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도 모르는 <12>
부산의 헛배와 도깨비 바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 뱃사람의 환영을 만들고 길흉을 점치게 하다
배서낭을 상징하는 배의 선기. |
# 헛배
- 바다서 조난 당한 어민들
- 다가오는 배 목격하지만
- 안도하는 순간 자취 감춰
# 도깨비
- 밤바다에서 길 잃었을때
- 온 천지가 불바다로 변해
- 많이 모인 곳 찾아 조업도
# 배서낭
- 배 지키는 수호신·풍어신
- 가덕어민 배안 쥐 징조 여겨
- 울음소리로 출항여부 결정
# 청사포 허깨비
- 바다서 '바가지 다오' 요청
- 기지 발휘하는 선장들만이 무사한 항해 이을 수 있어
■ 무섭고 두려운 바다
바다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다.
무한한 식량과 생명을 제공하는 바다는 때론 태풍과 해일, 너울성 파도 등 강력한 자연재해를 일으킨다.
해상에서 조업하는 어민에게 바다는 어머니의 품인 한편,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민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부산에선 기장과 해운대 어촌서 주로 전승된다.
파선되었거나 어민들이 수장된 사고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민담이 생겨났다.
새벽에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집 앞의 바다에서 '이엉청, 이엉청'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얼마 전 인근 바다에서 파선되어 많은 어민이 수장된 터였다.
빨랫줄에 널은 옷들이 갑자기 갯바람에 날리더니 유령처럼 달려와 깜짝 놀라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바로 어촌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헛배 이야기다.
■ 조난 때 다가오는 부산의 헛배
마을의 풍어와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기장군의 동해안별신굿 모습. |
이보다 더 오금이 저린 민담은 바다에서 직접 조난당했을 때의 이야기다. 과거 부산 어민은 몰래 일본까지 배를 항해하던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멀고 익숙지 않은 항로를 가다 보면 뱃길에서 어긋나 고생하기도 한다. 바다 위에서 배까지 고장이 나면 한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들어섰다.
파도에 목숨을 맡긴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통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배가 다가온다.
'저기 배가 온다. 이제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갑자기 배가 사라진다.
허깨비 배인가.
가슴이 철렁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또 다른 배가 통통거리며 가까이 온다.
이번에 배를 놓치면 죽을 것 같아 애가 타서 소리를 지른다.
'우리 좀 살려주이소'.
하지만 다가온 배는 다시 허공 속으로 휙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렇게 조난당한 어민들이 본 선박은 '헛배'이다.
헛배는 어민들이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몽롱해졌을 때 바다에서 나타나는 허깨비이다.
허깨비에게 홀리면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다가 암초에 부딪혀 난파를 당할 수 있었다.
■ 풍어도, 흉어도 주는 바다 도깨비
바다에서 헛것에 속아 정신이 없을 때 도깨비불이 찾아온다.
도깨비는 으슥한 산길뿐만 아니라 밤바다에서도 나타난다.
컴컴한 바다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육지를 보고 기뻐서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온천지가 불바다로 변한다.
하늘에서 불이 뚝뚝 떨어져 바다에 떠다니고, 다시 바람에 날린 불은 허공에서 춤을 춘다.
게다가 파도까지 크게 치니 배는 육지로 나가지 못하고 어민은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항해를 중지한 채 밤새 도깨비불과 씨름한다.
그러나 날이 새면 도깨비불은 아무 데도 없다.
그저 환상과 공포에 속았던 것이다.
이렇게 부산 바다를 휘젓는 도깨비불은 이따금 풍어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도깨비는 오직 해악을 끼치는 유령일 뿐만 아니라 만선과 풍어를 몰아주는 신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어촌에서는 바닷가에 움막을 지어놓고 '허생원' 혹은 '진생영감'이라 부르는 도깨비를 모신다.
어민들은 도깨비불을 이용해 풍어를 꾀하는 일도 있다.
바로 '산망(山望)'이란 풍속이다.
