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부산 매력 공간] '벽 속 깊이 깃든' 시간의 결을 되살리다

금산금산 2015. 1. 28. 20:36

'벽 속 깊이 깃든' 시간의 결을 되살리다

 

 

 

참으로 정직하게 낡았구나…세월은 아름다움을 빚는 장인

 

 

 

 

 

 

- 부산 근대사 오롯이 간직한
- 70년된 창고 비욘드 가라지
- 백수 바라보는 옛 백제병원
- 고색창연한 시간의 켜 살려
- 복합문화공간 등 재생 추진
- 새 문화창조 견인차 기대감
- 행정·전문가의 지원·협의를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시인 박노해는 오래된 것을 노래한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결을 통해 아름다움을 본다.


모든 가치의 기준을 '새로움'에만 맞추던 개발의 시대에는 소소한 개별성 따위는 적당히 무시된다.

또 낡고 오래된 것들은 가능한 한 하루바삐 지워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강제 제거의 과정 동안에, 잃어서는 안 되는 숱한 결들이 뭉개진다.

그나마 이제 우리 사회도 '재개발'이 아닌, '재생'(再生)을 시대적 화두로 맞아들이고 있어 다행이다.

지키지 못한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어렵사리 남은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한다.

 

 



■ 젊은 생기로 물드는 근대 창고 : 비욘드 가라지

산업용 건물(창고)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비욘드 가라지.

낡고 후미진 쌀 창고 앞에 어느 날 저녁 젊은 친구들이 길게 늘어서

 출입을 기다리고 있다.

창고 문이 열리고 생기발랄한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이더니, 클럽에서나

들릴 법한 비트 강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제법 내공 있어 보이는 그라피티(grafiti)가 한쪽 벽면에 그려지는 동안,

창고 뒷마당에서는 스케이트보드 배틀이 벌어진다. 동네가 들썩인다.


'비욘드 가라지'(beyond garage).

우리말로 하면 '창고를 넘어' 정도가 될까.

지어진 지 족히 70년은 되어 보이는 근대 창고(대교창고)

기획 이벤트 행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방치된 산업용 건물을 리노베이션 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용한

부산의 첫 성공 사례이다.

아니, 성공은 아니고 아직도 실험 중이다.

이 낡고 오랜 것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한 이는 편집숍 '고사우스'(Go South)를 경영하는 서장현 김석관 씨다.


동갑내기 친구인 두 사람은 서핑 마니아며, 힙합과 보드 등 서브컬처를 지지하는 부산 토박이다.

어떻게 이런 허름한 창고를 선택했을까.

"컬처비즈니스 사무실을 하나 마련하려다가, 고색창연한 이 공간에 반해 들어왔어요.

1층은 각종 이벤트 공간으로, 2층은 펍이나 라운지클럽으로, 바다가 보이는 3층은 사무실로 쓰려고요.

부산의 캘리포니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은데, 사실 공간 재생에 드는 적잖은 비용 때문에

고민이 좀 많아요."

그들이 구상한 대로 공간을 완성하려면 아직도 갑절의 투자와 수고로움이 필요할 것 같다.


둘러본 공간은 참으로 절묘했다.

층고가 6~7m인 뻥 뚫린 1층에서는 어떤 행사도 가능해 보인다.

그동안 브랜드 론칭, 팝업 스토어, 인디문화 공연, 웨딩 화보 촬영 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졌다.

신개념 하우스웨딩 식장으로 몇 차례 활용됐다.

어떠한 조명과 음악 소리에도 그에 맞는 옷을 갈아입는 신기한 공간이다.

내부 증축으로 조성된 철재 계단과 복층도 이벤트 성격에 맞춰 다양하게 활용된다.

2층은 프리스타일의 펍이나 연회 공간이 되기에 딱 적당하다.

예전 창고였을 때 수직 이송을 위해 바닥 가운데를 뚫어놓은 것도 이 공간에서는 참 흥미로운 장치가 된다.

사다리로 기어오른 3층은 극도의 클라이맥스였다. 여객선들이 길 하나 건너에 정박해 있고,

먼바다까지 한눈에 펼쳐진 이곳에 사무공간을 꾸미겠단다.

