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은신치~큰목재~수망령'
산은 물을 넘지 못해도 사람은 고개를 넘는다
남덕유산서 월봉산 거친 진양기맥의 큰 고개들
황석~거망, 금원~기백 능선 갈리는 중요 지점
용추계곡 가장 깊은 속살 느끼는 10㎞ 회귀코스
덕유·지리·가야산 모두 보며 걷는 행복한 산길
산행 도중 거치기 마련인 재, 령(嶺), 치(峙). 표현은 달라도 모두 고개를 일컫는 말들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령'은 주로 큰 산맥을 가로지르는 고개의 이름에 많이 붙인다.
백두대간의 한계령 죽령 조령 이화령 추풍령 육십령 등이 좋은 예다.
'령'의 또 다른 특징은 길이 넓고 사람의 왕래도 많다는 것이다.
정령치 팔랑치 월성치 등에서 볼 수 있는 '치'는 원래 '높은 언덕'을 뜻하는 말로,
대부분 산등성이의 낮은 곳에 있는 길목 정도로 쓰여서 '령'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 고개로 통한다.
하지만 구분이 명확하게 이뤄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재'의 경우는 말 그대로 고개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하늘재 댓재 바람재 등 주로 우리말과 함께 붙여 명명된 경우가 많다.
물론 오도재 성삼재 등과 같이 한자어와 결합된 곳도 없지 않다.
문경 새재를 조령(鳥嶺)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말이 한자어로 변하면서 '령'이나 '치'가 붙기도 한다.
사실 뚜렷한 구분을 짓기란 힘들다.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이 경남 함양의 월봉산 아래 고개인 은신치~큰목재~수망령을 모두 잇는 산행을 하고 있다. 취재팀 뒤로 거망산(오른쪽)에서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중간의 용추계곡, 왼쪽의 기백산 자락이 모두 드러난다. |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고개라고 하면
응당 사람이 왕래하는 산길이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능선길뿐 아니라 능선의 이쪽과 저쪽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어서
4거리가 돼야 감히 고개라고 할 수 있다.
뜬금없이 고개 이야기부터 장황하게 꺼내 놓은 것은
이번 주 산행을 바로 '고갯길 잇기' 원점회귀 코스에서 펼쳤기 때문이다. 높고 험준한 산들이 첩첩이 둘러쳐져 '천령(天嶺)'이라고 불리는
경남 함양 고을의 월봉산(月峰山·1279.2m) 남쪽에 위치한
은신치(隱身峙)~큰목재~수망령(水望嶺)을 잇는 가벼운 코스다.
용추자연휴양림을 기점으로 삼는 이번 산행은 거리도 짧고 수월한 편이다. 그러나 이들 고개가 갖고 있는 의미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진양기맥이
남령에서 잠시 쉬었다가 월봉산을 거쳐 함양 안의면의 용추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큰 산줄기로 나뉜다.
용추계곡의 동쪽은 금원산(금원산·1352.5m) 기백산(箕白山·1330.8m)으로 이어지는 진양기맥 주능선이고
서쪽은 거망산(擧網山·1184m) 황석산(黃石山·1190m) 줄기라는 것은 웬만한 산꾼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이 두 개의 큰 산줄기가 나뉘는 곳이 바로 큰목재고 이 갈림목에서 서쪽의 거망~황석산 능선으로 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사거리 고갯길이 은신치, 동쪽 금원~기백산 능선으로 가다가 만나는 첫 사거리 고갯길이 수망령이다.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
고갯길이지만 해발 1100m 안팎의 결코 낮지 않은 능선을 잇기 때문에
능선 산행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헌걸찬 능선과 첩첩이 싸인 산줄기들을 바라보는 조망 또한
황홀할 지경이니 산행의 행복은 배가 된다.
또한 곧 단풍으로 물들 용추계곡의 경관은 덤이다.
여름철 서부 경남의 대표적인 계곡 피서지로 이름난
함양 안의의 용추계곡 깊숙한 곳에 용추자연휴양림이 있다.
이곳이 들머리 겸 날머리다.
코스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휴양림관리사무소~은신골 입구~
은신암 입구~은신치~1116.3봉~1122봉~GPS상 1141봉(전망대)~
1178봉~큰목재삼거리~928봉~수망령~장수동~은신골 입구~
휴양림 관리사무소 순.
총거리 10㎞,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3시간40분쯤 걸린다.
휴식 시간 합쳐 4시간30분 정도면 마무리할 수 있다.
함양이나 거창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용추폭포와 용추사 입구인 장안사 조계문(일주문)까지 운행한다.
계곡 좌우로 황석산~거망산 줄기와 금원산~기백산 줄기가 호위하듯 둘러싼 모습이 장관이다.
일주문에서 휴양림까지는 계곡 오른쪽 임도를 따라 2.5㎞가량 걸어가야 한다.
