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0-3> [新 강서별곡]- 마지막 숨바꼭질 : 대저 '적산 가옥'
언니, 나는 압니다!~ 그때 미우라 상이 빼앗고 유린한 것은
달고 좋은 대저배를 끝없이 만들어내던 강서의 드넓은 땅, 그뿐이 아님을요...
부산 강서구 대저1동에 남아 있는 일제시대 적산가옥. 전체 6~7채가 남아 있으며 대부분 사람이 살고 있으나 일부는 폐가 형태로 방치돼 있다. |
언니가 이불 밑에 숨겨둔 돌멩이를 보았습니다
그 돌은 마치 잘 다듬어진 석기시대의 돌칼 같았죠
어느 밤 다시 찾아갔을때
언니는 나를 보고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는 돌멩이가…
순간, 나는 직감했습니다
# 언니. 나도 이제 칠성판 질 때가 됐나봅니다.
요즘엔 옛날 일이 자꾸 떠오르고 사나운 꿈마저 꾸어대니 말입니다.
간밤엔 무슨 꿈을 꿨는지 아세요?
세상에, 참말로 해괴망측한 꿈도 다 있지요.
아, 글쎄 입에서 자꾸 뼈가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손으로 뼈를 빼내면 또 뼈가 나오고 그걸 다시 빼내면 또 나오고.
정말 끝도 없이 뼈가 쏟아져 몸의 뼈란 뼈는 죄다 입으로 빠져나오는 줄 알았어요.
난 너무 무서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요.
그런데 거기가 어딘 줄 아세요?
바로 언니가 살던 미우라 상의 배나무 과수원이었답니다.
과수원은 때마침 봄을 맞아 희디흰 배꽃이 만발했더군요.
언니도 알다시피 이곳 일대는 죄다 배나무 과수원이 있었잖아요?
봄이면 설경처럼 펼쳐지는 배꽃의 장관이 너무 좋아
멀리 가마야마(부산)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까지 구경하러 몰려왔구요.
눈앞에 하얀 배꽃이 필 때만큼은 우리같이 궁벽하게 사는 사람들조차
코딱지만 한 채마밭을 일구다가 눈길을 과수원 쪽으로 내몰곤 했죠.
언니가 일하던 미우라 상의 과수원은 이곳 일대에서 제일 규모가 컸어요.
제일, 제이, 제삼 과수원을 경영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양반이니 저택의 크기도 근동에서도 돋보였습니다.
우람한 금강송으로 지은 그 저택을 우리는 목조탑처럼 우러러보곤 했구요.
그런 양반이 성질은 왜 그리 괴팍하던지.
언니도 미우라 상을 '미워라 썅, 미워라 썅'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니 아이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런 미우라 상의 과수원에 내가 와 있으니 더럭 겁이 났습니다.
후다닥, 과수원을 빠져나와 '덕다리'로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덕다리라는 옛마을 이름을 모처럼 입에 올리니 언니가 웃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언니는, 다리도 없는데 무슨 마을 이름이 덕다리냐며 깔깔거렸죠.
하긴 언니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웃음이 난 건 당연했는지 몰라요.
그 바람에 나는 어른들에게서 들은 지명의 유래를 그대로 언니에게 들려주어야 했지요.
덕다리는 원래 '덕닿이'였다, 덕닿이는 '나룻배가 닿는 둔덕'이란 뜻인데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면서 덕두리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아마 그게 빌미가 되어 나는 꽤 오랫동안 '큰 물가의 모래섬'이 대저도가 된 내력이며
미우라와 같은 일본인이 우리 노전(蘆田)을 차지한 것까지 얘기하게 되었을 겁니다.
대저1동의 적산가옥 중 '낙동강 식당'으로 활용되고 있는 곳. 보존 가치가 높아 부산시가 근대건조물로 지정했다. 홍영현 기자 hongyh@kookje.co.kr |
# 언니.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 또한 미우라 상과 같은 일본인만 오지 않았다면
불행이란 단어는 모르고 살았을 겁니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비록 가난했지만 그건 조금 불편했지
억울한 것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언니도 들어봤잖아요, '동척'이라고. 내가 태어나기 이십여 년 전에,
한일합작으로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우리의 식산산업의 융성을
빌미로 이곳의 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개발하기 시작했다더군요.
정지한 땅은 일본인들에게 싸게 불하되었구요.
일본의 농부들은 이곳으로 몰려와 살 집을 짓고 배나무를 심은 거지요.
처음 그들이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잘 교육받은 사람처럼 친절했답니다.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실거리며 무슨 말이든 하이, 하이 하며 웃어대면서.
그러던 그들이 강제합병이 되자 조선인을 소 닭 보듯 하면서 나머지 삼각주마저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땅을 개발할수록 일본인들의 수도 늘어났습니다.
