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 <8-4> [카메라의 렘브란트 최민식]- 가난한 날의 진실

금산금산 2013. 11. 17. 09:04

 

이야기 공작소 <8-4> [카메라의 렘브란트 최민식]- 가난한 날의 진실

가난의 얼굴을 직시하라…삶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

 

- 가난의 실상을 증언함으로써
- 위정자의 직무유기를 고발하고 싶었다
- 이 땅에 빈자가 존재하는 한
- 나의 증언은 멈출 수 없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가난은 그리 단순한 남루가 아니다.

 

남루가 초라함 또는 허접함, 빈곤이면서 불편, 불안, 불우라는 말과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그렇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안빈낙도니 뭐니 미화를 하고 정당성의 이유를 찾아 갖다붙여도, 가난은 가난일 뿐인 것이

 

서민들의 당면 인식이다.

 

가난은 지상 최대의 과제다.

 


사진가 최민식은 이 과제에 정면 도전했다.

 

가난을 피하지 않고 정곡을 향해 돌진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현실 권력이 가로막아도, 목표의 초점을 놓치지 않았다.

 

가난에 대한, 가난을 위한 일생일대의 투쟁이었다.

 

그의 무기는 카메라였다.

 

세상을 투시하는 그의 눈은 가난에 직면해 언제나 번뜩였고, 심장은 진군하는 탱크처럼 쿵쾅거렸다.

 

그의 카메라는 때때로 총보다 강하고 펜보다 민첩했다.

 

'스냅샷'(속사 기법)을 치는 그의 손마디는 감각적으로 가난의 정곡에 초점이 맞춰졌다.

 



■사진은 곧 인격

-선생님, 사진이란 무엇입니까? 

"진실을 담는 그릇이지. 세상의 진실은 거리에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눈빛에 있어요."

-리얼리즘 관점의 해석이 아닌지요?

"사진의 진수는 리얼리즘에 있고, 그 속에 삶의 진실과 양심이 숨을 쉽니다."

-그럼, 사진이 곧 양심이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 양심적이지. 거짓말 하지 않는 양심, 그것이 사진의 리얼리티지.  리얼리티가 있어야 감동을 주거든."

-사진은 인간성을 반영하는 거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사진은 본질적으로 개성주의적인 예술 양식이에요. 독백의 공간이란 의미지. 그렇기에 양심 없이는 진실을 담을 수 없어요. 양심은 곧 인간성의 반영이고, 인격의 다른 표현이니까." 

-'사진양심'의 회복을 말씀하시는군요.

"난, 사진은 사회적 모순과 싸워나가는 투쟁의 도구라고 봐요. 사진양심을 회복해야 가난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어요. 한국사진계도 이제 '사진은 양심이다'하는 명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진의 창작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길이니까."

-결국 리얼리즘 정신으로 돌아오는군요.

"그것이 중요해요. 리얼리즘 전통의 회복이 사진 양심의 회복이죠. '우리들 삶과 진실한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기쁨과 필요성, 이것이 사진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거든."

 


■무등(無等)을 보며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서정주 '무등을 보며' 중)

거리의 가난을 좇으며 최민식은 가끔씩 '무등을 보며'란

 

시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가난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특히 '가난할수록 허릿잔등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타고난 마음씨는 오히는 빛난다'는 싯구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삶의 본질은 물질적 궁핍에 있지 않고, 마음바탕의 넉넉함에서 찾아야 한다는 믿음의 공유.

 

최민식은 무릎을 쳤다.

 

저 가난한 마음들을 카메라에 담아내야지. 그러면 가난의 눈물이 줄어들고, 무등(無等)의 세상이 도래할거야….

야전 본능이 발동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신발끈을 동여맸다.

 

시장이나 산복도로 등 낮고 후미진 곳을 수색하듯 훑었다.

 

그렇게 움직이길 50여 년.

 

그 사이 작가의 렌즈에 빨려든 현장들은 '대한민국 가난 보고서'라 할만큼

 

짙은 사회성과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때문에 탄압을 받았으나 그 마저도 내가 할일이라고 여겼다.

 

무등을 꿈꾸며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가난을 넘어서

소년의 고향은 황해도 연안이다.

