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7-5> [유엔공원에 핀 휴먼스토리]아름다운 선물- '리차드 위트컴' 이야기(上)
위트컴 할아버지가 美 청문회에 불려갔단다, 군수물자로 민간인을 구한 게 위법이라고 했다
6·25 63주년 정전 60년
1954년 7월29일 부산 메리놀병원 기공식에 참석한 위트컴(앞줄 왼쪽 세번째) 장군. 위트컴은 6·25 전쟁 후 부산지역 사회 복지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사진= 클리프·부산타워 제공 |
- 할머니가 노트에 소중히 기록한
- 푸른 눈의 장군 할아버지는
-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 불린
- 위트컴 장군이었다
-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 전쟁에서의 진정한 승리입니다"
- 미국 의회에 불려간 할아버지가
- 의원들 앞에서 한 말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내게 작고 도톰한 노트를 한 권 남겼다.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노트는 옛날 것 같지 않게 고급스러웠다.
가죽장정이었는데, 손때가 묻어 반질거렸고 마지막까지 애지중지한 듯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노트 속에는 한문과 영어를 섞어 쓴 할머니의 글씨가 빼곡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표지 안쪽에 외국인의 사인이 있는 것이었다.
리차드 위트컴.
그 이름은 'Dear YoungSun'이라 쓴 아래쪽에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영순은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은 넘기는 페이지마다 등장했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우선 덮어두었다.
그 후, 노트에 대해선 깜박 잊어버렸다.
할머니가 내게 남긴 유산을 정리하느라 경황이 없어서였다.
할머니의 유산이 내게 온 것은 뜻밖이었다.
생전에 내 것은 네 것이라는 말씀을 흘리듯 한 적이 있지만 그런 일이 진짜 생기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할머니가 그동안 베풀어준 것만으로도 과분했다.
할머니는 내 할머니와 언니 동생하며 지낸 사이였다.
내 할머니는 홀로 나를 키우다가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나를 할머니께 부탁했다.
나는 그때 이미 성년이 되어 타인의 도움이 없어도 살아가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부탁을 받은 할머니는 내게 극진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좀 의례적이었다.
때로는 지나친 관심이 간섭 같아서 성가시기도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평생 운영했던 보육원을 내게 남긴 것이다.
퍽 부담스러운 유산이었다.
나는 할머니처럼 평생 인간애를 실천하면서 근검절약 속에 살 만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내 배만 부르면 남의 것 탐내지 않고 적당히 즐기며 살자는 주의였다.
그런 내게 사랑과 사명감 없이 운영한다면 도둑이 되기 십상인 보육원을 남겨 놓았으니 몹시 심란했다.
할머니의 노트가 생각난 것은 'ㄱ신문'의 기사 때문이었다.
'ㄱ신문'은 부산이야기의 스토리텔링 작업 중 하나로 6·25전쟁에 참전한 외국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1953~54년에 부산 미군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한
리차드 위트컴(Richard S.Whitcomb·1894~1982)이었다.
그는 한국 여인과 결혼해 한국에 살다가 1982년 미 8군에서 영면했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그제야 노트가 생각났고, 언젠가 할머니로부터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때, 할머니의 얼굴이 밤하늘의 별을 우러르는 것처럼 아득하고 그리운 표정이었던 것도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할머니의 유품상자를 꺼냈다.
상자 속에는 할머니의 소박했던 삶이 압축되어 들어 있었다.
반들반들하게 손때가 묻은 백팔 염주, 금강경 한 권, 테가 동그란 돋보기안경과 노트.
그것이 할머니가 75년을 살고 남긴 유일한 물건이었다.
새삼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찬 내 방을 돌아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노트를 펼쳤다.
'이 노트는 푸른 눈의 장군 할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선물이다.'
나는 잠시 뜨악했다.
글귀 아래에 1953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가 박혀 있었다.
얼른 꼽아보니 할머니가 열 여섯 살 때였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나로선 두 사람의 연관성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 어떻게 할머니가 위트컴 장군의 사인이 든 노트를 선물로 받았단 말인가.
나는 신문을 통해 리차드 위트컴이 어떤 인물인지는 대략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의 참화로 고통을 겪는 가난한 나라에서 투철한 사명감으로 인류애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든 닿았으리란 짐작이 들기는 했다.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졸지에 거지가 될 뻔한 우리에게 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한 파란 눈의 장군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갖고 오셨다. 나는 이 노트를 골라 사인을 해달라고 모기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장군 할아버지는 날 격려하려는 듯 '굳! 프리티'라며 멋진 사인을 남겨주었다. 가까이서 본 장군 할아버지는 훤칠하고 인자한 모습이었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할아버지처럼 불쌍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 이 노트에 많은 얘기를 써야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16세의 어린 할머니가 꾀죄죄하고 깡마른 모습으로 수줍음을 견디며
위트컴 장군 앞에 노트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할머니는 부드러우면서도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다.
