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0-5> [新 강서별곡]- 칠점산의 선녀, '칠점선' 이야기(역사 판타지)
이성계라 불리는 참시선인, 인간계로 도망간 나의 낭군
어여쁜 기생으로 화해서라도 반드시 그 마음을 잡을테다
- 칠점산 일곱 봉우리에
- 매일 기도를 드렸더니
- 눈코입이 일월같은
- 예쁜 딸이 태어났소…
- 마마, 칠점선이란 기생이
- 김해부에 있사온데
- 거문고를 한 번 타면
- 온갖 새가 몰려든답니다
- 또한 한 번 동침만 해도
- 화살이 비껴간다 하옵니다
※ 거문고는 백악지수(百樂之修)라 하여 선비들의 수양 도구였으며, 현학금(玄鶴琴),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우주 원리와 철학을 담은 거문고의 6줄은 왕을 상징하는 대현(大絃)을 중심으로 유현(遊絃)이 있고, 문무백관인 문현(文絃)과 무현(武絃)이 있으며, 괘상청은 하늘(天), 괘하청은 땅(地)을 상징한다.
# 1
1970년대 칠점산이 군부대에 편입되기 전의 전경. 훼손돼 가는 칠점산과 옛 평강초등학교가 보인다. 강서문화원 제공 |
칠점산(七點山), 삼차수(三叉水), 넓은 강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어디선가 천상의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로 타다다, 무언가 급하게 뛰어가는 소리.
칠점산 중턱에 하얀 물체가 움직인다.
왜소한 체격, 산발한 흰 머리카락, 구겨지고 묵은 때가 낀 흰 옷, 얼굴에는 고동 껍질 같이 엎어져 있는 여러 개의 점에서 까만 털이 뻗쳐 나온,
개성있게 못생긴 할매(인간계 칠점선)가 보인다.
칠점산의 여자 신령이다.
- 오, 내 사랑, 참시!
할매가 달려가는 곳으로 참시선인(旵
始仙人, 인간계 이성계)의 집이 보인다.
문 앞에서 끼익-, 급정지 하는 할매, 구겨진 옷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펴보고, 산발한 머리카락도 침발라
슥슥 문질러 눕힌다.
그때, 집 안에서 화다닥 번개처럼 뛰쳐나오는 참시선인, 할매를 흘낏 보더니 줄행랑친다.
번개처럼 따라잡는 할매, 참시선인의 목덜미를 확, 낚아채려는 순간, 뿅! 소리와 함께 참시선인이 사라진다.
참시선인이 사라진 자리에 동그랗게 신선계와 인간계의 공기가 섞인 파문이 인다.
- 이기 뭐꼬, 이기이기이기…. 야아-! 날 피해 인간계로 도망갔다 말이가.
으아~ 날 이렇게 처녀로 늙힌 것도 모자라서! 니는 내가 점찍은 내 신랑이란 말이다!
할매, 얼굴의 까만 털들이 분기탱천 뻗친다.
코에서 허연 콧김이 소리도 요란하게 '풍풍' 뿜어져 나온다.
# 2
강서구 대저1동에 세워진 칠점산 기념비. |
콰르르르-, 번쩍!~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친다.
칠점산 아래 외딴집에 사는 김아무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이고, 참말로 날도 궂데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웬 천둥번개고?
신령님, 노하셨나?
아고, 안되는데, 알라 곧 태어날낀데 이리 날이 궂어가 우짜꼬.'
타닥타닥, 장작불이 훨훨 타오르는 아궁이에 올라탄 가마솥에서 뜨거운 김이 푹푹 솟아난다.
- 칠점산 신령님요. 노하지 마소. 오늘 우리집에 알라가 날라는갑소.
아들래미거든 공부 잘해 가문의 영광이 되는 눔으로, 가시나거든 이쁘고 손끝 야무진 눔으로 태어나게 해 주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도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더니 할매의 귀에 날아와 박힌다.
'아하',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할매, 확대된 동공에 참시선인의 거문고가 비친다.
