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8-2> [카메라의 렘브란트 최민식[- 예술을 향한 '집념'과 가족의 '헌신'
가족은 사랑했다, 밥벌이 가장이 아닌 위대한 예술가로서 그를
최민식 선생이 끔찍히 사랑했던 딸 유경(51·왼쪽) 씨가 열 살 무렵인 1970년 부인 박정남 씨의 모습. 최민식 선생이 직접 카메라에 담은 몇 안 되는 가족사진이다. |
- 소작농부가 되기 싫어서
- 미술공부도 하고 싶어서
- 그는 무작정 상경했다
- 성당의 예쁜 성가대 아가씨와
- 결혼해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 두 아이가 태어났고
- 여전히 많이 가난했지만
- 그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 일본으로 밀항했다
-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
- 그때부터 마지막까지 가족은
- 위대한 다큐사진가 최민식의
- 위대한 후원자였다
■한국전쟁 중 부인과의 운명적 만남
최민식의 어린시절과 성장과정, 가족사 등은 단편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최민식은 지난 2월 타계하기 전까지 자신의 내밀한 가족사 등을 소상히 드러내놓지 않았다. 평생 카메라를 메고 살면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미안함, 사진작가는 사진으로 말한다는 그의 신조와 철학의 일단을 엿보게 하기도 한다.
기자는 최근 세차례 장남 유도(60) 씨와 미망인 박정남(81) 여사를 만나 최민식의 성장과정과 가족사를 들었다. 그의 성장과정과 가족사는 최민식의 예술혼과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을 알 수 있었다.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최민식은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식구들의 양식도 안 되는 농사일이 싫었다. 최민식은 19살인 1947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온가족이 매달려도 지주로부터 소작으로 받은 수확은 식구들이 7개월만 먹으면 바닥나기 일쑤여서, 입도 덜고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던 그림공부할 길이 열릴 듯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최민식은 일단 과자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용산의 작은 미술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인쇄소 문선공, 군고구마 장사, 지게꾼 같은 막노동도 닥치는대로 했다. 그러다 6·25 전쟁이 났다. 먹고 살 길이 마땅찮아 차라리 군에 입대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지원했다. 지원하는 바람에 미 10사단 소속 병참단에 배치됐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그가 속한 부대는 전남 순천까지 후퇴한다. 부모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믿었던 최민식은 전시였지만 성당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순천의 성당에서 네살 아래인 부인 박정남(81)과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예쁘장한 아가씨가 최민식의 마음을 흔들었다. 청년의 가슴에 연정이 불타올랐다. 성당 행사가 끝난 어느날 미리 알아뒀던 집을 찾아가 청혼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최민식의 나이 24살 때 결혼한다. 그러나 휴전과 동시에 그는 제대를 선택한다. 손위 처남이 부산에 살고 있어 최민식은 부산으로 살림을 옮긴다. 부산에 처음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동구 범일동 옛 보림극장 뒷편 산복도로 입구였다. '부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밀항과 스타인켄과의'위대한' 조우
최민식의 부산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1955년 그림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행 배를 탄다. 밀항이었다. 그때 최민식에게는 두 살 터울인 두 아들(장남 유도 씨와 차남 유진 씨)을 두고 있었다.
전쟁 직후 궁핍한 시기, 그것도 결혼한 지 3년 만에 두 아들을 둔 가장이 그림공부를 하겠다고 일본으로 밀항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반대하며 눈물로 밤을 지샜을 법도 한데….
지난 8일 기자와 만나 58년 전 그 때를 잠시 회상하던 미망인의 대답은 '놀랍게도' 간단했다. "반대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워낙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틈만 나면 종이에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에 안목이 없는 제가 봐도 잘 그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토록 좋아하고, 그림공부를 하고 싶다는데 말리거나 반대할 일이 아니죠."
