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7-6> [유엔공원에 핀 휴먼스토리]아름다운 선물- '리차드 위트컴' 이야기(하)
대학에 투자하고 병원도 세울거요, 이 나라에서 할 일이 참으로 많소!
6·25 63주년 정전 60년
- 장군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 당신이 한 소녀의 생애에
- 얼마나 큰 선물을 남겼는지
- 끝내 보지 못하신채로
나는 마음을 설레며 UN기념공원에 들어섰다.
장군의 죽음을 신문에서 본 후, 곧 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죽음의 흔적을 찾아 간다는 것은 전쟁을 겪은 나로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묘역을 걸어 들어갔다.
가을의 따스한 햇살이 넓은 묘역에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장군의 묘가 어디쯤 있는지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부산에서 장군께서 한 일이 그렇게 많았으므로 공원 어딘가에 자취를 보관하고 있으리라
기대했던 마음은 물거품이 되었다.
몹시 의아한 일이었다.
전쟁 후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장군의 행적이 다 기록될 수는 없었다고 해도,
장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UN기념공원에 안장된 그를 기릴 만한 자료 몇 개쯤은 보존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다못해 장군이 썼던 군모나 만년필 한 자루라도….
그렇게 부산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는데 어째서 한 점 흔적도 없단 말인지.
나는 내 마음의 별이었던 장군 할아버지가 아무도 몰라보게 묻혀 있다는 것이
왠지 억울해서 자꾸 푸념이 나왔다.
묘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얼마 후 무언가에 이끌린 듯 저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장군의 묘는 주 묘역 앞쪽에 있었다.
드디어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장군 앞에 꽃을 바치며 무릎을 꿇었다.
너무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한 사죄였다.
잠시 후, 나는 가방에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던 노트를 꺼냈다.
그 속에는 장군 할아버지의 행적을 좇아 어설프게 쓴 짧은 소설이 한 편 들어 있었다.
나는 언젠가 할아버지께 그것을 읽어드리고 싶었다.
"장군님, 우리 대학교의 미래를 위해 투자를 좀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1954년 6월 8일, 윤인구 총장은 학교로 찾아온 장군에게 그림을 한 장 내보이며 말했다.
윤이 내민 것은 부산대학교의 청사진이었다.
장군은 무엇인지 짐작했다는 듯 빙긋 웃으며 그림을 집어 들었다.
"아시다시피, 작년에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은 했지만
부지를 구하는 문제나 건립 자금 등으로 애로를 겪고 있습니다. 좀 도와주시지요."
윤은 장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간곡히 말했다.
장군이 움직여만 준다면 일은 순조로울 터였다.
장군은 지난 해 미2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전후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대한미군원조처(AFAK)의 막강한 자금을 움직이고 있었다.
장군의 결단력과 의지는 지난해 부산역 화재 때 이미 본 적이 있었다.
그는 3만 이재민들을 위해 망설임 없이 군수창고를 열었고,
뒤이어 후생주택을 지어 이재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장군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었다.
인도주의에 기초한 그의 활동은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윽고 장군이 윤을 쳐다보았다.
"좋소. AFAK 자금에서 25만 달러의 자재를 지원하지요. 그 외에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할 수 있는 한은 열심히 돕겠소. 교육은 어느 시대, 어디서나 가장 중요한 가치요. 당신의 노력을 존중하는 바요."
장군은 흔쾌히 대답했다.
윤은 그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윤은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장군에게 감사의 악수를 청했다.
장군이 흐뭇한 웃음으로 윤의 손을 맞잡았다.
"윤 총장, 부산은 차츰 제 모습을 갖춰갈 것이요. 다음 달에는 드디어 메리놀병원이 기공식을 해요.
완성되기까지는 몇 년 걸리겠지만, 뭐든 시작이 중요한 거요. 난, 앞으로 병원을 더 많이 세울 계획이요.
그러면 전문 의료 인력이 갖춰질 거고, 전후 각종 질병들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요.
난, 이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AFAK에서 진행해야 할 사업을 챙겨보니 191개나 돼요.
우리 함께 잘해 봅시다."
"장군님의 열정과 노력이 지금 부산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장군님은 부산과의 인연이 아주 깊은 것 같습니다."
장군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막 전쟁을 끝낸, 헐벗고 굶주린 도시가 바로 곁에 펼쳐져 있었다.
그 도시에서 그는 어쩌면 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916년 입대한 후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아이젠하워와 밴플리트 장군을 도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고 별도 달았지만,
전쟁은 언제나 영광이거나 상처였다.
