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0-4> [新 강서별곡]- '외양포' 포진지에서 피어난 우정(팩션)
"좋은 세상이 오면 열자"…등대지기 아들과 日 소년병은 동백나무 아래 그들의 꿈을 간직했다
1900년초 일본이 구축한 부산 가덕도의 외양포 포진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 그 흔적과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전쟁 역사 관광, 즉 다크 투어리즘의 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
세상에 대한 호기심 많은 가덕도 소년 '김봉수'
포진지 보초를 서지만 화가가 꿈인 '야마와키'
일본 군인들의 눈을 피해 우정을 나누었지만
전쟁은 그들의 생전 재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아들들이 나무 밑에서 꺼낸 것은
대양을 항해하고 싶은 소망 담은 작은 나무배
이국에서 만난 친구의 환한 얼굴 그린 초상화
1.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에 가려진 바다.
등대지기 아버지를 따라 나선 봉수는 오늘도 애꿎은 날씨만 탓하며
먼 바다 건너 가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을 동경하며 생각에 잠겼다.
"니는 오늘도 그리 누워 바다만 보는기가. 마을에는 숭어철이라 한창 바쁠낀데 얼릉 가서 일손도 좀 돕고 해라. 그 바다 너머 뭐가 있다고 그리 봐 샀노."
봉수의 아버지는 가덕도 토박이로 1909년 12월 가덕도 등대가 완공된 날부터 등대지기로 일했다.
가덕도 등대가 비록 일본인들의 압력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봉수 아버지는 뱃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등대지기 일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다.
1904년 일본군들이 외양포에 들어와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포진지를 구축하기 전까지 봉수 가족은
외양포의 여느 가족들처럼 바다에 나가 고기잡고 텃밭을 일구며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고개만 넘으면 봉수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인데 이제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봉수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등대에 오를 때마다 암고양이마냥 음흉하게 웅크리고 있는 포진지를 지나갔다.
포진지 능선에는 적을 탐지할 수 있는 포대관측소가 있고, 포진지에는 일본군 막사와 포탄저장고, 무시무시한
감옥, 마을중앙에는 공동우물과 그들의 대장 관사가 있다고 했다.
포진지가 너무나 궁금했던 봉수는 등대 가는 길 높은 산마루에서 습관적으로 포진지 쪽을 내려다 보았지만
철저하게 위장된 포진지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가 어떤 곳인데, 이순신 장군님이 부산포 해전을 진두지휘했던 자리에 왜놈들이 저들 맘대로 들어와
저리 버티고 있는건지…."
포진지를 생각할 때마다 봉수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 태어난 봉수는 조선의 억압된 현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바다 멀리 세상이 궁금해 등탑에 올라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바다 건너 일본이란 나라가
궁금하기만 했다.
2.
1909년 점등된 가덕도 등대는 우리 국토 동남단의 보루로서 파란만장한 역사와 사연을 품고 있다. |
어느날 호기가 발동해 봉수는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가까운
포진지 길로 갔다.
"일본놈들도 사람인데 뭐 날 잡아먹기라도 할끼가."
놀랍게도 초소에는 또래의 소년병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큰 군복을 몇 번을 접어 입은 소년병의 모습이 우스꽝
스러웠다.
보초를 서고 있던 소년병은 예상치 않은 봉수의 접근에 당황했다.
"너, 넌, 누구야? 이쪽으로 다니면 안 된다는 거 몰라?"
더듬거리는 우리말이었지만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 우리말도 할 줄 아네. 난 김봉수. 울 아버지가 저기 등대에 있어.
근데 니 이름이 뭐야? 너 옷이 너무 크구나."
1935년 세찬 바닷바람이 불던 겨울 어느 날, 15살 어린 나이에 전쟁에
동원되어 조선의 이름 모를 섬에 도착한 일본의 소년병의 이름은
'야마와키'.
그는 임진왜란의 전초기지였던 가라쓰(唐津) 출신이었다.
조선인들은 세계 정복을 위한 도구일뿐이라는 교육을 받았던 야마와키였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봉수를 보자 순간 경계가 풀렸다.
자신의 마음을 들킬세라 야마와키는 서둘러 봉수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통과를 허가했다.
봉수는 침략의 야욕에 불타는 군인들 속에서 또래를 만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다음에도 이 길로 와야겠다 생각했다.
이듬해 어느 봄날, 봉수는 대장의 숭어회 심부름을 나온 소년병을 다시 만났다.
둘은 다소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소년병이 기다렸다는듯 말을 걸었다.
"난 야마와키, 15살이야. 이제는 옷이 많이 크지 않아."
그날 이후 봉수와 야마와키는 친구라도 되는양 어른들의 눈을 피해 가끔씩 만났다.
봉수와 야마와키는 서로 모르는 말을 배워가며 새바지로 나가 수영을 하고,
동백군락지에 누워 야마와키의 고향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우정을 쌓았다.
한달쯤 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등대로 오르던 봉수는 경계가 가장 삼엄한 산 중턱 포진지 관측소
뒷길로 돌아가다 초병에게 발각되었다.
그곳엔 야마와키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야마와키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무서운 인상을 한 일본군이 봉수의 무릎을 강제로 꿇리며
개머리판으로 봉수의 머리를 내리쳤다.
뜨거운 피 한 줄기가 봉수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놀란 야마와키는 고참 초병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봉수를 부축해 등대로 뛰었다.
피 범벅이 된 봉수를 본 아버지는 순간적인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일본군 복장을 한 야마와키를 심하게
내동댕이쳤다.