일본인들은 구포다리를 놓고 강의 입구에 수문까지 만들어 거대한 강줄기마저 틀어버렸지요.
본류였던 서낙동강은 그렇게 해서 수문에 갇힌 처지가 되었고, 감동진(구포의 옛 지명)까지 오가던
아버지의 나룻배 또한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한숨도 눈치 채지 못하고 어린 나는 큰 구경거리를 만난 듯 다리와 수문 근처만 싸돌아다녔죠.
아마 그때쯤 언니를 만났을 겁니다.
언니는 미우라 집의 부엌데기가 된 것만 해도 대단한 행운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지요.
하지만 그런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미우라 상은 욕심이 대단한 양반이었습니다.
온종일 과수원에 서서 '빨리빨리'와 '어서어서'를 외치며 일꾼들을 닦달해댔지요.
용케 그 조선말만은 익혀서 말입니다.
썩은 배라도 입에 대는 날에는 배 값을 그대로 품삯에서 제해버리기도 했지요.
그렇게 채근해서 수확한 배들은 구루마에 실어 구포역으로 가져갔습니다.
언니도 알다시피 이곳의 배는 정말 인기가 많았잖아요?
그들이 개발했다는 신품종 신고배는 맛이 시원하고 달았으며 크기 또한 조선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달려들 수밖에요. '구포배'로 불린 이곳의 배는 경성이며 중국, 일본에까지 팔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조선인 일꾼들은 '대저배'가 구포배로 불리는 걸 섭섭하게 생각했어요.
어쩌면 그렇게 바꿔 부른 건 일본인들의 교묘한 상술 때문일 거라고요.
대저배라고 부르면 일본인들이 생산한 배라는 게 알려지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레 반일감정 때문에
팔리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미우라 상은 노회했습니다.
가을에 수확한 배를 한꺼번에 시장에 내다팔지 않았으니까요.
자신의 집 마당에 깊고 큼직한 지하 창고를 차곡차곡 저장해놓고 한겨울부터 봄까지 비싼 값에 내다팔아
재미를 보았지요.
그런 미우라 상이지만 목욕까지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언니는 우리 집으로 놀러오곤 했습니다. 언니와 내가 밤새도록 깔깔거리다가 보면 어느새 사방이 훤히 밝아올 정도였지요.
언니의 얘기 솜씨는 얼마나 맛깔스러운지.
얘기를 들으려 부러 난 강둑까지 마중 나가 언니를 기다리곤 했지요.
그때 언니에게 들은 얘기가 잊히지 않아요.
특히 맛도 없는 왜간장에 조선인까지 미쳐 날뛴다는 얘기는 더더욱.
산송장이 된 지금에야 언니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드네요.
공장에서 한꺼번에 만들어낸 왜간장이 집장만 할 수가 있겠어요?
집집마다 음식 맛이 다른 건 바로 각자 집에서 만든 집장의 차이 때문인데
다들 집장 대신 왜간장만 사서 먹으니 음식 맛이 같아질 수밖에요.
그렇게 말솜씨가 좋았던 언니가 말문을 닫았습니다.
나야 뭐 일이 힘들어 그렇겠거니 하고 말았지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날,
언니의 얘기를 듣고서는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언니는 허겁지겁 내 방으로 달려 들어와 모둠숨을 내쉬었지요.
내가 무슨 일인지 캐물어도 언니는 쉬 입을 열지 않더군요.
몇 번이나 닦달을 하자 언니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어요.
'미워라 썅'을 죽이고 싶다고.
전 알고 있었습니다.
미우라 상의 알몸을 언니가 비누칠로 일일이 씻겨준다는 소문이 이미 마을에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언니의 가슴을 과일 꼭지 따듯 하는 건 시간문제였겠죠.
언니. 그제야 난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가 점점 처녀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요.
언젠가 봉긋하게 솟기 시작한 가슴이 신기해 내가 만지려고 하자 언니가 말했었죠.
갈대가 스쳐도 아파서 미칠 지경이라구요.
그땐 몰랐습니다.
가슴앓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픈 지를.
그렇게 작은 가슴을 탐하는 미우라를 언니야말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갈 곳이 없었고 떠나면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가슴만 만지는 일만 아니면 이곳보다 좋은 곳이 없다고, 그러니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면서
언니가 힘없이 말할 때에는 눈치 없이 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더군요.
언니는 내게 오는 발길마저 툭 끊고 말았습니다.
농한기인 겨울이라 그다지 할 일도 없었기에 언니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언니에게 찾아갔을 겁니다.
미우라의 저택 옆에 선 허름한 별채의 방문을 두드리자 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겨주었죠.
난 그제야 미우라가 언니의 밤마실을 금지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의 방에 있는 돌멩이도 그때 처음 보았구요.
그 돌은 마치 잘 다듬어진 신석기시대의 돌칼 같았습니다.