- 그렇게 좋아하는 거문고를 놔두고 가다니! 하등한 인간보다 내 얼굴이 더 싫단 말이지.
이뿐 것들만 좋아하는 지랄맞은 세상!
손가락으로 셈을 해 보는 할매, 하나, 둘, 셋 손가락 세 개가 접혀진다.
- 참시가 도망친지 3분, 여기 1분이 인간 세상 10년이니 우후후후, 선계의 물건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했으니
벌써 이곳의 기억은 다 잊어버렸겠군. 그래, 좋아, 감 잡았어. 낄낄낄… 킥킥킥….
낄낄길… 끽끽끽…. 어디선가 새소리 들리고 수풀 사이에서 화살이 튀어오른다.
화살을 맞은 새 한 마리, 툭, 땅으로 떨어진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 들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이성계, 32세, 신선계 참시선인)가 나타난다.
남자, 주둥이에 화살이 박힌 새를 바라보며 귀를 후벼판다.
- 허, 고것 참, 못생긴게 시끄럽더니 이제 조용하네.
- 요것만 있으면 널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래~, 니~만 가나. 나~도 간다.
할매, 결심한 듯 거문고를 마주보게 세우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성스럽게 거문고를 감싸 가슴에 안는 할매, 거문고와 합체되기 시작한다.
거문고의 형체가 점점 옅어진다.
잠시 후 마지막 남은 거문고의 형체가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드디어 할매의 몸에 봉인된다.
할매의 정수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밝은 은빛! 빛이 온 몸을 훑는다.
빛 속에서 추녀 할매는 샤라라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한다.
# 3
1365년 9월(공민왕 15년).
하늘이 거짓말처럼 다시 맑아졌다.
'참말로, 내 기도를 들었던가배'.
김아무개, 하늘을 쳐다보며 고개를 설설 흔든다.
그때 '응애, 응애~'
첫 세상을 흔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 딸(신선계 할매, 인간계 칠점선)이오, 얼마나 이쁜지, 눈 코 입이 일월(日月)같어.
문이 벌컥 열리며, 산파인 개똥 할매가 합죽한 입으로 말한다.
김아무개, 입이 귀에 걸린다.
- 매일 매일 칠점산 일곱 봉우리를 보며 기도를 드렸더니 칠점산 신령님이 점지해 주셨는갑소.
1381년 4월(우왕 7년).
김해부 교방청,
한 밤중, 묵직하게 튕기는 저음과 여린 잔가락의 거문고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다 뚝, 갑자기 멎는다.
- 아니되옵니다.
칠점선, 옷고름 위로 올라온 남질의 손을 싸악, 밀어낸다.
온 몸이 달아 오른 남질, 급하다.
- 소원이 뭐냐. 내, 너, 너 원하는 대로 다해 주마.
- 개경으로 데려가 주세요.
흠칫하는 남질. 호랑이 같은 마누라 얼굴이 번쩍 떠오른다.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 아니, 그것 말고 다른 소원을 말하여라. 개경에 가면 낯도 설고 물도 설텐데… 그냥 여기 있는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은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칠점선의 손이 남질의 옷섶을 헤치고 푹- 깊숙한 곳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웁~!' 숨이 턱 막히는 남질.
- 어찌 하시렵니까.
녹아내릴 듯 아름다운 얼굴이 남질의 얼굴에 바짝 다가와 재촉한다.
- 오냐, 오냐. 알았다. 제발 나 좀 살려다오. 제발…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다오.
남질의 신음소리가 방문 틈새로 삐져나온다.
바깥 어둠 속, 여기저기 숨어 있던 동네 남정네들, 신음소리 따라 몸이 비틀리며 자지러진다.
다음 날, 하룻밤 사이에 10년은 더 젊어진 남질, 위용도 당당하게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관아를 나선다.
하인들이 그 모습을 보며 수군수군 난리다.
- 아니, 먼 조화래여?
우린 마누라 얼굴만 봐도 하초가 떨리는데 영감은 세상에 얼굴 좀 봐. 아주 도화꽃이 폈네, 폈어.