봉수가 가로막고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봉수의 상처가 아물고 한참이 지난 뒤 야마와키가 외출 허락을 얻어 찾아왔다.
야마와키는 지난 번 일로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봉수와 야먀와키는 고개 넘어 새바지로 갔다.
푸른 바다에 숭어가 뛰고 있었다.
동심으로 돌아간 두 소년의 마음도 오랜만에 힘찬 숭어의 기운을 받아 펄떡이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 해안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봉수와 야마와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총을 든 일본군들 뒤쪽으로 예전에 보지 못한 동굴이 조성되고 있었다.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힘겹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저게 뭐지? 언제 생겼지? 저 사람들은 또…."
"봉수야, 이곳은 위험해.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아."
긴장한 야먀와키는 서둘러 자리를 뜨면서 조용히 일러주었다.
"저건 공습 대피용 동굴이야. 강원도에서 광부들을 데려와 동굴을 파고 있어."
지치고 힘든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군들을 보면서 봉수와 야마와키는 새삼 조선인과 일본인, 피침략자와
침략자의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봉수는 일본군은 물론 야마와키까지 원망스러웠지만 미안해하는 야마와키를 보곤 살포시 손을 잡아 주었다.
"야, 미안해 하지마라. 니가 그런 거 아이다. 나쁜 어른들이 그런 거 아이가. 니는 어른 되면 그라지 마라."
3.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난번 해안 동굴가에 갔던 게 문제가 돼 혼났어."
야윈 모습으로 나타난 야마와키가 최근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얘기를 들은 봉수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그때 야마와키가 본국 귀환 통보 사실을 전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몇일 전, 봉수와 야마와키는 가덕도에서 함께 한 추억을 새긴 서로의 선물을
큰 동백나무 아래에 묻고, 전쟁이 끝나면 개봉해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힘센 자가 살아남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고,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가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해 조선에서 물러났지만 친구 야마와키는 오래도록 연락이 없었다.
"전쟁 끝나면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와 이리 소식이 없노."
가덕도를 떠나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야마와키는 격전지 코레히도르 섬에서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 죽어가는 전우들 틈에서 야마와키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후 야마와키는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아들에게 어릴 적 가덕도의 추억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만약 좋은 세상이 오면 자기 대신 꼭 가덕도를 찾아가 보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봉수는 일본군이 떠난 텅 빈 외양포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가덕도 등대를 지켰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야마와키가 찾아올 것이라 믿으며 아들 민국에게 일본군 소년병과의 우정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해 주었다.
"전쟁 끝나면 한번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와 이리 소식이 없노…."
해마다 동백이 필 때면 등대 마당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봉수는
동백꽃이 다 떨어져버린 어느 봄날 조용히 눈을 감았다.
4.
민국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새 등대에 남아 아버지의 소년병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부산과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가 건설되고, 봉수와 야마와키가 우정을 나누며 만났던 봄날
숭어잡이 철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축제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가덕도로 몰려왔다.
어느 날 일본에서 중년의 관광객이 가덕도를 찾아왔다.
그 신사는 서툰 한국어로 가덕도 등대 방문을 희망했지만 사전허가 없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몹시 실망한 듯 등대 앞 초소에서 애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국이 다가가 사연을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봉수가 그토록 기다렸던 야마와키의 아들이었다.
열다섯 살 섬마을 소년과 소년병의 우정을 잊지 않고 찾아온 아들 유스케에게 감동받은 민국은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자신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유스케는 조선인과의 옛 추억이 담긴 동백나무 이야기를 들었다며 함께 가볼 것을 청했다.
민국이 유스케를 안내했다.
민국과 유스케는 부모님의 추억이 담긴 동백나무 아래 선물상자를 파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곳엔 작은 상자 두 개가 묻혀 있었다.
한 상자에는 먼 바다로 나가고 싶어했던 봉수가 직접 만든 작은 나무 배가 나왔다.
또 다른 상자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야마와키가 환하게 웃고 있는 봉수를 그린
엽서가 들어 있었다.
민국과 유스케는 부모님이 들려준 외양포에서의 만남과 우정을 주섬주섬 이야기하며
부모님이 다닌 새바지며 등대길, 외양포 바닷가를 둘러보며 두 손을 꼭 잡았다.
백경옥 '예술에의 초대' 편집장
# 외양포 포진지는 어떤 곳
거가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가덕도(사진)는 가깝고도 먼 부산 속의
오지였다.
신공항 최적지로 가덕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우리가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가덕도의 역사성과 때묻지 않은 자연 경관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가덕도 대항마을 인근에 위치한 외양포 포진지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4사단 휘하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으로, 사실상 일본의 대륙침략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토성을 쌓듯 제방을 5m 높이로 돌아가며 쌓아올려 얼핏 보면 작은 언덕처럼 보인다.
포진지 입구에는 '사령부발상지지'라는 요새 사령부 건립비가 서 있다.
ㄱ자로 꺾어 들어가면 콘크리트 돔형 구조물과 방호물이 나온다.
외양포마을은 100여년 전 세월이 그대로 멈춰 있다.
포진지에는 발사대터와 탄약고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포진지 아래 마을에는 일본군 막사와 무기고, 군인들이 쓰던 우물과 22채의 집이 일제 강점기 요새사령부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선사시대부터 임진왜란, 일제강점기까지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는 가덕도는 거가대교 건설로 교통이 좋아지면서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전쟁 테마 여행지로, 힐링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강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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