캬~



■ 혼과 백이 살아 숨 쉬는 근대 병원 : 옛 백제병원

백제병원(부산 첫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은 이제 이바구길 투어 출발지가 됐다. 사진=이승헌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으로 세워진 '백제병원'.

준공 연도가 1922년이니 백수를 바라보는 건물이다.

하부 화강석과 상부 붉은 벽돌로 마감된 길모퉁이의 외벽은

근대식 건물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72년 화재로 5층이 소실되고 3~4층은 내부 일부를 개조했으나,

다행히 1~2층은 화마를 피해 건립 당시의 구조와 재료를 만져볼 수 있다.

병원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이 건물은 중국음식점(봉래각)으로 바뀌어

또다시 호황을 누리다,

일본군 장교 숙소, 치안사무소, 중화민국 임시대사관 등

우여곡절이 많은 시절을 지내왔다.

그 이후로 예식장, 임대 사무소, 롤러스케이트장, 종교 시설 등으로

무수한 용도의 변용이 있었고, 그때마다 내부 공간은 부분적으로 변형과

훼손이 뒤따랐다.

이런 온갖 시간의 켜가 깃들인 건물에 오히려 애정이 어린 관심으로 거금을 들여

인수한 이가 있으니 현 집주인 정은숙 씨다.

 

 

부산의 결을 가진 이런 건물이 하나둘 없어지는 것을 보고 본인이 직접 나서고 싶었다고 한다.

당장 백제병원 바로 옆에 붙어 있던 근대유물 남선창고가 2009년 허망하게 철거되지 않았던가.

이 공간을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가고 싶은지 물었다.

"기본 방향은 정한 바 없다. 주인 생각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목적을 안 두고 좋은 생각만 가지고 가다 보면 나중에 바람직한 결과에 도달해지지 않을까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좋은 의견을 들으려 한다."

1층과 2층의 내부 공간을 둘러보는 내내, 살 떨리는 긴장감으로 숨을 몰아쉴 수조차 없었다.

말간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는 벽면에는 숱한 혼과 백이 서려 있는 듯했다.

솜씨 좋은 벽돌공의 땀이, 살고자 애쓰던 환자의 고통이, 기생과 어울려 흥건히 취하던 식객의

객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살다간 이들의 흔적과 채취가 벽돌벽 사이 곳곳에 껴있다.


비워진 1층의 넓은 홀은 시인의 말처럼 순명하며 살아나온 역사 그 자체이다.

이 아름다운 공간이 잘 보전되고 의미있게 활용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게 된다.

애초에 병실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2층은 방마다 문과 창을 뚫었다 열었다가 고친 자국이 곳곳에 있다.

또한, 삐거덕 소리를 내는 계단과 좁고 긴 오르내림창은 시간을 빗겨 옛것을 낯설게 보여준다.



옛 백제병원은 현재 부산 여행의 핫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바구길' 투어 코스의 첫 지점이다.

앞으로 더욱 멋진 공간으로 변신한다면, 둘도 없는 스토리텔링 관광지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부산역에서도 얼마나 가까운 곳인가.

신기하게도 비욘드 가라지는 여객터미널 바로 앞에 있다.

드나드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운집하고 거기서 새로운 정보와 문화가 움트기 시작한다.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고 있는 부산 원도심에 이들 공간의 재생이 주변 거리를 밝히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견인차 구실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부분이 분명 있다.

행정기관의 지원과 많은 전문가의 협의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 비욘드 가라지(대교창고)

- 위치 : 부산 중구 중앙동
- 규모 : 지상 3층
- 원용도 : 창고시설
- 바닥면적 : 약 530㎡(마당 포함)
- 문의 : (051)244-4676 www.beyondgarage.com

# 옛 백제병원

- 위치 : 부산 동구 초량3동
- 규모 : 지하 1층, 지상 4층
- 연면적 1478.47㎡
- 원용도 : 의료시설
- 현용도 : 근린생활시설
- 문의 : (051)468-7757


동명대학교 실내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