- 아, 쎄빠지게 공부해 턱하니 과거급제해야 우리도 저런 호사를 함 누릴낀데.
- 예끼, 이 사람. 하인눔이 먼 급제여, 급제가! 급체맞을 소리 하지를 말어.
- 나도 젊어지고 싶데이~.
홍알홍알 앓는 목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돌려보면, 낫같이 허리가 꺾인 마을 촌장이 오물오물 짭짭
입맛을 다신다.
하인들, 키득거리며 흩어지고, 소문은 소문에 풍성한 꼬리를 덧달고 황산강(낙동강) 뱃길따라
훨훨 퍼져 개경으로 날아간다.
다가닥다가닥다가다가다닥…. 작은 말발굽 소리로 잦게 울리다가 두두둑두둑퉁퉁… 두두둑두둑퉁퉁….
크게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진다.
우왕의 사냥매가 구릉 옆 잔솔가지에 숨어 있던 꿩을 낚아채다 놓친다.
푸드득푸드득,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꿩.
우왕, 약이 바짝 오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환관, 눈치를 슬슬 보면서 남성성이 거세된 간드러진 목소리로 고한다.
- 마마, 김해부에 칠점선이란 기생이 있사온데, 그 기생이 한 번 거문고를 타면 세상의 온갖 새란 새들은
다 날아든다 하옵니다. 그때를 기약하오심이….
한편, 개경의 재신들 사이에서도 칠점선에 대한 이야기로 꽃이 핀다.
- 한 번 동침한 관리들은 전쟁터에 나가도 화살이 비껴간다고 하더이다.
- 허허, 무슨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다 있소?
- 허무맹랑하다니요, 남질 보세요. 그 약골이 칠점선과 동침한 뒤, 왜선 50여 척을 한 방에 박살냈다 하지 않소.
말없이 듣고 있던 이성계가 한 마디 거든다.
- 인간 부적이구만!
1381년 8월.
칠점나루, 칠점선이 남질을 따라 개경으로 가는 날이다.
하늘하늘 날아갈 듯 차려 입은 칠점선, 드넓은 강을 바라보며 배에 오르고 있다.
남질, 칠점선을 부축하는 손길이 조심조심 유리알 만지듯 한다.
'기다려, 내 낭군 잡아 올게.'
칠점선의 입가에 배시시 의미있는 웃음이 맺힌다.
일곱 봉우리 칠점산이 점점 멀어진다.(중략)
# 4
1408년 5월(태종2년).
이성계가 죽었다.
온 나라에 국상을 알리는 방이 붙었다.
칠점선은 흰 무명 상복 대신 화려한 활옷을 차려 입었다.
궁인에게 술상과 거문고를 들리고, 이성계가 숨을 거둔 창덕궁 광연루에 올랐다.
칠점선은 거문고로 이성계가 살아있을 때 즐겼던 별곡을 타기 시작했다.
사헌부 관원들이 왕에게 고하였다.
- 온 나라가 국상의 슬픔에 빠져 애도하고 있는 이때 술마시고 거문고를 타는 화의옹주를 벌주어야 마땅합니다.
왕이 대답했다.
- 그만 하라. 화의옹주는 그의 식대로 태상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것이니라.
길게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애잔하게 이성계의 죽음을 조상하던 거문고 소리가 어느 덧 평화와 안정을 찾아가는 가락으로 바뀌어 갔다.
왕과 궐내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고개를 들어보니 이성계의 환생인가.
현학(玄鶴)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었다.
※ 1385년 12월, 칠점선은 우왕의 후궁(영선옹주)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396년 1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후궁(화의옹주)으로 봉해진다.
이성계와 화의옹주 사이에 딸 숙신옹주가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07년에 이미 숙신옹주에게 남편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칠점선은 1392년 7월 조선 건국 전후 시기에 이미 이성계의 여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민수 시나리오 작가·이야기세상 (주)플랫폼 대표
※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강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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