그 의지에 불을 붙인 것이 리차드 위트컴 장군인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평생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대신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었다. 기사에 의하면, 위트컴 장군은 당시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다.
한 인간의 훌륭한 삶은 누군가의 영혼에 아름다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는 겨우 열여섯 살의 소녀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벌써 생의 좌표를 세운 것에 놀라움을 느끼며 다음 글을 읽었다.
'1953년 11월 27일 밤 8시 30분 경 일어난 화재는 많은 사람들의 집을 빼앗아갔다.
우리가 사는 영주동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동광동을 지나 중앙동 부산역까지 번졌다.
도시가 온통 불바다였다.
그렇게 무서운 일은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을 목격한 후 처음이었다.
불 탄 집이 6000여 가구에, 29명이 죽고 이재민이 삼만 명이라 했다.
불은 열 시간도 넘게 타올랐다.
그 날, 집을 잃은 사람들이 지금 미군들이 지어준 천막촌에 살고 있다.
엄마는 병이 나서 누워만 있다.
나는 엄마까지 잃고 고아가 될 뻔한 위기를 넘긴 것만도 고마운데,
엄마는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장만한 집을 잃었다며 날마다 운다.
엄마가 울어서 나도 운다.
아버지와 오빠가 너무 보고 싶다.
하지만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
전쟁은 무섭고 끔찍한 재앙이다.
사람들은 파란 눈의 장군 할아버지가 우리가 두 번 죽을 걸 살렸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가 즉각 미군 창고를 열어 추위에 떠는 우리들에게 천막을 나눠주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나는 그 분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장군 할아버지가 미국의회 청문회에 불려 가셨다고 권 씨 아저씨가 흥분해서 말했다.
학교에서도 같은 소문을 들었다.
천막촌 사람들은 모두 할아버지를 걱정했다.
할아버지는 미국인이면서도 부산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후원의 손길이 필요한 부산 지역 기관들과 88개 부대가 자매결연을 맺고
체계적으로 후원하도록 했다는 말도 권 씨 아저씨가 해 주었다.
또, 안 입는 옷, 선물, 돈, 그 외 여러 가지 물품들을 기부하라고 각 부대에 지시했다고도 했다.
권 씨 아저씨는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듣고 오는지 참 많이도 알고 있었다.
나는 장군 할아버지가 좋은 일을 했는데 왜 의회에 불려갔느냐고 권 씨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아저씨는 군수물자를 민간인에게 나눠준 것이 위법이라고 말했다.
선행을 베푸는 데도 법을 지켜야 한다?
나는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천사 같은 할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점점 더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아무리 위급상황이라고 해도 민간인을 위해 군수창고를 연 그의 결단력과 용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에 대한 소식은 한참 후 다시 이어졌다.
'저녁 해가 어스름해질 때쯤 권 씨 아저씨가 발에 바퀴나 달린 듯 급하게 뛰어들더니
통로에 서서 팔을 치켜들고 외쳤다.
전쟁은 총,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은 미국 의회에 불려간 장군 할아버지가 국회의원들 앞에서 한 말이라 했다.
혼내려고 장군을 불렀던 의원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고, 장군은 오히려 더 많은 원조를 받아왔다고 했다.
아저씨의 말에 천막 안은 일시에 안도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모두들 말은 안 해도 장군 할아버지가 잘못될까봐 마음을 졸인 것이다.
나는 엄마를 따라 감사의 기도를 했다.'
하루하루가 가시밭인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감동이 있는 천막촌의 풍경이 상상되었다.
역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사람인가 싶었다.
지금이라도 그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영영 잊혔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다행스러웠다.
리차드 위트컴은 할머니의 기억에만 남아 있기에는 업적이 참으로 많았다.
한 인간이 태어나 의미 있게 살기가 어디 쉬운가.
나는 거듭 내 삶의 자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할머니는 그 말을 하기 위해 노트를 남긴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시 펼친 노트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오늘도 천막 안에선 리차드 위트컴 장군에 대한 얘기가 꽃을 피웠다.
장군 할아버지는 며칠 전 천막촌을 둘러보러 왔다가
보리밭에서 한 임산부가 아기 낳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장군은 피난민촌에 당장 산원(産院)을 세우라고 명령했단다.
그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은 배가 부른 아지매들과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장군을 핸섬한 미국인이라는 말로 치켜세웠다.
아지매들은 그 말을 풍채가 좋고 잘 생겼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무조건 아주 좋다는 뜻으로 쓰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위트컴의 발자취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형식을 띤 글도 있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계속)
정인 소설가
▶작가 약력
-2000년 '21세기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당신의 저녁' '그 여자가 사는 곳'
-부산작가상, 노근리평화문학상 수상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외래교수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정보산업진흥원
※ 후원: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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