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8-6> [카메라의 렘브란트 최민식]- 인간, 그 아름다운 이름
가난의 시대는 저물었으나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사람을 향했다
최민식 선생은 생전 아는 사람을 만나면 격의 없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왼쪽부터 최민식 선생의 작품 '부산 1968''부산 1981'.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
- 1968년 1집 시작 '인간' 시리즈 14권
- 최민식 선생 사진 대중화에 크게 기여
1982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책을 좋아하던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부산에서 가장 큰 서점 중의 하나인 영광도서 2층
사진 코너에서 발견한 '인간'이라는 사진집을 우연히 들추다가
마치 세상이 멈춘 듯 한 먹먹함에 눈시울을 붉히고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그때부터, 사춘기 소년은 '예술이 주는 감동'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2006년 12월, 어릴적 그 소년은 부산의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가 되어
'인간, 그 아름다운 이름'이라는 주제로 최민식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민식 선생은 그저 공공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마련해준다니 '참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선생님, 이 전시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선생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인연, 다큐멘터리의 시작
잘 알려져 있듯이, 최민식 선생이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57년 일본 유학시절 우연히 발견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의
사진전 '인간가족'전 도록과의 만남이었다.
'인간가족'전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 담당 디렉터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1955년 전 세계에서 200만점의 사진을 모아
그중 68개국의 유·무명 작가 273명의 사진 503점을 최종 선정하여
전시한 기획전이었다.
이후 '인간가족'전은 세계 순회전을 통해 사진 매체의 강력한 힘을 입증했던 역사적인 전시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인간가족'전이 열렸었다.
1957년 4월 3일부터 5월 5일까지 서울의 경복궁미술관에서 개최되었고, 30만 명이 관람을 한 대규모 전시였다.
그런데 그 전시가 개최되도록 혼신의 힘을 쏟은 이는 부산 출신의 임응식 선생이다.
임응식 선생은 부산 근대기 부산미술의 1세대 서양화가인 임응구 선생의 동생으로 1952년까지
부산에서 활동했었다.
두 번째 인연은 사진집 '인간' 시리즈의 출판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힘겨웠던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얼마 후 최민식 선생은 사진에 관계되는 일을 하던 중
'한국자선회'에 사진사로 취업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1962년, 최민식 선생은 대만 국제사진전에서 처음으로 작품이 입선되는 기쁨을 얻는다.
또한 이듬해인 1963년 대한민국 사진대전에서 입선된 것을 시작으로 국내외 공모전에서 다수의 작품들이
입상하면서 그의 사진은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인정과 평가로 인해 1968년, 사진예술에 비교적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던 동아일보사에서
사진집 '인간' 제1집을 기획,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최민식 선생의 사진집 '인간' 시리즈는 총 14권이 출판되었다.
1968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사진집 '인간'의 제1권은 동아일보사에서, 제2권과 제3권은 삼성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제4권부터 제8권까지는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특히 경북 왜관에 위치한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분도출판사에서의 출간은 그에게 기적같이 다가온 일이었다.
성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사신부이며 분도출판사의 대표였던 임 세바스틴 신부의 도움이야말로 '인간' 시리즈가 지속적으로 출간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어주었다.
만약 분도출판사에서의 출판작업이 없었다면 우리는 최민식 선생의 사진을 이렇게 풍부하게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최민식 선생은 14권의 '인간' 사진집 이외에도 많은 사진집과 책들을 출판하였는데, 1987년에 열화당에서 나왔던 사진집 '최민식 1957-1987'은 문고판으로 제작되어 그의 사진이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내가 중학생 시절에 만났던 사진집도 그렇게 많은 인연들 중의 하나였으리라.
■진실을 담는 자의 고통
1960년의 4·19 혁명,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 등 뒤숭숭한 한국정치 상황과 경제성장 위주의 독재정권 하에서 사회고발적이고 빈곤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그의 사진들은 집권자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최대의 고통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감시와 견제였을 것이다.
최민식 선생에게는 1970년 미국 아이오와주의 디반포트 시립미술관 개인 초청전과 일본 도쿄 니콘 살롱 초청전에 초대받고도 정부의 여권발급 거부로 참석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 일들은 동아일보사에 기획했던 '인간' 1집이 나온 후 당시 울릉도에서 잡힌 간첩의 증거물에
그 사진집이 들어있어서 동아일보사의 사진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숱하게 불려가면서 고생한 경험에 비하면
여권발급 거부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27년 동안 찍은 대표작들의 필름을 분실해버린 일이다.
1983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초청된 프랑스 파리 프낙(FNAC) 미술관 전시를 위해 서울 주재 프랑스문화원장이 인편으로 전달하기로 한 500컷의 사진 필름이 사라져버린 사건이었는데, 실상은 필름을 전달해주기로 한 프랑스문화원장이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필름을 통째로 넘겨버린 것이었다.
■사람과 삶에 대한 애정
사진사적으로는 최민식 선생의 사진 작업이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사진전 '인간가족'으로부터 촉발되었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로버트 카파, 폴 스트랜드, 아우구스트 잔더, 도로시어 랭, 드미트리 발테르만츠,
유진 스미스, 워너 비숍, 돈 맥컬린, 죠셉 쿠델카, 그리고 세바스티앙 살가도와 칼 마이단스에 이르는
다큐멘타리 사진의 계보사와 함께하는 리얼리즘 사진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87년을 전후로 그의 사진에는 또다른 변화가 느껴진다.
아니, 그것은 그의 사진의 변화라기보다는 그의 사진에 담겨온 이 사회가 변화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먹고 살만한 사회'가 되었고 그의 사진에 등장하던
가난한 이들의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시기를 즈음하여 최민식은 또 다른 가난한 이들을 찾아 외국으로 작업의 반경을 넓히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최민식 선생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렌즈에 담는 것으로
주제를 확대해 갔다.
힘겹고 어렵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미처 그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을 정도로 최민식 선생의 사진은 파란 많은 한국의 현대사를 거쳐 온 대중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들에게도, 또는 사진속의 장면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똑같이 감동을 준다.
■마지막, 그리고 영원히
2012년 9월 25일, 나는 부산을 방문한 프랑스 마그재단 미술관 관장을 모시고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범어사를 방문했었다.
그곳에서 사진 동호회 일행에게 사진 수업을 하고 계시던 최민식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나를 알아본 선생님께서는 사진을 찍어주시겠다며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5개월 후 선생님을 황망한 심정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성모병원 장례식장.
지난 2006년도에 개최되었던 최민식 선생님의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나는 선생님의 사진이
최고의 작품으로 제작되고 보존되기를 원했었다.
최고의 인화지와 최고의 인화 기술로 만들어진 50점의 사진은 현재 부산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록 선생님은 가셨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남아 있다.
미술관 수장고에도,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이진철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공동기획: 재단법인 협성문화재단,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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