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 재생 4.0
[부산의 미래를 흐르게 하자] <4-15>
동천의 기억- '기억의 비판적' 재구성
'장소의 기억' 현재적 재생, 동천살리기 디자인 밑그림돼야
동천이 만들어낸 부산의 어제와 오늘. 1967년 제일제당 앞의 동천 모습(위)과 문현금융단지 앞의 반듯한 동천이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국제신문 DB |
- 물줄기 곳곳 옛 이야기·추억 간직
- 철저한 현장조사·고증·연구 바탕
- 시민이 바라는 하천 모습 목록화
- 합의통해 '재생' 우선순위 정해야
- 화려한 조감도 먼저 그리기보다
- 어떤 좋은 기억들을 되살려내고
-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 방향 설정
- 통일성 속 다양성 추구해 나갈 때
- 함께하고픈 하천으로 부활할 것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까?
그저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 젊지만 가난하고 찌질했던 청년시절, 돌이키고 싶은 옛 사랑의 기억,
너무 바빴지만 내 것을 하나씩 가지기 시작했던 30대, 고민은 많았지만 그래도 여유를 갖기 시작한 40대….
아마도 나이가 들면 더 많은 기억들이 과연 당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였는지를 물을 것이다.
도시와 건축공간을 다루는 것을 업으로 살다보니, 이런 질문들을 수시로 만난다.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겠다지만, 사실 공간에 온전한 새 것은 없다.
이미 그 땅에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담긴 사연은 어느 인생보다 풍부하다.
평생을 천대받던 땅, 세상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이 받던 땅, 피에 물든 땅, 뜻밖의 사고에 장애를 지닌 땅….
결국 모든 개발은 재개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시건축가]가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그 땅이 들려주는 '장소의 기억'을 경청하는 것이다.
■ 장소의 기억과 새로운 관심
한때 천덕꾸러기 '똥천'으로 괄시했던 이곳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천이, 어렵던 시절 고아 같은 실향민들을 자식으로 거두어 지금의 부산으로 길러주신
어머니 같은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악취와 더러움이 우릴 키우며 얻으신 상처와 질병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 몸을 막아 차도를 만들고, 아직도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오물을 쏟아버리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원래 이름이 단풍잎 만개하고 보석처럼 귀함이 가득한 '풍만천', '보만천'이었다는 것도.
어디 그뿐이랴, 해방과 전쟁, 그리고 일제 강점기동안 그녀가 남 몰래 흘린 눈물, 거듭되는 왜구들의 침공과
유린당했던 기억, 부산 시민의 날을 있게 만든 부산포 대첩 승리의 함성 소리, 더 거슬러 가면
그 옛날 강과 바다가 만나 삼각주를 이루던 이곳에 강물이 흙을 날라 땅을 만들며 불렀던
수 만년 동안의 노래들….
그리고 그 물가에서 피고 졌던 풀과 꽃, 그곳에 살았던 이름 없는 물고기들….
동천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꼬꾸라져 울컥 북받쳐 오르는 감정덩어리를 참다가 목 놓아 울었다.
너무 미안했다.
그러면서 그녀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고, 이제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아니 해주고 싶은지를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과거'라고 한다.
어느 시절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고, 아쉬움과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임머신을 핑계 삼아 옛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정말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공간 역시 그렇게 계획하고 설계되어야 한다.
특히, 도시공간처럼 많은 이들의 장소에 대한 집합적 기억이 서려있는 곳을 새롭게 구상할 때는
각자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꺼내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것을 상상해가며
공간을 디자인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억을 함께 재구성'해야 한다.
기억의 부정확성도 원인이겠지만, 기억에 대한 현재의 입장이 달라져 관점의 차이가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기억을 반추하여 각자의 그림을 꺼내고, 조각을 맞추고, 공부하고 토론하며
큰 그림을 맞추는 '기억의 비판적 재구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 동천 기억의 비판적 재구성 방법
기억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누군가 발의하여 밀어붙이고, 예산 따고,
마스터플랜 작성하고 시공하는 대규모 개발과 전면 철거로 단시간에 완성하는 그런 종래의 방식은 아니다.
