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물금 광산'을 아시나요?
70년대 철광석의 보고 '양산 물금광산' 관광지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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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양산시가 한때 부산 경남의 최대 광산이었던 '물금광산'을 관광자원화 할 계획이어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사진은 1960년대 당시 광산 모습과 현 위치도. 양산시 제공·정태백 기자 |
'경남 양산이 철광석 도시였던 사실을 아시나요?'
1천여 명의 광부들이 몰려 광산 일대가 '문전성시'를 이뤘는가 하면
밤낮의 구별이 없을 정도로 주변이 활기를 띠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1962년 문 열어 연간 20만t 채굴
깊이 500m에 총 길이 18㎞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
생산성 점점 떨어져 91년 폐광
시, 갱도 개방 등 관광 자원 추진
한때 부산 경남의 최대 광산이었던 '물금광산'이 양산시의 관광자원화로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양산시가 옛 영광을 지녔던 물금광산과 그 주변의 관광지를 연계한 관광자원화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철광산 도시'의 재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시는 우선 이 일대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한 사전단계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전국 공모사업 신청을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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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갱도 입구. |
■ 물금 철광산은 어디에
승용차를 타고 부산 화명에서 양산 물금을 지나 원동을 가다보면 1022호 지방도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노래한 임경대가 나온다.
임경대 바로 밑으로는 경부선 철길 물금역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전국 자전거 동호인이면 누구나가 절경 중에
절경으로 꼽는 황산 베랑길이 나온다.
이 베랑길과 임경대 사이에 물금광산이 있다.
행정구역상 위치는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산 72로, 물금과 맞닿아 있다.
이곳에 당시 철광석 원석을 캐낸 커다란 광산 갱도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갱도 입구에 물금 레미콘공장이 위치해 일반인들이 쉽게 터널 입구까지 접근하기 어렵지만
높이와 너비가 족히 4m는 넘을 듯한 원형에 가까운 큼지막한 갱도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갱도 속 20여m 안쪽에 시멘트로 막아놓은 상태다.
또한 이 광산 주변에는 아직도 당시 광부들이 휴식하던 휴게실과 작업을 위한 기계실, 사무실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 등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양산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50대 이상이 아니면 "우리 고장에 그런 곳이 있느냐"고 되물을 정도로
잊혀진 장소이다.
하지만 이 광산은 7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유명했다.
이 광산 덕분에 당시 물금 일원은 양산 전역에서 가장 활기를 띤, 지금으로 말하면 '경제특구'의 역할을 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이곳 일대는 '밤낮의 구별'이 없었을 정도로 활기와 '화려함'이 있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국내에서 '희토류(稀土類)'와 '광석'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옛 광산을 중심으로
광석 탐지활동도 활성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곳 물금광산에도 다시금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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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당시 철광석을 화물열차에 싣고 있는 모습. |
■ 규모는 국내에서 두 번째
개인 소유였던 물금광산은 1959년 개발에 나서 1962년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60년대 중반까지 연간 12만t을 생산하다 60년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연간 평균 20만t을 유지했다.
물금광산에서 생산된 철광석은 자철광과 적철광 등 고품질로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다.
품질은 물론 생산량으로 볼 때 강원도 양양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 크기의 철광산이었다.
깊이 500여m에 길이가 짧게는 500m에서 길게는 2㎞에 이르는 갱도가 9개나 있다.
갱도 총길이는 18㎞로, 낙동강 밑을 통과해 김해 상동까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는 게
당시 광산일에 참여한 이들의 전언이다.
광산이 활기를 띠면서 광부의 삶을 위해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몰렸다.
70년 초,중반 최고 생산을 기록할 때 광부수가 1천 명을 훌쩍 넘었다.
당시 이곳 광산에서 일한 박성환(80.양산시 물금읍) 씨는
"그 당시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광산 때문에 물금 일대의 경기는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교대근무를 마친 광부들이 고단함을 풀고 목을 적시기 위해 물금 강변에 있는 선술집을 많이
이용했다"며 "일대 술집이 장사진을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역시 당시 물금에서 식당일을 도왔다는 김금분(78.여) 씨는
"그때 광산에 일하러 온 사람은 지역민 보다는 오히려 충청도, 전라도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더 많았다"며 "식당과 술집에는 광부들로 넘쳐나 물금 일대가 늘 북적댔다"고 말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철광산도 80년대 후반 들어 급격히 쇠락했다.
갱도의 깊이와 길이가 계속 늘어날수록 투자비용이 증가한 반면 생산량은 줄어들었다.
여기에다 87년 이후 노동계 목소리가 커지면서 광산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해마다 급증하는 임금 인상에다 광산의 특성상 항상 존재하는 사고 등으로 비용이 급증했다.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결국 1991년 최종 폐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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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당시 인부 숙소로 사용한 건물의 현재 모습. |
■ 관광자원화로 부활 움직임
양산시는 최근 들어 광산을 활용한 영광 찾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광산을 관광자원화 하려는 목적에서다.
양산시 최재영 문화관광국장은 "아직은 초기단계지만 물금광산의 활용방안을 놓고 연구가 진행 중"이라면서 "국비 지원 요청과 함께 전국 폐광에 대한 벤치마킹 등을 통해 다양한 활용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가 물금광산의 관광자원화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관광도시'를 표방한 시 정책과 괘를 같이 한다.
시는 현재 관내 통도사와 내원사 등 사찰과 신기리 고분군, 천혜의 휴양관광지인 배내골과 자연휴양림,
법기수원지 등 볼거리와 체험형을 연계한 관광코스 개발에 한창이다.
이 중에서 물금광산은 황산문화체육공원과 원동매화 및 미나리축제, 원동자연휴양림, 배내골로 이어지는
'양산 낙동강 관광벨트'의 핵심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는 아직 구체화 되지는 않았지만 광산 갱도 200~300m 구간을 개방해 상설 전시장과 함께 와인터널 등
주민휴식과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또 당시의 시대상을 담은 테마파크 등도 계획하고 있다.
잊혀진 장소이자 민초의 애환이 담긴 어둠의 물금광산이 관광자원화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태백 기자 jeong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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