습. 해방 후 인기를 끌었던 놀이기구가 철거돼 쓸쓸한 모습이다.

 

- 1920년대 일본 자본가
- 온천장 손님 더 머물게
- 연못·13층 탑 만들고 동래 망미루 등 옮겨와

- 1965년 '금강공원' 명명
- 동물원·케이블카 갖춰
- 가족나들이·각종 모임
- 삶의 투정 풀어준 응석받이 역할

- 부산시 재정비사업
- 자본의 욕망이
- 스트레스 줄까 걱정

숲길이 그리워 금강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인적이 드물다.

회전목마와 문어다리 같은 놀이기구는 벌써 철거되어 그 자리는 공터로 변했다.

30년도 훨씬 이전, 시골에서 처음 부산에 와서 들렀던 금강공원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다.

'하루 관광객 10만 명 돌파', '한 지역 최다인파 20만 명 기록' 등이 1970년대 금강공원의 모습을 알려주는 기사 제목들이다.

당시 서울의 창경원보다 더 많은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다.

어느 해 어린이날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도저히 표를 팔 수 없어, 그냥 문을 열어버린 적도 있었다고

금강공원을 지켜온 사람들이 전해준다.

■일제강점기 '정원'으로 탄생

금강공원 탄생은 부산이 식민도시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개항 후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동래 온천을 휴양지로 개발하면서 배후지 금정산을

관광지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금정산의 바위들이 매우 아름다워 강원도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해서 이곳을 '소금강'이라고도 불렀다.

금강공원의 명칭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온천장의 목욕탕, 여관 등을 이용해 돈을 벌 목적이었던 일본인 자본가들은

손님들이 온천장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주변에 공원이 필요했다.

이 공원은 부산으로 건너와 담배장사로 큰돈을 번 일본인 자본가 히가시 바라(東原嘉次郞)의 개인 정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1920년대 초반 금정산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하여 정원을 꾸몄다.

계곡물을 이용해 '청룡담(靑龍潭)'이라는 일본식 연못을 만들고, 전망 좋은 언덕에 13층 높이의 '후락탑(後樂塔)'도 세워 일본인 자본가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는 1933년 무렵 전통도시 동래에서 시가지계획으로 철거된 망미루, 독진대아문, 내주축성비, 이섭교비 등을 옮겨와 정원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지배의 상징이었던 물건이 일본인들에게는 놀이터 조경용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그는 또한 개인 정원을 일반인 관람객들에게 개방했다.

온천장에서 목욕을 즐긴 관광객들이 금강원에 올라 금정산의 자연과 어울리는 것은 관광의 필수 코스였다.

공중목욕탕에서 온천욕을 하고, 금강원에서 소풍을 즐기면서 만족스러워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엽서나

관광안내서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히가시 바라는 1940년 이 정원을 동래읍에 기증했다.

정원과 관련한 내용은 등산로 주변 바위를 깎아 만든 '금강원지(金剛園誌)'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1967년 당시 국내 최장 케이블카

   
금강공원 케이블카. 국제신문 DB

해방되고 1965년이 되어서야 부산시는 이곳을 '금강공원'이라 이름 하고 일반에 공개하였다.

 1967년 동물원을 개장하고, 당시로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를 운행하면서 제법 공원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정부는 1969년 금강공원을 태종대와 함께 정부지정 관광지로 설정했다. 또 부산시는 1972년 부산시 문화재로 지정하고, 1974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주검들의 시신을 모은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을 동래에서 이전해 오면서, 금강공원은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알게 모르게 관철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부산시민에게 금강공원은 고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곳이었다.

금강공원 방문은 대체로 가족이나 직장동료, 계 모임 등 단체로 찾는 일이 많았다.

모여서 놀기를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온천장에서 망미루를 거쳐 금강공원 입구를 향하는 길목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인형 뽑기, 공놀이, 풍선, 솜사탕, 방망이 사탕, 번데기 등 놀 거리 먹을거리가 꼬맹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길게 늘어선 매표소 앞에서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 널찍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앉는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기념 촬영이다.

카메라를 가져온 사람들은 제법 잘사는 집이다.

아니면 필름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촬영 전문 아저씨에게 부탁한다.

일본인이 남긴 연못의 돌다리에 온 가족이 걸터앉아 자세를 잡는다.

엄마, 이모들은 몸을 45도로 비틀어 사진 아저씨들이 셔터 누르기를 기다린다.

숲 속에서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뛰어다니던 꼬맹이들은 아빠의 목덜미에 기어올라

금강공원 기념 인증샷을 찍는다.

점심때가 되면 찰밥에 계란말이 반찬으로 즐거운 식사를 한다.

