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3-2>
[해운대 '고운' 이야기]- 팩션-
해운대 '삼포'기행
달빛 레일 위로 사랑은 흐르고…
봄빛 해안은 그리움을 토해냈다
해운대에 추억을 묻어둔 사람들이 찾는 동해남부선 해운대~송정 구간의 폐선로. 툭 트인 바다 전망과 해안의 운치가 그리움을 자아내게 한다. 국제신문 DB |
10년 만에 불쑥 찾아온 그녀 .
그 동안의 얘기를 뒤로하고 추억의 레일이 깔린 옛 기찻길을 발목이 시리도록 걸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는 오륙도.
누구지? 이 새벽에? 발신자의 이름이 뜨지 않는 전화다.
"…야, 문둥아, 나다. 내 해운대에 왔다. 빨리 나와 봐라.",
"누? 누… 누구시죠?",
"니 내 목소리도 모리겠나? 진짜 서운타. 미포 입구 기찻길 알제? 니 올 때까지 기다릴 끼다…"
이건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어느 먼 초록나라에서 걸려올 듯한 잠결 속에서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C다.
해운대 미포 새벽시장의 분주한 모습. |
내 심장에서, 쿵쿵 기찻길 레일에 귀를 접고 듣는 기차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월이 10년이나 흘렀다니….
놀랍게도 C는 그대로였다.
"진짜 해운대 너무 변했데이…내 이바구는 나중에 듣고
바다 구경부터 하면 안 되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준다.
10 년 전 봄, C의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 후 첫 만남이다.
막 뭍에 발을 딛는 미포 선착장.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일까.
웅성웅성 청자 빛 어둠 속에서 각종 어류가 담긴 붉은 다라이들을
진열해 놓은 좌판상(아낙)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여명을 뚫고, 밤바다에서 귀항한 통발 어선들이,
포구에 빼꼭히 정박한 배와 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정박하자,
눈치 빠른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먹이를 찾아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동백섬의 배경화면 같은 초고속 고층빌딩들이 허공에 쏟아내는 현란한 불빛들이, 하얀 안개에 휩싸여,
마치 신들이 사는 성(城)처럼 보였다.
한 아낙이 붉은 다라이 속에서 꿈틀거리는 문어 한 마리를 맨 손으로 꺼내 보이며
5분 만에 장만해 줄 테니 먹고 가라고 권했다.
두 귀가 즐거웠다.
C가 "…후후…해운대 바다 보니 인자 살 것 같데이"라고 말했다.
바다를 나비처럼 건너온 봄바람은 부드러운 실크 머플러 감촉으로 목덜미를 휘감았다.
지난날, C와 나의 우정은 8할이 해운대 바다가 키웠다.
서로가 슬플 때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리 해운대 바다 보러 가자" 외쳤다.
그 시절만 해도, C도 나도 혼자서는 감히 해운대 바다에 놀러 올 생각도 못했다.
바보같이...
저 갈매기 끼룩끼룩 우는 모래사장을 그와 얼마나 발목이 시리도록 걷고 걸었던가.
우리의 꿈은 얼마나 푸르고 높았던가.
목측(目測)의 수평선 위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선명하게 아름다운 상(象)을 드러내는 오륙도는
한 영혼을 송두리째 불 태워서 사랑해도 미련이 없을 그런 여인의 자태이다….
"지금 무슨 말이니?",
"생각하면 어린 내가 우찌 그리 못됐는지 말이다…",
"또 그 이야기가? 그만 해라.",
"알았다. 알았데이."
해운대 3포 가운데 한곳인 구덕포 일대의 해안 바위. |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서울서 전학 온 아홉 살의 내가 옆집 사는 C를 같이 놀자고 쫓아다니는 것이 싫었던지, 내가 달리는 완행열차 꽁무니에 매달려 올라타기(그 시절의 아이들의 놀이)에 성공하면, 나를 '진정한 친구'로 받아주겠다고 했다. 겁이 많았던 나는 절대 죽어도 못한다고 사정했지만, '절대로 해야만 친구로 받아 줄 수 있다'고 C의 텃세에 못 이겨, 기차 꽁무니에 매달리려다 그만 기찻길에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 일을 C는 말하는 것이다.
