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1-2> [남구의 숨겨진 스토리들]- '최영 장군', 감만동에 남겨진 흔적
전함을 이끌고 와 '왜구를 토벌한 최영', 그때부터 그는 '감만동의 수호신'이었다
부산 남구 감만동 무민사에서는 매년 4월 최영 장군을 기리는 제향 행사가 거행된다. 지역의 초등학생들이 무민사 앞에서 최영 장군을 추모하는 현장학습을 하고 있다. 부산 남구 제공 |
- 제주의 몽골족을 정벌한 뒤
- 왜구의 부산포 약탈을 저지한 최영
- 그의 시호를 딴 무민사에서
- 감만동 사람들은 그의 넋을 기린다
조선시대 감만동은 경상도 해안가 중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감만동은 낮은 구릉 지대와 푸른 바다가 접하는 포구로서 이 일대에서는 꽤 융성한 어촌이었다.
보리밭이 파랗게 펼쳐진 감만동 구릉에서 바다를 보면 오륙도와 영도, 그리고 부산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쪽으로 둥글게 들어온 감만포는 수려한 모래사장이 있었으며, 배들을 정박하기에도 좋은 항구였다.
1740년에 간행된 '동래부지'에서는 감만동을 '감만이(勘彎夷)'로 기록하고 있다.
'감(戡)'은 물리치다, '만이(彎夷)'는 오랑캐란 의미이므로 '감만이'는 곧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뜻이다.
부산포 해전 당시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감만포로 왜적들을 유인해 전멸시켰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한 때 감만포에는 경상좌도의 해안을 방비하는 경상좌수영이 있었다.
경상좌도의 수군들을 모두 감만포에서 통치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선 초 경상좌수영은 부산포에 설치되었으나 울산 개운포와 동래 해운포로 옮겨 다니다가
인조 14년(1636) 감만포로 이설되었다.
경상좌수영은 감만포에 머물면서 효종 3년(1652)까지 17년간 왜적을 감시하였지만
왜관과 너무 가까워서 군사 기밀이 누설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에 현재의 수영으로 옮겨갔다.
일제강점기까지도 감만동에는 경상좌수영의 성지로 추정되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감만동은 경상도 해안가를 방어하고,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역사적 성격을 지녀왔다.
■ '최영장군'을 모신 무민사(武愍祠)
지역 주민들이 50여년 전부터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진행해 오고 있는 무민사 최영 장군 제향 행사. 부산 남구 제공 |
감만동 남쪽의 작은 언덕 위에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의 이름은 최영 장군의 시호를 딴 무민사(武愍祠).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이후로 최영 장군에게 무민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시대부터 감만동 사람들은 무민사를 세워서 최영 장군의 넋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기려왔다.
최영 장군은 감만동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졌으며, 예전에는 사계절마다 즉 1년에 4번씩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낼 때는 금기가 엄격했고 온 동민이 정성을 다하여 유교식 방식으로 제를 올렸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산에서 황토 세 덩이를 떠서 사당 주변에 뿌려
두었고,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최영 장군을 모시는 향사는 무민사 보존회가 주관하여 집행한다.
무민사 보존회는 사당건물과 경내를 관리하는 일도 한다.
무민사 보존회의 김병화 회장(92)은 지난 1967년 대표를 맡은 이후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김 회장은 감만동의 대표적 토박이로 11대 선조부터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사당 건립 공사를 주관하고, 최영 장군 유적비를 세우는 등 무민사를 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감만동 무민사 외에도 부산에서는 수영성 동문 밖의 무민사와 자성대 공원의 최영 장군 사당이 있다.
수영의 주민들도 매년 정월 대보름에 수영할매당에서 제사를 마치고 이곳에 들러 최영 장군에게 제를 올린다.
자성대 최영 장군 사당에서는 주민들이 매년 단오일에 맞춰 제사를 지낸다.