언니가 돌을 이불 밑에 숨기며 얼버무렸죠.
그냥 혹시 싶어 가져다놓았을 뿐이라구요.
하지만 언니를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나 또한 아버지 때문에 고삐가 꿰인 송아지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하긴 낙동장교 때문에 밤에도 사람들의 그림자가 끊기는 법이 없으니 여식이 걱정이었겠죠.
강 건너 사람들은 야밤에도 대저로 몰려와 횃불을 들고 참게를 잡거나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가곤 했습니다. 자연스레 인근 과수원 쓰리도 빈번하게 일어나 일본 순사들의 순찰도 강화된 상태였거든요.
집에 갇혀 보내는 겨울밤은 무척 길었습니다.
그날따라 일찌감치 잠자리에 누웠어요.
그런데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
이불이 가슴에 닿을 때마다 화들짝 놀랄 잠이 깨곤 했습니다.
나 또한 언니처럼 가슴앓이를 하는 중이라 언니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몰래 방을 빠져나오고야 말았습니다.
겨울바람은 몹시 차더군요.
거침없이 달려드는 강바람이 얼굴을 칠 때마다 마치 칼날로 쓰윽 베는 듯했습니다.
언니의 방 앞에서 조용히 언니를 불렀습니다.
언니는 일찌감치 잠들었는지 기척이 없더군요.
돌아갈까 할 즈음 방문이 열렸습니다.
언니는 나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언니의 손에는 돌멩이가 쥐어져 있더군요.
순간, 난 직감했습니다.
언니의 치마에 묻은 얼룩은 생리혈이 아니었습니다.
상처가 났을 때 살결에서 터져 나오는 그런 선홍빛 핏방울이었습니다.
# 언니. 지금도 언니의 헝클어진 머리칼이며 넋이 빠져나간 듯한 멍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몸마저 유린당했으니 어찌 그곳에 살 수 있겠어요?
나라도 언니처럼 뛰쳐나갔을 겁니다.
며칠 뒤 일본 순사들이 나를 찾아왔어요.
언니의 종적을 대라더군요.
미우라 상의 장롱에 있던 돈을 죄다 훔쳐 도망갔다고.
하지만 난 미우라 씨가 밤마다 언니를 괴롭혀 나간 것이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그들이 너무너무 무서웠거든요.
이상섭 소설가 |
언니. 언니는 어디로 갔나요?
언니가 혹시 나타날까봐 지금도 이렇게 가끔 밖으로 나서곤 한답니다.
오늘은 유모차에 의지해 기어이 미우라의 저택까지 오고 말았네요.
이곳도 엄청 변했답니다.
그 많던 배나무들은 사라지고 건물들이 들어서서 적산가옥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니까요.
미우라는 과수원을 헐값에 넘기고 도망치듯 제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언니는 소식조차 없더군요.
언니의 삼촌인가 하는 양반이 언니를 찾아왔으니 고향에 간 것도 아니라면 언니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언니. 내가 미욱한 년은 미욱한 년인가 봅니다.
어젯밤 꿈을 통해서야 언니가 어디 있는지 알아챘으니 말이죠.
언니는 처음부터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몸이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 번도 날 찾아오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미우라는 자신의 죄를 숨기려 아주 깊은 곳에 언니를 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은 내가 쓰러지더라도 과수원 일대를 샅샅이 뒤져볼 작정입니다.
혹시 압니까, 억울해 삭지 못한 언니의 뼈마디 하나가 오늘 고개를 내밀지.
# 취재 후기
- 일본인에게 싸게 불하돼 과수원으로 개발된 대저
- 배나무는 다 베어졌지만 그들 살던 가옥은 남았다
대저에는 무덤이 없다.
삼각주의 모래땅이라 묘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무덤도 들어설 수 없는 이곳에 개발의 삽날이 내리꽂힌 것은 1908년.
그러니까 강제합병 두 해 전부터다.
'동척'에 의해 개발된 땅은 일본인들에게 싸게 불하된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이 대거 이곳에 몰려오게 된 것이다.
특히 지대가 높은 지금의 출두리 지역은 배를 재배하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던 그들은 제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귀국선을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재배하던 배나무들은 사라졌다.
수령이 많아 채산성이 떨어져 죄다 베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살던 적산가옥(사진)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취재를 위해 대저수문을 지나 출두리 일대를 답사하던 중,
적산가옥 앞의 허름한 시멘트 구조물을 발견했다.
궁금해서 집 주인에게 물으니 과수원에서 사용했던 수확한 배를
보관하던 저장고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상상력은 가동을 시작했다.
어쩌면 저 창고에 묻히듯 저장된 것이 배뿐만이 아닐 거라고.
저것이 이곳의 한이 서린 역사의 또 다른 무덤일지 모른다고.
그렇게 나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상섭 소설가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강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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