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 <8-1> [카메라의 렘브란트 최민식]- 프롤로그 : 영원한 주제 '인간'

금산금산 2013. 10. 26. 12:03

이야기 공작소 <8-1> [카메라의 렘브란트 최민식]- 프롤로그 : 영원한 주제 '인간'

평생 '낮은 곳'에 앵글…그에게 카메라는 '사회고발 총'이었다

 

 

 

지난 2월 타계한 사진가 최민식 선생의 이름을 건 사진상이 제정된다. 평소 그는 부산 감천문화마을(사진)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삶의 진실된 모습을 찍어왔다. 국제신문 DB

 

- 독학으로 사진기술 배워
- 6·25 전쟁 직후·1960, 70년대 시기
- 피란민 생활·가난했던 서민 모습
- 사진에 담아 생생한 역사로 남겨

- 군사정권의 수많은 탄압 겪으며
- 쌀과 반찬, 연탄 살 돈이 없어도
- 카메라 움켜쥐고 '인간찍기' 천착
- 56년간 휴머니즘을 예술 화두로

■주인 잃은 작가의 방

   

부산 남구 대연동

 

대연 성당 옆 골목.

 

낡은 담벼락 따라

 

좌판이 들어서 있다.

 

한 할머니가 과일이며 애호박, 오이, 고추 따위를 판다.

 

마치 거리에 살림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 같다.

 

이런 할머니는 최민식 사진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이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작고 허름한 단층 양옥이 나왔다.

 

문패를 보니 '崔敏植(최민식)'이라 돼 있다.

 

어, 돌아가신 분인데….

 

느낌이 묘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텃밭에 탐스런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사진가 최민식 이 살았던 집이다.

"지난 2월 아버님 돌아가시고 아쉬움이 커서 문패와 쓰시던 서재를 그대로 놔두고 있어요.

유품도 그대로 있고요. 아버님 사진 약 14만 컷은 이미 국가기록원에 기증이 됐고요.

기념관이라도 만들어지면 남은 사진 약 10만 컷과 책들, 카메라 등 유품을 보낼 수도 있겠죠."

작가의 큰 아들 최유도(60) 씨의 말이다.

 

작가는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이 집에서 약 10년을 살았다.

 

최 씨는 '최민식 사진상' 제정 소식을 전해듣고 몹시 반가워했다.

 

세상을 떠난지 6개월, 그동안 사진단체에서 유작전을 열고 지역TV에서 다큐 방송을 했지만,

 

최민식에 대한 세상의 망각을 붙잡아두진 못했다.

 

지방에서 활동한 비주류 예술가를 챙길 만큼 세상이 여유롭지 못한 탓일까.


좁은 마루를 건너 따라들어간 문간방. 작가의 쓰던 서재다.

 

벽면 가득한 책이며, 음악CD, LP판, 낡은 마란츠 앰프, 간이 책상 등이 모두 그대로다.

 

작가가 사진액자 속에서 씨익 웃고 있다.

 

작가는 가고 작품만 남은 방.

 

문득 무서워졌다.

그가 평생 추구한 '휴머니즘'과 '인간애'를 무슨 수로 이야기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진짜 인간'을 찾다

최민식의 사진은 언제 봐도 강력하다.

 

저 압도하는 눈빛과 표정들.

 

보는 이들은 저항할 수가 없다.

 

콧날이 시큰해지고 동공이 융숭 깊어진다.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너무 센 이미지가 때론 부담감으로 다가오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따뜻한 마음은 이내 겸허하고 유순해져서 우리 주변과 세상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사진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생명의 몸부림인 듯하다.

 


최민식은 1957년부터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을 찍었다.

 

유럽인이 만든 35㎜사진기에 미국 코닥사의 흑백 필름을 넣고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그의 망막을 통해 들어온 피사체는 상처 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들이었다.


최민식은 '진짜 인간'을 찾아다녔다.

 

당대 정권이 보여주기 싫어하는 장면과 얼굴을 애써 가려 찍었다.

 

1950년대를 거쳐 60, 70년대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사회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싶어하던 군사정권이 좋아할 리 없었다.

 

 

탄압을 받았다.

 

그렇지만 꺾기기는 커녕 들풀처럼 일어나 찍고 또 찍었다.

'진짜 인간'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이 주름투성이의 노인네 얼굴이고, 지친 지겟꾼이고, 무거운 해머를 진 노동자의 등이고,

 

단속반에 끌려가는 노점상 아주머니의 겁에 질린 얼굴이고,

 

땅바닥에서 국수를 퍼먹는 어린아이의 힘겨운 젓가락질이다.

 

이것이 최민식리얼리즘이었다.

 

그의 렌즈에 빨려든 세상은 인간의 고통과 번뇌, 인류의 비탄, 인간붙이의 고독, 소외, 가난 등

 

낮은 곳에 사는 군상들이 주로 겪는 삶의 모습이었다.