모두 왜구를 섬멸한 최영 장군을 받들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최영 장군 사당이 있는 감만동, 수영성, 자성대는 모두 조선시대에 경상좌수영이 위치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지방을 불문하고 관아에 신을 모시는 제당이 있었다.
이 제당에서는 고려의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아의 아전들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냈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그 까닭을 "고려의 시중 최영이 관직에 있을 때 깨끗하고 징수를 하지 않아 이름을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숭배한다"고 하였다.
■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최영뿐
남구 감만1동에 있는 최영 장군 유적비. |
고려의 문벌 가문에서 태어난 최영 장군은 무장으로서 탄탄한 길을
걸었다.
그가 조정에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적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고려 말은 왕권의 기반이 흔들려 수많은 변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쇠멸해지고 명나라가 부흥하는 국제 정세도 고려에 큰 파고를 안겨 주었다.
이런 고려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최영에게는 수많은 전투 임무가 주어졌다.
'고려사'에서는 "최영 장군은 용모가 장대하고 완력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최영 장군은 왜적을 물리치는 전장에서 용감하고 거침이 없었다.
고려 말 왜구들은 남해안뿐만 아니라 개성과 가까운 서해안 일대를 끊임없이 위협하였다.
공민왕 7년(1358) 황해도 오차포(吾叉浦)에 침입한 왜적 병선 400여 척을 무찔러 승리한 이후로
최영 장군은 왜구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우왕 2년(1376)에는 왜적이 부여 홍산(鴻山)으로 쳐들어왔다.
우왕이 환갑이 된 나이를 들어 만류했으나 최영 장군은 고집을 꺾지 않고 출정을 했다.
최영 장군이 선두에 서서 돌진하였는데, 적 한명이 화살을 쏘아 최영의 입술을 맞추었다.
입에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적을 쏘아 죽인 이후에 입술에 박힌 화살을 빼냈다.
이 전투에서 최영 장군이 왜구들을 대파하고 돌아오자 우왕은 개선장군의 부대를 마치 황제의 사신을 영접하듯 맞아주었다.
최영 장군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패한 왜구들은 그를 가장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
한번은 최영 장군이 강화도 전투에서 왜구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어린아이가 적진에서 도망쳐 오자, 장수들이 불러서 적의 동태를 물었더니 아이가 말하였다.
"왜적들은 늘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머리가 허옇게 센 최영뿐이라고 했습니다."
■ '최영장군'은 부산에 어떻게 왔을까
감만동에서는 최영 장군이 부산에 온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은 탐라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갔다.
탐라국을 몽골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최영 장군을 보내 이들을 섬멸시키려 한 것이다.
제주도에 간 최영 장군은 몽골족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왜구가 부산포에서 약탈을 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최영 장군은 못된 왜구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부산포까지 왔다.
그런데 부산포에는 전함을 정박하기가 쉽지 않아 감만동으로 옮겨야 했다.
감만동의 산 정상에 올라서서 보니까 전함을 세우고 군대를 주둔하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그리하여 최영 장군이 감만동에 전함과 군대를 둔 뒤에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영도의 아씨당 전설에서도 최영 장군이 제주도를 거쳐 절영도에 왔다는 이야기가 전래된다.
군마의 책임자였던 부산첨사는 제주도에서 절영도로 온 말이 자꾸 죽어 근심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꿈에 탐라국 여왕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최영 장군은 탐라국을 군마의 사육지로 삼기 위해 제주도 정벌에 나섰다오.
우리들이 견고하게 심은 탱자나무가 성처럼 막고 있었으나, 최영 장군은 갈대에 불을 붙여 성을 소멸시키고
침입해 들어왔지요. 나는 최영 장군의 화친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인이 되어 버렸다오. 헌데 최영 장군은 신돈의 음모에 빠져 절영도로 귀양을 가버렸소. 나는 그를 찾기 위해 절영도까지 왔으나 그 말은 거짓이었고 결국 고독한 영신이 돼 버렸지요."
