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동척'과 미문화원

금산금산 2015. 2. 25. 12:32

 '동척'과 미문화원

 

 

 

 

식민지땐 `동양척식` 부산지사 자리

 

 

 

 

                                                                        

 

 

 

 

최초의 개항지인 부산은 일본인이 처음으로 활동한 무대였으며

일제는 일찍부터 식민지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부산에는 다른 도시보다 일제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관" 등의 지명을 비롯,각종 구조물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실제로 구 부산시청,검찰청 등을 비롯해 광복동의 상가,동광동의 회사.은행.저택,신창동의 양조장,

부평동의 미곡시장,대교동의 창고,충무동의 어시장,보수동의 주택 등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구 부산시청의 경우 건축 당시 부산.경남지역에서는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인근 주민들이 이것을 타보기 위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엘리베이터에는 얼마전까지 미쓰비시라는 영문상호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이중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가 미문화원이다.

이곳은 일제의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회사(동척) 부산지사였다가

한미관계의 상징인 미문화원으로 탈바꿈하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동척은 일본의 특수회사의 하나로

토지수탈과 착취로 가장 나쁜 인상을 남겨준 일제의 착취기관이었다.


 1908년에 창립된 동척은 처음 서울에 본사를 두었으나 1912년 업무를 확장,본점을 동경으로 이전하였다.

그이후 조선반도에만 국한하였던 침략 및 착취의 대상과 범위를 아시아 일대로 확대하기도 했다.


 동척의 토지는 출자지와 매수지를 합해 9만여 정보에 달했는데

일본에서 모집해온 이민자에게 1만여정보를 양도했다.

이들 이민자는 경기 경상 전라도 순으로 많았는데

민중을 착취 억압하던 일제의 유일한 대변자이며 앞잡이 역할을 담당했다.


 수탈과 착취의 대명사인 동척 지점이 부산에 설립된 것은 1921년 11월이었다.

이후 동척 부산지사는 해방 직후까지 부산.경남지역에서 13개소의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곳에서 수탈한 소작료만 연평균 5만섬을 상회했다.

즉 부산.경남지역에서 재법 넓은 들은 거의가 동척소유 농장이거나 일본인 지주의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해 9월7일 동척관리위원회 부산지부(위원장 민재우)가 조직됐으며

같은해 11월12일 신한공사로 개칭되었다(46년 7월 해제령).

당시 군정 농상국장은 미곡공출은 철폐하겠다고 밝히면서도

항간에 널리 퍼져 있던 소작료 3.7의 율을 부정하며 끝까지 수탈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 소유토지의 소작료는 전 수확고의 3분의 1을

반드시 현물로 신한공사에 납부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방침 때문에 동척의 후신으로 등장한 신한공사조차도 당시 농민들의 신망을 받지 못했다.


 한편 1945년 9월16일 미 24군단 제40사단의 병력 약 3백여명이 부산에 진주했다.

부산에 도착한 미군 선발대는 당시의 철도호텔과 동척 부산지사,부산부청 제1회의실 등의

10개소를 숙소로 접수하였다.

그 후 그들은 당시 일본인들이 경마장으로 사용하고 있던

하얄리아 부대와 현55보급창을 비롯하여 각 학교 건물 및 구 상공회의소를 징발해 사용했다.


 부산 중구 대청동 2가 24 대지 4백43평에 3층짜리 건물인 미문화원이 들어선 것은 49년 7월이었다.

즉 이곳에 미 국무부 산하 미국해외공보처(USIS)기관으로

부산미문화원(현 부산근대 역사관)이 들어섰던 것이다.


 미문화원은 이후 부산과 경남,제주지역을 대상으로 미국정책 홍보를 표방하며,

60년대는 주로 영화,연극 등 문화사업을 통해 70년대 이후는 주로 대학생들을 겨냥한 도서대출과

어학연수,미국 대학 소개 등을 통해 미국의 이해와 문화 확산에 주력해왔다.

그런데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대학생과 재야의 반미 감정이 거세지면서

미문화원은 각종 시위와 점거사건이 끊이지 않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즉 지난 82년 3월 한미수교 1백주년에 즈음한 부시 미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문부식 등에 의해 주도됐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해방이후 최대 반미시위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86년 5월과 12월,91년 2월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대학생들에 의한 점거농성과 점거기도가 이뤄졌으며

부산지역 대표적 시위명소가 돼 경찰 1개 중대가 상주 경비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왔다.

사실상 미국이 부산시내 각 요지에 무상으로 차지하고 있는 곳을 꼽아보면 앞에서 열거한

미군 기지를 제외하고도 부산미문화원과 부산시 주한미국원조사절단(6백평) 등이 있다.


 이에 따라 "부산 미문화원 건물 반환 범시민추진위원회"는 지난 96년 "미국이 이번에도 건물 전체를 반환하지 않을 때는 우리 국민의 전면적 저항에 당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반환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같은 시민적 요구로 인해 같은해 10월1일 미문화원은 개설 47년만에 폐쇄됐다.

이에 지속적으로 전개돼 온 미군기지 및 시설의 이전 및 반환을 위한 부산시민들의 노력은

더욱 더 활기를 띠고 전개되고 있다.

지난 97년 1월8일 하얄리아부대 부지 반환을 둘러싸고 내세운 조건과 관련,미국에 대한 강력한

규탄성명이 발표됐다.

범시민 추진위는 "수천만평의 우리 영토를 반세기 가까이 군사기지로 무상사용하고서도

오는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이 건설될 하얄리아부대 부지 반환을 볼모로 엄청난 요구조건을

내세우는 것은 제국주의적 본성"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범시민 추진위는 정부와 부산시가 전 아시아 회원국들에게 미국의 이같은 횡포를 폭로,미국의 방해로

아시아경기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개최권을 반환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즉 미국측은 해방과 동시에 일제 식민지 수탈의 첨병역할을 했던 동척 건물을 접수,

근 1세기동안 미문화원으로 사용한 것은 물론,도심의 수만평 땅을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하얄리아부대 부지반환을 늦추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박철규 동아대강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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