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금정산과 '동래읍성'

금산금산 2015. 2. 4. 10:12

금정산과 '동래읍성'

 

 

 

 

왜의 침략에 맞서 영남을 지켜낸곳

 

 

 

 

                                                                        

                                           ▲ 부산의 대표적인 성인 금정산성1702년에 고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래 금강공원의 송림 안에 들어서면 동래독진대아문이라 쓰인 대문과 마주치게 된다.

본래 동래부 관아 앞에 세워져 있었던 이 대문의 양쪽 기둥에 내걸린 진변병마절제영,교린연향선위사라 쓰인

 현판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일본에 대한 군사 방어의 요지이며 아울러 외교와 무역의 창구라고 하는

두가지 엇갈린 기능을 맡았던 동래부의 역사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글귀다.
 


 금정산성을 고쳐 쌓은 것은 1702년(숙종 28)의 일이었다.

경상도 관찰사 조태동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1백여년이 흘러간 당시 동래 지역의 군사적 방비 태세는 매우 허술했다.

동래부사를 지냈던 어느 관리의 증언에 따르면

동래의 왜관에 머무는 왜인이 많을 때는 1천여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인데도 동래의 군사력은 거의 무방비 상태라서 유사시에 군사적 열세가 예견됐다.

그러나 두차례의 호란을 거치고 북벌의 논의도 좌절된 숙종대 이후,대청관계는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으므로,남쪽 변경의 방비에도 관심을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말부터 금정산성 축성의 논의가 조정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된 까닭은

왜인들의 새로운 동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1678년(숙종 24) 두모포 왜관으로부터 초량 왜관으로 이주한 뒤에 왜인들의 출입이

더욱 활발해지는 것을 우려했던 집권층은 동래의 군사 방어시설에 관해 새삼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금정산성은 금정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그러나 너무 넓어서 수비하는 데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 일찍부터 약점으로 간주됐다.

성을 쌓은지 5년만에 중성을 새로 쌓아서 두겹의 방어선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문제점을 보완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7년 뒤에는 성곽 자체를 포기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후 산성을 복구하자는 논의는 18세기말부터 조정에서 또다시 거론된다.

가파르고 높은 산위에 위치한 철옹성으로서 천연적 요새지라는 점,왜관에 가까이 있어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점 등이 논의 됐다.

적군이 동래부를 점령하더라도 금정산성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에 적을 진퇴양난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금정산성은 영남을 지키는 보루였던 셈이다.

결국 순조 등극이후 동래부사 오한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축조에 나서게 된다.

오늘날 금정구 장전동에 남아있는 금정산성부설비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금정산성에 주둔하는 상비군으로는 승려로 구성된 승군이 배치되었다.

산성 동문 안에 국청사를,남문 안에는 해월사를 지어서 승영을 이루게 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산성의 군사적 효용성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산성을 쌓는 토목공사에는 많은 승려들이 징발되었다.

성을 쌓고 난 뒤엔 사찰도 함께 건립해 승군들이 머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승군에게 부과되는 부역노동은 감당하기 어려울만치 가혹한 것이었다.

이같은 부작용으로 인해 산성부근의 사찰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금정산성의 두 사찰 가운데 해월사의 경우 19세기의 어느 때인가 벌써 폐사의 지경에 달했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는 국청사는 한때 1백칸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했으나

19세기 초엽 한차례의 화재를 겪고 난 뒤 겨우 10여칸의 규모로 재건됐다.

금정산성과 더불어 동래부를 방어하는 대표적 군사 시설이었던 읍성

1731년(영조7) 동래부에 의해 고쳐 쌓아졌다.

임진왜란 직전에 한차례 수선했던 동래읍성은 전쟁을 거치면서 곳곳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다시 있을지도 모를 왜군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산성과 읍성중 어느 편이 효율적인가의 문제를 두고

지배층 관료들 사이에 논란이 잦았다.

당시 산성보다 읍성을 중시하게 된것은 1728년(영조4)의 무신란을 겪은 뒤에

평지 읍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제기되었던 국내 정치적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금강공원 안에 보존된 내주축성비에 따르면 동래부사 정언섭이 부임해 변경의 방어 태세가 허술한 것을 우려,

축성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국왕인 영조에게 이사실을 알렸으며 관찰사 조현명의 지원을 받아 공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축성엔 약 5만여명의 일꾼이 동원됐으며 쌀로 환산하면 대충 1만섬의 경비가 소요된 것으로 전한다.

동래부를 비롯 양산.기장.김해.울산.언양.밀양 등 7개 군현의 농민들이 요역노동에 징발되기도 했다.

많은 승군들도 함께 징발되었는데,경상도 65개 군현에서 차출된 승려들이 주류를 이뤘다.

부사 정언섭은 왕권 강화책을 지지하는 영조의 측근세력인 탕평파에 속한 인물이였다.

영조는 무신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남지역 남인 세력을 제압하는 한 방편으로 동래부사의 지위를 강화하는

한편 직속의 군사력을 보강하고 동래읍성을 개축하는 등 군사적 거점확보에 주력했다.

다시말하면 통치질서를 강화하려 했던 영조의 구상이 동래읍성을 고쳐 쌓게된 정치적 배경이였다.

성 쌓는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관찰사 조현명은 동래성이 완공된 2년뒤

전라도 관찰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이번엔 전주읍성을 쌓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어쨌든 금정산성과 동래읍성은 왜의 침략을 대비하는 방어 시설이었다.

이 가운데 금정산성의 경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 안이 매우 광활해 동래부내의 한고을 백성을 모두 보전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힐만 하다.

즉 유사시 백성들의 힘을 모아 적을 격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를 겪은 역사적 현장으로서 유명한 곳이다.

지금도 금강공원 안에 보존돼 있는 임진동래의총비문에는 동래읍성을 지키다 쓰러져 간 

무명용사들의 출토된 유해에서 적병의 포탄과 탄환이 박혀 있었던 모습을 비감한 문체로 기록해 놓고 있다.

그래서 동래산성과 읍성은 우리에게 귀중한 역사의 현장이자 민족사의 한 구비를

말없이 전해주는 산증인 아니겠는가.


 윤용출 부산대교수 부산경남역사연구소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