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부산의 '고려유물'ㆍ유적

금산금산 2015. 1. 28. 20:53

부산의 고려유물ㆍ

 

 

 

유적세련미 없지만 곳곳에 기층민 염원 담아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관심만이 아니라 문화유산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높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고대사나 조선시대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려시대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이다.

"대륙"에 대한 환상과 함께 다양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고대사와

오늘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은 조선시대사에 비해 고려역사는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한국사에서 전형적인 중세의 역사상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필수적이다.

다음으로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태도나 자세에서 무조건 오래된 것일수록 그 가치가 높다는

식의 일면적 평가나 시각을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문화재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고르게 하면

대개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불국사의 다보탑을 꼽는다.

그리고 문화유산 가운데 특히 그것이 불교미술이라면

그 건립 시기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인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그런데 한국사에서 불교가 가장 성행하고 발달하였던 시기는 고려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고려시기를 대표하는 문화재를 연상하면 흔히 청자를 떠올리게 되지 불상이나 석탑 등

불교미술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면 고려의 불교미술이 그렇게 미적 수준이나 가치가 낮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 장황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나 평가는

무엇보다도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이 한국미술사의 고전이나 모범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각 시대마다 문화유산은 그 시기의 시대성과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문화유산을 조성한 주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아울러 그것은 계층의 문제만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차이와도 연관된다.

즉 통일신라의 경우,석굴암의 불상이나 불국사의 석탑은 왕실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세련되고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조형적 완성도가 높다.

반면 고려시대의 불상이나 불탑은 먼저 미적인 측면에서 이전 시기와 달리

그렇게 세련되지도 않으며 조형적 완성도만으로 따지면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화유산은 그 나름의 시대성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각지에서 조성된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한 불상이나 신라말 이후 유행하였던 철불 등은

각 지역 토착세력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각 지역의 기층민이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나 염원을 담아낸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부산지역 역사에서 고려시대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데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즉 가야나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시대의 문화재나 구체적인 자료는 희귀하다.

따라서 부산의 역사에서 고려시대의 전체상을 그리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 빈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양적,질적인 빈곤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려시대의 부산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의미가 무시되거나 축소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고려시기의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만덕사 절터가 있다.

만덕사가 언제 창건되었으며 어떻게 퇴락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사"에 충혜왕의 서자 석기를 만덕사에 유폐시켰다는 기록과 현 만덕동에 절터가 있으며

또한 석기와 관련된 자들을 동래현령으로 좌천시킨 사실이 나온다.


 이를 보면 만덕동의 절터가 바로 만덕사지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만덕사는 그후 "동국여지승람"이나 각종 지지에 더 이상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까지 존속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아마도 고려말 극심한 왜구의 침략에 따른 방화로 소실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지난 79년에 절터에 남아 있던 석재를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수습하였고 그 중에서 3층 석탑 1기를 복원했다.

또한 절터를 동서로 관통하는 만덕로의 길 아래 덕천천 냇가에 당간지주가 한쪽 기둥만 남아 있었다.

최근 부산시립박물관에서 금당지로 추정되는 곳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다양한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그 가운데 기비사라 적힌 명문 기와가 들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만덕동의 절터는 석기와 관련된 만덕사가 아니라 기비사라는 주장도 있으나

처음 창건될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 여러 차례 증축되고 개축되었던 사실로 보아

좀더 깊은 조사와 검토가 절실하다.

현재 온천동의 망미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방유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5층 석탑이 풍우를 견디고 있다.

탑의 높이는 4.2m로서 약간 고준한 감이 있으나 안정감은 충분하다.

다도계의 원로이신 금당 최규용 선생이 지난 78년에 펴낸 "금당다화"에 따르면

이 석탑의 소장자는 광산업을 경영하였던 이운송옹이라고 밝혔다.

이 탑이 개인 소장품으로 잘 보관되어 있는 게 다행이지만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못내 아쉽다.

강서구 범방동의 3층 석탑은 지방유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2중 기단의 3층 석탑인데 상층 기단의 면석 한 장과 3층 옥신석이 없어지고

탑 머리는 노반이 남아 있어 현재 높이 2.7m의 작은 탑으로 변모했다.

옥신석의 높이가 2층에서 크게 줄어들었으며 일부 결실된 부분이 있으나

신라 석탑양식으로 조성된 아담한 탑으로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께 이 탑의 1층 탑신에서 사리장치와 기단 안에서 불상 1구가 도굴되면서 탑도 무너졌으나

동민들이 이를 재건하였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이밖에도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삼정리 탑골 대곡사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수습,

현재 부산대 박물관 수장고 옆에 있는 5층 석탑과 원래 경남 합천군 대병면 상천리의 폐사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지난 60년 동아대 박물관으로 이전,복원한 3층석탑이 있다.

이러한 폐사지나 석탑 말고도 고려시대의 유적으로 각종 분묘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사직동 석곽묘 유적 만덕동 망미동 연산동 구포동 거제리 명장동 등의 분묘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분묘에서는 청동제 생활 유물과 각종 도자기 등이 조금 출토되었고

대부분 도굴돼 파손이 심각한 상태로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명제.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