최영 장군을 찾다가 고독한 신이 된 탐라국 여왕은 그 원한으로 제주도에서 영도로 온 말을 죽였던 것이다.
최영 장군의 제주도 정벌기는 '고려사'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다.
공민왕 23년(1374)의 일이다.
탐라국을 장악하고 있던 몽골족들이 명나라에 바칠 제주도 말 2000필을 보내지 않자 고려는 최영 장군을 앞세워 대대적 토벌에 나선다.
몽골인들은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저항했지만 최영 장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탐라국을 정벌한 후 최영 장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부산의 백성들은 이런 최영 장군을 왜구를 무찌르거나 탐라국 여왕을 굴복시키는 설화에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용맹스러운 최영 장군이 부산에 와서 적극 활약해주기를 바랬던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 억울하게 죽은 영웅에서 '감만동의 수호신'으로
1968년 무민사 전경.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이다. |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불행한 사건이 최영 장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명나라 황제가 철령 이북지역의 고려 땅을 명나라에 내놓으라고
명했던 것이다.
분개한 우왕과 최영 장군은 요동 정벌에 나섰다.
이는 고려의 영토를 수호하려는 마지막 북진정책이었다.
우왕 14년(1388) 고려 조정은 최영 장군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출전시켰다.
그런데 이성계는 소위 4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쳐들어왔다.
부하 이성계에게 모든 군사와 말을 내주었던 최영 장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최영 장군을 현 경기도 고양시로 유배를 보냈다가
창왕이 즉위한 후에 처형시켰다.
최영 장군은 처형을 당하면서도 얼굴빛과 말씨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는 최영 장군의 처형을 보는 백성들의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최영 장군이 죽는 날에 개경 사람들이 모두 철시했으며, 멀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길거리의 아이들과 시골의 여인네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고려의 국운을 상징했던 최영 장군의 비참한 죽음은 백성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뇌물과 청탁을 거부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부친이 임종 때에 "너는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해야 한다"는 유훈을 늘 마음속 깊이 되새겼기 때문이다.
이런 최영 장군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백성들은 그의 억울한 죽음에 더욱 비애를 느꼈다.
하지만 역사에서 좌절당했던 영웅은 죽지 않고 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시대 관아에서는 최영 장군을 신으로 숭배했으며, 중부 지역의 무당들은 최영 장군을 영험한 신으로 모셨다. 또한 부산의 감만동을 비롯한 해안가에서도 최영 장군 사당을 세워 그의 뜻을 기렸다.
조선시대 일본과 가까운 부산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다.
왜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영 장군은 누구보다 외침을 막아줄 수 있는 훌륭한 수호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감만동 무민사는 일본인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왜구를 격퇴한 최영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일본인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과거 최영 장군 사당은 지금보다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사당 위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었다.
일제는 이곳에 방공포를 설치한다는 구실로 공사를 벌여 소나무를 자르려 하였다.
명목은 방공포의 설치였지만 최영 장군 사당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최영 장군 신이 노해서인지 소나무를 자른 일본군 책임자가 갑자기 죽게 되자 일제의 방공포 설치 작업도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무민사에 대한 일제의 행패는 계속되었다.
일제는 무민사에 보관되어 있던 현판과 연혁을 다 불살라버렸고, 이렇게 계속되는 탄압으로 인하여
최영 장군에 대한 제사도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최영 장군에 대한 제향이 복원되었다.
감만동 사람들은 무민사 보존회를 결성하여 최영 장군의 숭고한 뜻을 다시 기렸다.
최영 장군 사당이 초라함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1968년에 현재의 사당 건물을 새로 지었다.
시대 변화에 따라 향사일도 양력 4월 20일에 맞춰서 지내게 되었다.
오늘날 감만동 최영 장군 향사는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지역 기관장, 최영 장군의 후손 등도
널리 참여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최영 장군 추모제로 발전하였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문학박사
※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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