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부산진성 서 군.관.민 합동 한치양보없이 끝까지 싸워
조선시대에 부산은 우리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최초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7년간 이어진 일본군의 주둔으로 가장 오랫동안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중 일본군과 치른 최초의 전투는 부산진성전투였다.
부산진성은 지금의 부산진시장 서쪽편의 증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1592년 4월13일 일본군의 고니시 유기나가가 이끈 조선침략 선봉 제1군 1만8천7백명의 대군은
7백여 척의 병선으로 부산포에 침략해왔다.
그들은 14일 우암 부근에 상륙하여 곧바로 부산진성을 공격해왔다.
부산진성은 조선시대에 경상도 해안에 설치되었던 수군 첨절제사의 4개 진영 중
경상도 제1의 해상관문으로 일본군들이 조선에 상륙할 때는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이었다.
한편 부산진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왜관이 있어 일본인들의 제한적인 출입이 유일하게 허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대마도에서 차출된 일본군은 부산의 지리에 익숙할 수 있었다.
부산진성의 민가는 3백여 호로 군민을 다 합해도 실제 병력은 불과 1천여 명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첨사 정발을 위시한 부산진성의 군.관.민은 문자 그대로
혼연일체가 되어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조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군의 무기는 활과 화살이 고작이었다.
전투는 부산진성의 북쪽으로 일본군이 난입하자 백병전으로 전개되었으며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직전에 부임하여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한 정발은 일본군에 의해 임진왜란 중 가장 용감하게 싸운
조선인 장군으로 칭송되었으며 검은 전투복을 입고 싸웠기 때문에 흑의장군으로 불리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전투에서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개와 고양이까지도 죽여버리는 잔혹함을 보였다고
대마도주의 종군 승려 천형은 "서정일기"에 생생하게 새겨 놓았다.
부산진성 전투의 자취를 찾아보면,지금의 좌천동 가구거리 서쪽에 위치한 정공단,오늘날의 부산이란 지명을 낳은 증산이 자리했던 바로 그 자리에 지금은 아파트 건축 등으로 원형을 거의 잃어버린 부산진성터,변박이 모사해
그린 부산진순절도에서 어렴풋이나마 당시를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동래로 진출했다.동래부사는 문관 출신의 송상현이었다.
송상현의 수성계획은 지역의 병권을 가지고 있던 경상좌병사의 군과
인근 군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싸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상좌도의 육군을 책임진 병사 이각은 도망쳐 버렸고
부산의 해안방어를 책임졌던 경상좌도 좌수영의 수사 박홍도 부산포에 적이 닥치자 마자
성을 버리고 달아난 뒤였다.동래성은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전투에서 조선민의 굳센 항전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동래성을 세 방면에서 포위.공략했다.
이에 송상현은 "전사역 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이라고 써 결사항전을 표시하였다.
지금도 이 글귀는 충렬사 내의 제각 앞 화강암에 새겨져 있어 국난극복에 솔선수범했던
공직자의 자세와 충직한 삶의 모습을 되새기게 한다.
사실 송상현은 붕당정치의 폐해로 관료들이 기피하던 동래부사에 기꺼이 부임하여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한 인물이었다.
동래성 전투는 15일에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동서남 세 방면에서 조총을 난사하며 공격하던 일본군에 맞서 동래의 군민은 활과 칼,
심지어 막대기나 괭이를 들고 기왓장을 던지며 싸웠으나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함락시의 처참함은 임진왜란 17년뒤 동래부사로 온 이안눌이 4월14일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 물어보니
"곡해 줄 사람이 있는 것은 슬프기가 덜한 것이니 휘두른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다 죽어서
곡해줄 사람조차 남지 않은 집이 얼마인지 모른다"고 한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동래부민은 모두가 퇴각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당시 송상현은 통신사의 일행으로 내왕한 바 있던 일본군의 평조익이 피신하라고 하였으나 끝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
동래성전투의 흔적은 지금의 시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동래부의 치소가 있었던
현 동래시장에 자리한 송공단,박정희정권 때 대대적으로 정비된 안락로터리의 충렬사,
조선시대에 동래의 요충을 감싸안고 있었던 동래읍성터, 동래부순절도 등이 있다.
지하철 교대역 옆 온천천에 걸쳐진 세병교는 병사들이 씻었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김강식.부산경남역사연구소연구원 부산대강사
'과학·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 다시 읽기] 괴테 '파우스트' (0) | 2016.04.05 |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동척'과 미문화원 (0) | 2015.02.25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봉수대' (0) | 2015.02.11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금정산과 '동래읍성' (0) | 2015.02.04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부산의 '고려유물'ㆍ유적 (0) | 2015.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