공간을 계획하기 전에 먼저 장소의 기억을 재생하는 데서 시작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미 동촌에 대한
기억 재생 작업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주관적인 추억을 재생하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기억을 재구성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기억이 지금도 삶을 더욱 가슴 뛰고 행복하게 만들
'욕망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와 병행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은 타인의 시선과 기억이 아니라 땅이 지니고 있는 기억,
즉 '장소의 기억'을 찾아내는 일이다.
공간 속에 담긴 기억, 때론 무의식 속의 기억을 찾아 재생하는 일은 흩어진 고증 자료를 찾고, 현장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분석, 그리고 다양한 학문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힘든 작업이다.
좋은 재생이 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고를 투입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도시개발은 이러한 장소의 기억을 찾는 일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였기에
귀중한 기억 역시 전면 철거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객관적 자료와 연구가 바탕이 되지 않은 구상 및 계획은 자칫 여론을 잘못 선동하여
헛된 기대와 희망을 주거나 도시개발의 성급한 업적을 바라는 정치의 도구가 될 위험이 크다.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공간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를 목록화하고 합의를 통하여
이들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이해관계에 따른 무분별한 요구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감당할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담보로
현실적인 목표와 내용이 설정해야 한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듯, 어느 한 곳도 불필요하게 잘려나가지 않도록 도려내고, 보완하고, 치료하고, 보존할 도시개발의 범위를 신중히 정해야 한다.
그렇게 '도시를 살아있는 생명'으로 대하고, 그 기억을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길이고, 상호 신뢰하는 지속가능성의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이 방법은 다소 시간이 걸리고 복잡해 보이지만, 시행착오로 인한 비용절감은 물론, 시민들의 참여와
정치적 합의를 이룸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 공간에 대한 자발적인 협조가 생겨나게 만든다.
그렇게 도시 공간이 시민과 연계될 때, 도시는 반려자를 만나 함께 의지하고, 서로 돌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구상과 디자인은 이러한 과정 후에 비로소 착수해야 한다.
화려한 조감도 대신 구체적인 도시의 문제에 대한 정의와 분명하고도 단순한 목표가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
동천의 무슨 좋은 기억을 재생하려고 하는지, 어떤 욕망을 이곳에 다시 이루고 싶은지
상세한 요구사항을 설정해야 한다.
더 이상 남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도시가 아니라, 주인인 시민들의 일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이슈들이 제기되어야 한다.
보다 시민들의 일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목표를 찾고
이를 대표할 간단명료한 슬로건을 정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
어디나 비슷한 계획보다, 철저하게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 계획이 되어야 한다.
■ 함께하고 싶은 추억의 장소로
독일 베를린 IBA의 경우, 구체적인 공간계획에서 세 가지 기본적인 범주의 도시적 기억을
도시설계 및 건축모델 설정의 기반으로 삼았다.
기존 도시 체계(planimetry), 기존 도시 형태 구법(stereometry), 도시 형태체계(physiognomy)로 도시의 질서를
제공하고, 이 속에서 개별 공간과 건축물의 위상을 정하였다.
이는 가로와 하천의 체계를 상수로, 건축을 변수로 취급하여 도시의 통일성 속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급진적인 새로운 마스터플랜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기존의 구조를 재구성하여 전체와 부분을
마치 퍼즐처럼 짜 맞추는 방법을 취하면서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 가능할 수 있는 전략 계획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 계획을 바탕으로 각 지역은 개발의 형편과 시기에 따라 개발의 성격을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억의 비판적 재구성'을 통하여 동천에 구현해야할 궁극적인 목표는
'동천을 정말 사람들이 사랑하고 함께하고 싶은 추억의 장소로 재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동천의 옛 기억을 구상하고 있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동천 재생을 우리 세대에 시작할 수 있다면 늦었지만 다행이고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는 유구한 동천의 생명을 회복하고, 우리 때문에 난 상처와 병을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 일은 결코 우리 세대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부산의 미래 비전으로 백년이고 천년이고 지속되어야 할 일이다.
무엇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까?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벅찬 기억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함께 했던 시간들에 감사한다고, 그래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세상 무엇보다 행복한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김승남 (주)일신설계종합건축사사무소 사장
후원: (주)협성종합건업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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