 

어릴 때 집이 가난했다.

 

밥을 굶는 날이 다반사였다.

 

어머니는 산에서 나무를 했다.

 

학교를 마치고 산에 가서 어머니가 해 놓은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건 소년의 몫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소년이 나무를 해야 했다.

 

일만 하시던 어머니는 소년의 나이 열두살 때 세상을 떠났다.

 

살림은 더욱 가난해졌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은 학교도 못 가고 집안 일을 도맡았다….

 

소년은 열여섯 살에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방랑의 시간 대부분은 가난의 실상을 전하고 고발하는 데 썼다.

 


1972년 부산 자갈치시장. 한 노점상 아줌마가 끌려간다.

 

잔뜩 겁먹는 표정. 단속반원은 드센 손길로 공무를 집행한다.

 

'우리도 좀 먹고 살자'는 푸념은 단속반의 기세에 눌려 버린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과 렌즈에 빨려든 이웃들의 표정은 타자가 아닌 작가의 얼굴이었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괴테)고 했던가.

 

최민식은 눈물젖은 밥을 일용하며 그 추억을 땔감으로 가난의 실체에 다가갔다. 

 


뒷날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가난의 상처 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가난은 사람의 영혼을 옭아매고 모든 희망을 수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내가 목격한 가난한 사람들의 남루와 고통의 실상을 증언함으로써 위정자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그들의 직무유기를 고발하고 싶었다.

 

이 땅에 빈자가 존재하는 한 나의 증언은 멈출 수 없다."

 


사진을 통한 최민식의 '가난 구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최민식에 감동하는 건 가난 구제, 즉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던 한 인간의 구체적인 고투 때문이다.

 

'나랏님도 못한다'는 가난 구제를 그는 사진으로 풀어내려 했고, 그 꿈을 안고 이제 영원히 출사(出寫)를 나갔다.

 



# 최민식 사진과 초상권의 역설

- "허락도 없이 남의 가난을 찍다니" 시비 휘말리기도

   
'1972년 부산 자갈치'라는 제목이 붙은 최민식의 사진. 한 노점상 여인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단속반원에 끌려가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최민식 저 '낮은 데로 임한 사진'(눈빛)에서 발췌.

1957년, 일본에서 부산으로 돌아온 최민식은 삶의 방향타를

 

사진에 맞추고 본격 사진 인생의 돛을 올린다.

 

어느날 부산 암남동 '소년의 집'에서 사진사 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

 

합격한다.

 

이때 미국 선교사인 소 알로시에 신부를 만난다.

 

알로시에 신부는 전쟁고아 등 가난한 이들을 거두어 함께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알로시에 신부의 검소한 생활과 박애정신은 청년 최민식을 감동시켰고,

 

그로 하여금 평생 인간을 테마로 사진을 찍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최민식(세례명 빈센시오)과 천주교의 인연은 이처럼 뿌리가 깊다.

 

그는 종교의 힘이 예술을 실하게 할 것이라 믿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갚아주시리라.'(잠언 19장 17절).

 

예수가 부유한 젊은이들에게 한 이 말씀은 기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잠언이다.

 


'소년의 집' 아이들을 촬영한 최민식은 아이들 사진과 함께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미국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발송했다.

 

편지를 본 일부 미국인들은 1달러에서 수백 달러까지 성금을 보내왔다. 두드리니 열린 것이다.

 


최민식은 한동안 초상권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허락도 없이 가난을 찍어 돈을 번다는 비판이 나왔고, 동정심에 이끌려 초상권을 무시하고 무조건 찍고 본 것은

 

인권침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심지어 딸까지 "아버지는 가난을 찍어 팔고 있어요"라고 항의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적 측면도 있었다.

 

1950~70년대 한국은 초상권을 따져 인권을 논할 상황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의 밥 한끼,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 환기가 더 필요했다.

 

초상권을 무시했기에 시대상을 반영한 좋은 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최민식은 사진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했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아 실천했다.

 

가난을 향한 그의 일관된 작품활동은 '성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에게 사진은 종교 이상의 가치였다.

 

그는 하느님이 보낸 '사진의 성자'가 아니었을까.

※ 공동기획: 재단법인 협성문화재단,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