장군은 특히 부산에 대해서 애정이 깊었다.
피난민들로 넘치는 도시는 남루했지만 활기찼다.
한국인들은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다만 3년간이나 전쟁을 치른 후라 황폐하고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장군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복구하기 위해 수많은 계획들을 세워 실천해가면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장군의 가슴에도 좀처럼 들어낼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장군은 1950년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11월 26일~ 12월 13일)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몄다.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고국의 젊은이들이 영하 40℃를 오르내리는 타국의 혹한 속에서 싸우다가
절반 이상 목숨을 잃은 걸 생각하면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1만의 해병사단이 12만의 중공군을 만나 싸울 때의 절박함과 처절함이 어땠을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장군은 그 안타까운 죽음들을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그들의 유골을 찾아 고국으로 돌려보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스스로 느낀 장군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장군을 배웅하는 윤의 깊은 눈길이 장군의 얼굴을 살피다가 따라 웃었다.
윤은 먼지를 뿜으며 멀어져가는 지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머잖아 모습을 드러낼
대학의 모습에 가슴이 설레었다.
6·25 때 부산에서 미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낸 리차드 위트컴 장군. |
장군이 계획한 병원 건립은 7월 29일 메리놀 병원의 기공식을 시작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하지만 기금이 부족했다.
장군은 병원신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장군이 직접 한복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기금을 모으기도 하고,
부대원들에게는 월급의 1%를 병원신축기금으로 헌금하도록 지시했다. 또 각 기관들과 부대가 결연을 맺어 필요한 물자는 언제든 조달하도록
했다.
그 사이에 부산대학교 이전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윤은 금정산 기슭에 있는 일본인 농장을 새 대학 부지로 확정했다.
윤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은 장군은 경남도지사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설득했다.
결국 대학 부지는 무상 제공되었고, 즉시 온천장에서 부산대까지
이어지는 진입로가 닦이고 대학부지 조성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년 동안 전력을 다 해 군수사령관직을 수행하고 퇴임한 장군은 여전히 전쟁고아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나이에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과 궁핍에 시달린
모습들이 가득했다.
그는 조국에 돌아가는 대신 한국에 남아 더 많은 고아원을 짓고, 후원하는 일을 선택했다.
묘숙을 알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녀는 작고 가냘프지만 강인하고 용기 있는 여자였다.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데리고 혼자 고아원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주 고아원 운영에 대해 장군과 의논하고 기부도 받았다.
어느 날, 그녀는 장군에게 지금까지와 다른 도움을 청했다.
미국 유학을 가려 한다면서 유학 정보를 부탁한 것이었다.
장군은 놀랐다.
그 부탁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장군은 생각다 못해 며칠 후 그녀에게 전화했다.
"좀 나와 주시오. 오늘은 한복을 입지 말고 양장을 하고 와요."
묘숙은 영문도 모르고 장군을 따라 갔다.
대사관 앞이었다.
그제야 장군이 그녀를 굽어보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갑작스러운 청혼에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장군은 초혼이지만 그녀는 재혼이었고, 두 아이가 있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 차가 서른이 넘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들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대사관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부부가 되어 있었다.
묘숙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장군의 애국심과 인간애에 깊은 애정과 존경을 느꼈다.
장군은 공과 사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신사였다.
결혼 후 장군은 매일 아침, 유학을 보낸 그녀의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녀의 딸은 곧 그의 딸이었다.
장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골을 찾기 위해 1979년부터 움직였다.
그녀를 통해서였다.
그는 너무나 알려져 그 일에 직접 나설 수가 없었다.
유골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국에 들어가 조선족들을 통해 받는 군번표는 대부분 가짜였고, 유골은 다 동물의 뼈였다.
그래도 그녀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장군이 자신에게 남긴 유언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 때 죽은 미군병사들의 시신을 꼭 찾아서 본국으로 보내줘요."
푸른 눈의 장군 할아버지는 1982년 7월 12일 용산의 미 8군 기지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의 별은, 당신이 한 소녀의 생애에 얼마나 큰 선물을 남겼는지 끝내 보지 못하셨다.
위트컴 장군에 대한 글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노트를 덮고 나니 무겁게 나를 짓누르던 할머니의 유업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도 누군가의 별이 되고, 선물이 될 수 있을까?
노트를 덮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인 소설가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정보산업진흥원
※ 후원: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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