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1980년 5월의 광주],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금산금산 2018. 5. 18. 09:19

보고 들은 얘기 영화화…1980년 5월의 광주,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박기복 감독






- 친구·시민 펀드 후원받아 촬영
- 5·18은 국가 폭력에 의한 사건
- 상처받은 사람들 이야기 재조명
- 아직도 책임자 처벌 안돼 답답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곡이자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대표하는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목으로 한

 영화 한 편이 38주년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극장가를 찾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개봉 16일)은 1980년 5월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던 법대생 철수(전수현)와 형사에게 쫓기던

 미대생 명희(김채희)의 이야기와 2018년 현재, 1980년 5월 광주에 멈춰있는 명희(김부선)와

 그녀가 원망스럽기만 한 딸 희수(김꽃비)의 이야기를 교차로 그린 영화다.



   

1980년 5월 광주와 당시의 상처를 지닌 현재의 인물을 통해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출한 박기복 감독. 

 이용우 기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출한 박기복 감독은 지난 14일 본지 서울본부를 찾아

 “1980년 5월 광주를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고, 영호남이 연결된 열린 공간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은 5월 광주의 피해자 가족인 희수의 시선으로

 5월 광주에서 군부독재 타도·민주화를 외친 사람들과

 지금도 당시의 기억으로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한다.

지금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친구가 준 100만 원을 씨앗으로, 스토리펀딩으로 후원해준 3500명의 시민과

 진정성 있게 촬영에 임해준 배우와 스태프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이야기를 박 감독에게 들었다.



-1980년대 5월 18일 광주에서 실제 보고 들은 일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경험이었나?

▶당시 고3으로 화순에서 광주로 통학을 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청바지를 사러 광주에 나왔는데, 금남로 가톨릭센터(현재 5·18 기념관)에서 대학생들이

 연좌농성을 하고 있더라.

서너 시간 후에 청바지를 사고 집으로 가는데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유동사거리 병원 앞에 남녀 7명이 쓰러져 있었고, 계엄군이 사람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치는 것을 봤다.

움직이지 못하게 머리를 먼저 내리쳤는데, 그 곤봉은 총과 칼보다 더 무서웠다.

계엄군이 우리 버스를 세웠는데, 운전사가 멈추지 않고 바로 화순으로 왔다.

5월 광주는 국가폭력에 의한 집단 살인, 강간, 시체유기가 벌어진 사건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떻게 시작했는가?

▶박근혜 정권 때 시작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영화화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광주정신을 계승하려면 어려운 상황에서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투자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충호라는 친구가 영화의 마중물이 된 100만 원을 줬는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100만 원은 친구가 저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고, 그래서 ‘가보자’고 힘을 얻게 됐다.

이후 다음 스토리펀딩으로 3500명의 일반 시민 분들이 후원금을 내주었다.

촬영 중에는 선후배들이 스태프들의 밥을 사주면서 응원해줬다.



-1980년 5월 광주 장면의 주인공인 전수현, 김채희 씨는 오디션으로 선발했다.

 어떤 기준이 있었나? 두 배우 모두 세련된 외모를 지녔다.

▶역발상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80년대 인물들은 촌스럽게 그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돌 같은 얼굴을 했으면 했다.

그러다 두 배우를 발견했다.




-전수현 씨가 연기한 철수는 부산 출신인데 광주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다. 그런 설정을 한 이유가 있는가?


   
1980년 5월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 철수와 명희, 그리고 현재도 5월 광주에 멈춰있는 명희와 그녀의 딸 희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 무당벌레필름 제공

▶영호남이 같이 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의미로,

 지역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실은 앞에 부마항쟁을 보여주고 5월 광주로 오려고 했는데

 제작비가 모자라서 촬영하지 못했다.

1960, 70년대 광주 부근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먹고 살려고

 2차 산업 붐이 일었던 부산이나 대구로 갔다.

영화적 설정으로 광주 출신인 철수 아버지가 배를 타러 부산에 갔다가

 부산 여성과 결혼해 철수를 낳았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전수현 씨는 광주 출신이라 부산 사투리를 배워야 했다.

▶수현이는 촬영 전에 부산 출신 친구와 함께 지내며 사투리를 배웠다.

우리와 대화할 때도 부산 사투리를 썼다.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



-영화 후반에 금남로 전일빌딩 헬기 기총 사격 장면이 등장한다. 지난해 헬기 기총 사격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바 있는데, 그 전에 시나리오를 쓴 것인가?

▶이슈가 되기 한참 전에 쓴 첫 시나리오부터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제 영화에서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 장면은 컴퓨터그래픽이 사용됐는데,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 장면만 5개월 넘게 작업했다. 개봉이 늦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진 않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포 책임자임을 암시하는 장면도 있다.

▶5월 광주가 아직도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책임자 처벌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포 명령자가 누군가인지를 보여준다.

발포 명령자를 적시하면서 과거가 정리되어야 미래가 있다.

이대로 100년이 지나면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

우리는 직접 보고 현장에 있었는데, 당사자들이 인정을 안 하니까 답답하다.

특히 ‘북한군이 내려와서 벌인 일’이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들으면 화가 난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가 됐으면 하는가?

▶당시를 경험한 세대와 더불어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봐 줬으면 한다.

직간접적 국가 폭력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또 변방의 산골에 있는 영화사의 작품이 전국 개봉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일개 개인이 만든 영화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하는 후배들이 저 같은 사람을 주시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다.

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