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묻힌 채 초라한 추모비뿐인
'독립투사 김형기'
사상 태생 경성의전 출신 의사, 3·1 만세운동 주도하다 옥살이
- 영주동 병원은 항일거점 역할
- 벌어들인 돈은 의열단에 보내
- 6·25때 정보원에 끌려가 행불
- 현재 재평가·추모사업 전무
- 유족 “지역서 관심가져주길”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많은 이가 있었다.
옥고를 치르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쳤다.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한 희생이었다.
목놓아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 제99주년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부산 동구 좌천동과 수정동 일대에서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이 재현되고 있다. 1919년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가 함께한 만세운동은 부산지역 만세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서정빈 기자 photobin@ |
그런데도 까맣게 잊힌 위인이 많다.
부산 사상구 출신의 동산 김형기(사진) 선생도 그중 한 명이다.
1896년 8월 9일 사상구 모라동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이던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연계해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 일로 당시 독립시위와 관련된 207명의 학생 중 최고형인 1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후 중구 영주동에 동산의원을 열고
그 수입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부산·경남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맡은 김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정보기관원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됐다.
3·1운동을 주도한 부산의 독립운동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1990년 유족의 노력으로 어렵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을 뿐
그를 기억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1998년 김녕 김씨 유두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재실에 세운
초라한 기념비만이 유일하게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조직적으로 그를 추모하는 사업은 없다.
지난해부터 사상생활사박물관 소속 주민공동체에서
10여 명이 함께 헌화하는 것이 전부다.
유족은 김 선생의 공적이 지역에서조차 외면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현재 김 선생의 자녀는 딸 2명, 아들 1명이 생존해 있지만 모두 90세가 넘은 고령이어서 의사소통이 힘들다.
김 선생의 조카인 김덕규(82) 씨가 홀로 ‘백부’의 일대사를 정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다.
김 씨는 “백부께서 독립운동을 하며 자금을 의열단에도 보냈다고 하는데 은밀히 진행돼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며 “혼자서 자료를 찾고 백부를 기리려고 하니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는 김 선생처럼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로 몰려 빛을 보지 못한 애국지사들을 위해서라도
지역에서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해방 후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많이 연행됐다.
친구도 김 선생 얘기만 나오면 돌아앉았을 정도”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임에도
재평가는커녕 관련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역과 학계에서 관심을 갖고 역사를 바로잡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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