산 위에 올라가서 바다에 떠 있는 도깨비불을 확인해 보고, 그곳에다가 어망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는 도깨비불이 나타난 곳에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 흉조를 울음으로 예견하는 배서낭
기장군의 항구에 가면 줄지어 정박한 어선을 볼 수 있다.
어선의 이물과 고물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울긋불긋한 선기(船旗)가 달려 있다.
이 선기가 '배서낭'을 상징한다.
배서낭은 배를 지키는 수호신이며, 만선을 가져다주는 풍어의 신이다.
어민들은 배서낭이 배의 길흉을 관장하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서낭은 선기와 함께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 모신다.
예컨대 접은 한지를 무명실로 감아서 이물에 걸거나 명태에다가 한지를 붙여 고물에 걸어두기도 한다.
이는 신성한 배서낭이므로 조심스럽게 다룬다.
가덕도 어민들은 배 안에서 사는 쥐를 서낭으로 생각한다.
함부로 쥐를 잡거나 내쫓지 않는다.
혹 쥐가 배 안에서 나가거나 바다로 뛰어들면 사고가 발생할 징조로 여겨 출어도 하지 않았다.
배 위에선 금기도 많다.
고기잡이를하다가 숟가락과 같은 쇠붙이를 바다에 빠뜨리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는 바로 소금과 술을 배의 사방에 뿌리며 부정 씻기를 해야 한다.
어민들은 해마다 날을 받아 배서낭에게 고사를 지낸다.
풍어를 기원하는 뱃고사는 선주가 무당을 불러 배 위에서 치른다.
어민들은 배서낭이 불길한 사고를 앞두고 운다고 여긴다.
선장은 배서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징조로 받아들여 대처한다.
'찍찍찍' 쥐 우는 소리는 선박 사고가 날 징후이며, '짹짹짹' 새 우는 소리는 날씨가 나쁘고 파도가 칠 조짐이다. 드물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소리는 만선의 길조로 여긴다.
■ 바가지를 달라는 청사포 허깨비
해운대 청사포는 유달리 헛배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는 곳이다.
청사포는 고깃배가 출어하는 포구로 앞바다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했다.
지금도 청사포에 가면 바로 잡아 올린 싱싱한 횟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청사포 바다는 기쁨만 준 것이 아니라 죽음과 슬픔까지 안겨줬다.
조업하다 거센 파도 속으로 사라졌던 어민들도 많았다.
청사포 어민들은 바다에서 헛배를 만나기도 했다.
조업 중에 날씨가 궂거나 파도가 거세져 정신이 없을 때 어디선가 헛배가 다가온다.
이 헛배를 타고 있는 허깨비는 대뜸 바가지를 빌려달라고 한다.
기상 악화에 정신을 못 차려 헛배에 홀린 선장은 온전한 바가지를 그냥 준다.
반면, 정신을 차리고 기지를 발휘할 줄 아는 선장은 바가지 밑을 깨뜨려서 준다.
바가지는 배를 상징한다.
허깨비가 바가지를 달라는 것은 곧 배의 운명을 달라는 뜻이다.
온전한 바가지를 그냥 주면 허깨비가 물을 배에 퍼 담아 침몰하게 되지만, 바가지를 깨뜨려 주면 물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배는 다시 항해할 수가 있다.
■ 헛배에서 벗어나는 지혜
헛배는 사람이 심리적 공포에 휩싸여 무기력해졌을 때 나타난다.
누구도 헛배에 홀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해상에서 강풍과 폭우 등을 만나면 누구나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헛배는 이런 극도의 긴장감 속을 파고들어 나타난 환영이다.
빠른 속도로 배를 들이받는 헛배, 바다 위를 붉게 물들이는 도깨비불 등 환영의 형태도 다양하다.
그러나 헛배는 사실상 존재가 없는 헛것일 뿐이다.
헛것을 물리치는 방법은 정신을 바로 차리는 것이다.
설령 궂은 날씨 속에서 다가오는 헛배라도 모든 선원이 정신을 차리고 합심해서
위기에 대처한다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도 수없이 헛배를 만난다.
수많은 공포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헛배는 이성을 갖고 정신을 차린 자신이 물리칠 수 있는 법이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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