 

 작가는 마치 저인망 어선이 바다 밑을 훑어 내듯이 이런 모습을 찾아다니면서 잡아냈다.


이런 작가적 고집에 대해 그는 "내가 그렇게 불우했고 가난했으며 비참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가, 가난을 부둥켜안고 슬픔과 눈물, 아픔을 진정으로 경험하고 같이 울면서 살아있는 사진을 찍은 이유다.

 


■카메라는 '펜'이자 '총'

   
         

    최민식 선생이 생전 사용한

         카메라들.

최민식의 사진 인생 56년 중 40여 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쫓기고 가난했고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다.

 

가난과 고난만을 가려 찍는다는 이유로 '거지 작가'라는 별명도 얻었다.

 

1967년 영국의 국제적 사진연감에 그의 사진이 실리면서

 

'스타 사진작가'로 선정되고 '카메라의 렘브란트'란 찬사를 얻었지만

 

 그뿐이었다.

 

렘브란트네덜란드 출신으로 바로크 시대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예술가.

 

그 역시 지독한 가난 속에서 인간애를 좇는 독특한 그림들을 남겼다.

 

최민식을 렘브란트에 견준 것은 찬사이자 일종의 올가미였다.

 

거기엔 창작을 담보로 한 숙명적 가난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민식은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최민식이 평생의 화두로 좇은 '휴머니즘'은 어떤 의미일까?

 

생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휴머니즘은 인도주의, 인간의 존엄성을 의미 하죠.

한마디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이웃과 동거동락하자는 거예요.

그걸 일깨우고 공감케 하는 최선의 방법이 다큐 사진이에요.

그 속에 진실이, 양심이 녹아 흐르니까."

독학으로 사진을 시작한 최민식은 초지일관 '인간'을 찍었다.

 

무서운 집념이었다.

 

쌀과 연탄 살 돈이 떨어져도, 정부가 못찍게 탄압해도,

 

누가 간첩이라 신고해도, 초상권 시비가 벌어질 때도

 

그는 끝까지 카메라를 움켜쥐고 있었다.


'휴먼'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사진집만 14권.

 

사진집 속의 인간 군상들은 서럽도록 가난하지만 가슴 저미는 삶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그 향기 속에서 그가 끝까지 캐려고 한 건 희망이란 뿌리였다.


영면하기 두달 전, 여든 다섯의 나이에도 그는 카메라를 들고 뭘 찍을지 고민했다.

 

그에게 카메라는 일상의 펜이자 사회 고발의 '총'이었다.

 

그는 목숨 걸고 찍었고 그것을 지켰다.

 


# 최민식 작가와 가상 인터뷰

- "고난 속에서 참된 예술 창조, 베토벤은 나를 있게한 스승"

작가 최민식은 독서광이면서 음악광이기도 했다.

 

특히 베토벤에 대해서는 전문가 못지 않은 식견을 보여주었다.

 

정규 학력이라곤 초등학교 졸업뿐인 그가, 세계적 스타 사진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40여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독서와 공부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저서 등 자료를 토대로 '최민식과 음악'을 주제로 가상 인터뷰를 꾸며본다.


- 많은 음악가 중 왜 베토벤입니까?


"베토벤이 남긴 곡은 고향곡 9개, 17개의 현악 사중주, 피아노 소나타, 미사곡 등 해서 전부 760곡인데

그중 85%가 귀먹은 이후에 만든 거예요. 음악가가 귀먹어서 작곡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런데 했거든. 난 시련과 좌절 속에서 자기 예술을 꽃피운 사람을 좋아해요."

- 독일에 간 적도 있다죠?


"1982년 독일 정부의 초청을 받았어요. 정부 관계자를 만나 '인간' 3집을 선물했더니 관심을 컸어요.

몇 집까지 낼 거냐고 묻길래, 10집까지 낼거라고 했지. 그분이 "베토벤은 심포니 9번까지 만들었는데…"

하더라구.

내 사진집을 베토벤의 심포니에 비유한 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죠.

그때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인간' 10집을 내는 것으로요."(작가는 총 14집까지 냈다)

- 고난이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켰군요.

"그런 측면이 있죠. 만일 베토벤이 귀가 안 멀었으면 선배인 하이든과 헨델과 비슷한 음악을 작곡했을 겁니다.

베토벤 음악은 강렬하고 웅대하고 힘이 넘쳐 흐르고 높고 영웅적이에요.

베토벤은 고난 속에서 인간정신의 가장 깊은 경험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 같아요.

이 점에서 하느님께서 내게 가난을 주셨다는 사실도 따져보면 감사할 일이에요."

최민식은 음대에서 베토벤에 관한 특강을 한 적도 있다.

문제는 베토벤이 아니라 베토벤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베토벤은 바로 최민식 사진 예술의 모델이었다.

※ 공동기획: 재단법인 협성문화재단,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