그 현기증 나는 보리 고개 시절, 책 보따리 허리에 질끈 매고 기찻길 따라 등·하교하던 아이들은
기찻길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철없는 탓에 무서움도 몰랐었다.
친구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 기찻길의 추억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생각하면 기찻길은 아름다운 추억만큼 아픔도 함께 떠오르는 길이다.
수평선에서 달려와 단애를 더듬으며 부서지는 시원한 파도소리에 갑자기 복잡한 생각들이 멀리 멀리 도망친다.
저 우주의 은하성단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밤을 꼬박 새워 연필에 침을 묻혀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러 가는 길처럼,
동해남부선은 내게 사랑이 흐르고 달빛이 흐르는 길이다.
청사포 '삼포길'로 접어들었다.
탁 트인 광활한 바다가 탁한 눈을 씻어 주었다.
청사포 가는 길의 안내판과 '삼포 가는 길',
그리고 '해월정사 가는 길'과 달맞이 십오굽이길 가는 길의 길목 위에서 길은 잠시 망설였다.
청에 그러자고 했다.
때를 맞춘 듯 적광전 앞에 '성철스님 탄신 기념 예배 불사'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일주문 지나니 잉어들이 노니는 연못도 있고, 성철스님이 머물었던 '고심정' 뜰에는,
막 만개한 하얀 목련꽃이 염화미소처럼 반겼다.
그러나 봉훈관 관람은 예약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발길을 돌려 청사포 등대로 향했다.
불야성을 이루는 봄바다 배경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마구 눌렀다.
먼 바다에는 둥둥 멸치잡이 배들이, 소리를 좋아하는 멸치를 그물 속에 몰이하기 위해,
뱃전에 바싹 붙어 서서 배의 옆구리를 두드려 울리는 소리가 북처럼 울려왔다.
봄밤은 바다처럼 깊어가고, 드라마 '해운대 연인'의 촬영장소(음식점)에는 많은 청춘남녀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하고 있는 풍경이 마치 이국의 해안에 관광 온 것 같았다.
이쁘게 단장한 두 개의 등대 불빛들이 번갈아가면 먼 바다로 나간 고기잡이배들을 위해
쉼 없이 소나(Sonar)같은 환상적인 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밤낚시꾼들이 밝힌 등불이며, 수많은 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바다에 달빛처럼 내려와 섬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내가 기차 멀미로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
C와 나의 진정한 우정은, 차창 밖이 그림엽서 같은 동해남부선 타고 한 달이 멀다하고,
두 사람의 공동 첫사랑(C의 남편이 된 사람)을 만나러 다니던 그때부터였지 싶다.
구덕포 선착장에는 미역건조대가 빼곡했다.
바람에 날리는 미역 냄새는 참 향긋했다.
조각칼로 다듬은 듯 위용을 자랑하는 구덕포(九德浦) 표지석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말했다.
우리는 해서 봄 미역 말리는 해녀에게 물어도 보고, 횟집 주인에게 물어도 봤다.
그러나 종내 마음에 드는 말을 듣지 못했다.
스마트 폰으로 검색까지 해 보았다.
허사였다.
그런데 10년 청상세월에, 한 소식이라고 한 것인가.
C는 종전과는 아주 딴사람의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두 눈이 번쩍 뜨이는 장님처럼 공연히 두 어깨를 들어 올렸다, 놨다 했다.
주변의 소나무들도 제법 울울창창하고 개발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구덕포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포구….
시간의 퇴적층 같은, 잿빛 돌담의 파란 페인트칠한 기와지붕의 집들은 대문이 없었다.
대문이 있는 집들은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난 오래 가슴 속에 준비해 둔 말 한 마디를 끝내 꺼내서 건네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이제는 그녀에게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세찬 바람이 우리의 긴 치맛자락을, 새의 날개처럼 푸득거렸다.
청사포, 구덕포에는 초소가 있던 흔적이 많고, 그 초소가 있는 자리는 이제 해운대의 명당이 되었다.
군부대 주둔 관계로 80년대 후반까지도 민간인의 통제가 자유롭지 않았던 구덕포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영화 '친구' 덕분이다.
나그네가 찰칵찰칵 총처럼 겨누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달아나지 않고
도리어 경계의 힘찬 날갯짓을 하였다.
봄 향기로 물든 해안으로 멀리 달아났던 그리움의 물결이 수평선에서 하얗게 몰려오고 있었다.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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