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여행

[시장따라 골목따라] 영도다리 밑 '점바치' 골목

금산금산 2015. 4. 4. 14:24

영도다리 밑 '점바치' 골목

 

 

 

 

한때 50여 점집 성황 '유명세'

 

 

 

 

 

 

 

산통(算筒)을 쥐고 흔드는 야윈 손이 가늘게 떨린다.

50여년의 세상 모든 일이 그의 손에서 짚어지고,산가지(算木)의 점괘대로 뚜르르 꿰였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래도 한 시절 대장군의 신(神)을 모셨음에도 지금은 그 위엄과 여유마저 사그라진 느낌이다.

시대와 시대를 가로지르며 산통마저 무겁게 느껴지는 그의 육갑(六甲) 짚는 손이 안타깝기만 하다.
 


영도다리 밑 '점바치 골목'에는 아직도 점(占)을 치는 점집이 6곳 있다.

이제는 세월의 먼지가 앉을 대로 앉아 '점바치 골목'이란 말조차도 생경스럽기만 하다. 


부산에서도 가장 점 잘보고 용하기로도 유명했던 이 곳.

한 때는 50여 점집이 성황을 누렸고,점을 보려면 으레 '영도다리 밑으로 가봐라' 할 정도로

 부산의 대표적 점집 골목이었다.

그러던 곳이 이제는 한 평 남짓의 점집에 연로한 점술인들만 서로를 의지한 채,

서민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의 기억만을 쌓아두고 앉아 있다.


그나마 남향의 유리창으로 들어온 따사로운 햇볕이 동무해 주기에 다행스럽기는 하다.


'점바치 골목'의 역사는 '6.25동란과 피난(避難)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그 시절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은 흩어진 가족들을 찾기 위하여 모두 영도다리로 몰려들었다.

영도다리 난간에는 가족을 찾는 벽보가 어지러이 바람에 흩날리고,그 벽보 하나하나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그들은 춥고 외로운 피난지에서의 기약 없는 가족상봉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 때 다리 밑에 모여 든 수많은 점술인들은 가족의 소식을 묻는 피난민들에게 점을 봐주며,그

들을 도닥이고 내일을 안심시켜 주곤 했다.

그들로 인해 피란민들은 그 질곡의 시절,

불확실한 미래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 성황을 이루던 '좌판'의 점바치 골목이 '판자집'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골목이 더욱 쇠락하고 점술인들이 무거운 세월의 옷을 덧입었다는 것 외에는,흑백의 정물사진을 보는 듯 하다.


그래,이 곳은 흑백사진 시절이나 디지털사진 시절이나 관계없이,늘 흑백의 이미지이다.

한 평 남짓의 어두운 점집이 그렇고,조악한 글씨의 페인트 입간판 글씨가 그렇고,

그들 얼굴에 깊이 패여 있는 주름과 회한의 그늘이 흑백사진의 그 것과 일치한다.

벌써 40~50년씩 이 곳을 지켰으니 그들 어깨에 앉아 있는 세월의 무게도 벌써 70~80년은 족히 지난 모양이다.


'소문난 점집','거북점집','스님철학원','목화철학원','소문난 대구점집','장미화 철학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점집의 이름들이다.

제 이름들을 써놓은 유리 여닫이문이 덜컹덜컹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다시 찾아 온 이 골목의 하루는 제법 온기가 돈다.

세밑이라 그럴까? 곳곳에서 점 보러 온 사람들이 많이들 앉았다.

괜히 가슴이 따사롭다.


이 골목은 주로 육효점 전문인데 작명,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곳도 있다.

특히 가출한 사람들의 생사나 행선지,소식 등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춘다고 한다.


그러나 자그마한 입간판에는 욕심스럽게도 사주,신수,궁합,택일,육효,병점,안택,관재,소원,매매,시험,해몽,이사,행선,가출 등 숨 가쁠 정도로 점의 내용을 가득 써 놓았다.

그래서 더욱 정이 가고 순박한 사람들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서양식 점의 일종인 타로카드점이 한창 인기다.

이제는 점마저도 시대적 임무에 따라 새로운 소통과 단절이 극명해 진 것이다.


이 골목에서 짚는 개인사의 육갑은 어떨지 모르겠으나,이 시대가 짚는 세월의 육갑이야

이제 그들도 거스를 수 없게 됐다. 무기력한 인간의 애타는 속내만 애꿎다. 



 최원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