형편이 괜찮던 손위 처남에게 얼마간의 돈을 융통해 1955년 9월 일본으로 떠나 도쿄에 정착했다. 최민식은 도쿄의 일본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그림공부였다. 희열 그 자체였다. 돈이 필요해 낮에는 고물수집 등 허드렛일을 했다. 당시 일본은 고물수집 벌이가 괜찮았다. 학비도 벌고 용돈도 좀 생기자 최민식은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일제 중고카메라도 한 대 샀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던 그는 헌책방을 돌며 책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1957년 어느 날, 헌책방에서 최민식은 인생을 바꾼 책 한 권을 발견한다.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인켄(Edward Steichen·1879~1973)의 사진집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 죽는 인간사를 영상언어로 보여주는 책이다. 그는 전율했다. 최민식은 타계하기 8개월전 기자에게 당시 상황을 이렇게 털어놨다. "그때 받았던 감동은 지금 되새겨봐도 너무나 생생하기만 하다. 사진가에 의해 포착된 삶의 핵심적 순간들이, 사진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사진이 이렇게 울림이 큰 것이라면, 그림보다 사진을 하고 싶었다."
그림공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감행한 밀항지 일본에서 최민식은 스타인켄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항로를 그림에서 사진으로 '대전환'을 하게 된다. 최민식이 '인생을 바꾼 순간'이었으며, 그의 다큐 사진작가의 길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가족이야"
1970년대 초반 무렵 최민식 선생이 부인과 함께 부산 범어사를 찾았던 모습. 최민식 선생 가족 제공 |
다큐 사진의 거장 최민식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최민식은 평생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이 미망인 정남 씨와 장남 유도 씨의 공통된 의견이다.
사진은 한만디로 돈이 안 된다. '쌀을 사 놓으면 필름이 떨어지고 필름을 장만하면 연탄이 떨어지는' 가난 속에서 최민식은 가족을 제대로 근사하지 못했다는 생활인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했으리라. 미망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분 사진일로는 생활이 안 되니, 제가 아녀자로서 안해보본 것이 없죠. 돈이 없어 쌀도 한 대씩 팔았죠." 최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은 결코 웃어 넘길 수 없는 일화 한토막. "둘째(유진 씨)가 취직을 해 첫 월급으로 카메라를 한 대 샀어요. 그랬더니 제 엄마가 '너도 아버지처럼 가난뱅이 될려고 하나'라며 카메라를 뺏어 숨겨버렸어요."
'돈 안 되는' 사진을 찍는 최민식이 사진 외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며 가족과 살림을 책임진 미망인과 반듯한 생활인으로 자라 준 자녀들이야말로 최민식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태산같은 지지자였던 셈이다.
기자와 함께 최민식의 가족과 만난 이언오 부산발전연구원 원장은 "가난은 범보다 무섭다는데,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가족의 헌신과 희생이 오늘의 최민식 선생을 있게 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 장남 최유도 씨 인터뷰
- "최민식 사진상 등 추모사업 감사…생가 보존 원한다면 적극 협조"
최민식 선생의 장남 유도 씨가 아버지가 사진작가로 인생항로를 바꾼 계기가 된 스타인켄의 '인간가족' 사진집을 보여 주고 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
최민식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6개월이 됐다. 세계적 다큐 사진작가였던 아버지를 여읜 장남 유도(60) 씨는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가 평생 추구한 예술혼과 작가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오래 살아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망을 피력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최민식 선생이 사용하던 방에 와 보니 평소 메고 다녔던 카메라와 손때묻은 책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고령이었지만 건강하셨던 터라 그렇게 급작스레 돌아가실줄 정말 몰랐다. 지난해 12월 부산대병원에 입원하기 불과 한 달 전까지도 작품활동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령에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많이 걸었던 것이 신체에 무리를 준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굉장히 충격을 받으셔서 집을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께서 한마디로 반대하셨다. 어머니가 계실 동안에는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방을 그대로 보존할 생각이다. 혹시 뜻있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이 생가를 보존하겠다고 한다면 흔쾌히 응할 생각이다. 어머니도 저와 같은 생각이다.
-가족으로서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를 평가한다면.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의 일상을 55년 동안 카메라에 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쳇말로 돈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서슬퍼런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만 봐도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평생 한 주제에 매달린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한없이 존경하고 있다.
-선생 타계 후 '최민식 사진상'을 제정하는 등 추모사업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협성문화재단과 국제신문사가 공동으로 최민식 사진상을 제정해줘 정말 감개무량하다.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게되면 저승에서라도 기뻐하실 것이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다큐 사진의 영역을 개척하고 평생 외길을 걸은 아버지의 예술혼과 치열한 작가정신이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 공동기획: 재단법인 협성문화재단,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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