목구멍 가득 밥을 떠먹고는 사이다 한 잔으로 소화를 시킨다.

밥숱가락을 놓기 무섭게 꼬맹이들은 놀이기구를 타러 간다.

놀이기구는 1965년 공원이 개방될 당시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생겼다고 한다.

놀이기구는 비행기, 회전목마, 다람쥐, 비룡열차, 날으는 양탄자, 밤바카, 다람쥐통 등 10여 개가 있었다.

물론 시기마다 조금씩 달랐다.

엄마를 졸라 얻어온 용돈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서서 설레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린다.

회전목마를 타면서 영화나 드라마 속의 연인들이 하던 모습을 흉내 내 보기도 한다.

하나 타고 내려오면 또 다른 기구를 타고 싶다.

더 타고 싶은 꼬맹이와 못 타게 하는 엄마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갈등은 엄마의 팔뚝 매질과 꼬맹이의 울음소리가 어울려져야 끝난다.

■부산시민 투정 받아주던 응석받이

단체로 놀러 온 아줌마 아저씨들은 숲 속에서 장구 장단에 맞춰 노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술도 빠지지 않는다.

커다란 바구니에 술을 넣어 다니면서 잔술을 팔던 아주머니도 이날은 대목이다.

해거름이 되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풍기단속원들의 단속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금강공원에 '치마 주우러 간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다.

여자들이 술을 마셔 치마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고 놀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내일이 없을 것처럼 떠들고 놀아야만, 그동안의 힘든 생활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부산시민에게 금강공원은 투정을 받아주던 응석받이였다.

놀이기구도 타고, 나들이에 지쳐갈 무렵 집으로 갈 채비를 한다.

나가는 길에 동물원에 들른다.

시골 시장에 약장사들이 데려온 원숭이 정도는 익숙할까 나머지는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이다.

울타리에 매달려 꼬맹이가 집채만 한 코끼리가 자기가 내민 과자를 먹어주기를 애원한다.

 바다사자와 물개의 수영솜씨와 우연함에 관람자들은 넋을 잃었다.

조랑말을 탄 아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엄마의 움직임도 바빠진다.

암사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새끼 세 마리를 순산했다는 뉴스는 당시 동물원의 명성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2001년 이후 동물원은 문을 닫았고, 우리의 기억에만 남아있다.

최근 부산시는 금강공원 재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각종 놀이시설을 현대화하고, 테마공간을 만들고, 드림랜드 사업으로 가족 휴식공간을 조성한다는

적극적인 정책이다.

많은 자본을 투자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겠다는 생각이다.

자본의 욕망이 자칫 금강공원을 찾는 시민에게 휴식보다는 스트레스만 주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부산시가 금강공원을 개발하더라도 가족이나 친구들, 직장 동료가 조용히 휴식하고, 일상에서 받은

걱정거리들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 함께 살아온 주민들

- 사유지 놀이기구, 개인이 운영하고 정비·수리 도맡아

30년 이상 금강공원에서 놀이기구를 운영해 온 류대영(73) 씨 부부로부터 금강공원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온천장학회 부지였던 현재의 부지를 사서 놀이기구를 설치했다.

주변 놀이기구 부지가 시유지가 아니라 대부분 사유지라고 한다.

부산일보 사장이었던 김지태 씨의 별장도 얼마 전까지 놀이기구 앞에 있었다.

사유지가 많아 부산시의 공원 재정비 사업이 쉽지 않아 보인다.

처음 금강공원에 들어왔을 때는 관람객들도 많았다.

직장인들 야유회, 학생들 소풍, 가족들 나들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놀이기구를 타는 고객도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당시 풍경이었다.

부부만으로는 운영할 수 없어 몇 명의 종업원들을 고용할 정도였다.

요즘에는 체험학습 나오는 유치원생들이 가장 중요한 고객이다.

서비스로 한 번 더 태워주기도 한다.

류대영 씨는 놀이기구와 청춘을 보냈다.

매일 기구를 관찰하면서 정비와 수리를 혼자서 해결했다.

그래서 기구와 고객들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혹시 대자본이 시설투자를 할 때 이윤만 목적으로 해 자칫 고객들의 안전이 뒷전일까 우려하고 있다.

   

요즘에는 놀이기구를 운영해서 수익을 올릴 수 없다.

주변 시설은 일부 철거되기도 하고, 관계 당국의 철거요청도 간혹 있다. 그럼에도 금강공원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이곳이 부부의 삶을 같이해 온 친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젊어서 공원을 찾는 고객들과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부터는 공원의 숲들과 함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교수·한국근현대사 전공

※공동기획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 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