차량을 이용할 경우 휴양림까지 진입할 수 있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별도로 부담하지 않는다.
관리사무소에서 계곡을 끼고 임도를 따르다 보면
10분 후 방갈로 못 미친 지점 왼쪽에 인공으로 만든 작은 폭포가 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높이 8m 정도의 가느다란 인공 폭포수가 앙증맞다.
5분 후 은신골 입구다.
월봉산 등산안내도를 일별한 후 다시 20m쯤 되돌아 내려와 계곡 왼쪽 목제 덱을 타고 지류인 은신골로 들어선다.
큰목재 삼거리의 이정표.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월봉산 남덕유산이다. |
작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아주 완만해 마치 산책을 하는 기분이다. 최근에 비가 많이 내린 덕분에 계곡물이 넘쳐난다.
산죽밭을 지나고 계곡을 서너 차례 건너기도 하면서
은신암 입구 이정표까지 오르는 데는 30분이면 족하다.
둥치 굵은 활엽수들이 만들어내는 짙은 그늘 속을 걷기에
아무리 햇볕 강한 날일지라도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은신암은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4대문과 궁궐 축조를 담당했던 무학대사가
말년에 몸을 숨기고 수도하다가 생을 마감한 암자다.
'몸을 숨겼다'는 뜻의 암자 이름도 무학대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60년 전 발발한 6·25전쟁 때 암자가 전소되는 해를 입고 현재까지도 옛모습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른쪽 200m 지점에 있는 은신암은 거망산 산행 당시 둘러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곧장 은신치로 향한다.
이슬방울인지 빗방울인지 알 수 없는 물기를 미처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키 작은 산죽들 새로 난 완만한 길을 따라 20분이면 은신치에 닿는다.
비로소 능선에 올라섰지만 은신치는 말 그대로 작은 고개다.
반대편에 서상면 노상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좌측 능선을 타면 거망산으로 향할 수 있다.
취재팀은 오른쪽으로 꺾어 큰목재를 향한다.
'근교산'을 통해 거망·황석·금원·기백·월봉산을 각각 독립적으로 소개했기 때문에
은신치~수망령 구간은 처음 소개한다.
1116.3봉으로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10분가량 오르다 보면 봉우리 정상부를 오른쪽으로 살짝 우회하도록 길이 나 있음을 알게 된다.
잇따라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전형적인 능선산행의 묘미를 만끽한다.
용추폭포의 위용. 높이 15m인 이 폭포는 덕유산권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
아침에는 맑았던 하늘에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와
굵은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한다.
거센 비가 발목을 잡는 통에 걸음이 느리다.
10여분 후 1122봉.
그렇게 조망이 뛰어나지는 않다.
하지만 작은 암릉을 타고 3분만 더 가면
멋진 전망대 역할을 하는 1141m(GPS 기준) 암봉에 닿는다.
능선상의 볼록 솟은 곳이지만 '산 나그네'에겐 분명히 봉우리라 할 만하다. 추석이 다가올수록 그리워지는 보름달처럼 둥그스름하게 솟은
북쪽의 월봉산이 빗속에서 모습을 보이지만 아쉽게도 그 뒤로 보여야 할 남덕유~삿갓봉~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덕유산 주능선이 보이지 않는다.
오던 길을 뒤돌아보면 은신치에서 억새능선을 지나
거망산,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용추계곡 건너편으로 늠름한 기상이 느껴지는 기백산이 우뚝 솟아있다.
비 피할 곳이 없어 계속 길을 서두르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뚝 멎었다.
한바탕 소나기였나 보다.
비도 그쳤겠다, 15분쯤 기분 좋게 능선을 따르는데 작은 바위에서 남쪽 시야가 확 트인다.
비구름 때문에 1141봉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금원~기백 능선과 거망~황석 능선이 마치 경주하듯 좌우로 뻗어가고 있다.
하지만 황석산 오른쪽 너머로 걸쳐 있어야 할 지리산 주능선이 여전히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또 한 번 "날씨만 쾌청했다면…"이라며 아쉬움을 접는다.
6분 후 이번 산행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1178봉이다. 북쪽의 월봉산과 그 아래 큰목재가 또렷이 보인다.
5분 뒤 큰목재삼거리다. 왼쪽으로 내려서면 곧바로 큰목재를 거쳐 월보산 남령 남덕유산으로 이어지고
계속해 직진 능선을 타면 수망령을 거쳐 금원산으로 가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남덕유산에서 가지 친 산줄기가 금원~기백 능선과 거망~황석 능선으로 나뉘는 길목이다.
수망령까지는 30분가량 줄곧 내리막이다.
걷기 편하고 한적한 데다 이따금 때 이른 억새도 만난다.
수망령은 함양의 용추계곡과 거창 북상면의 월성계곡이 나뉘는 분수령이다.
그래서 '물 수(水)'자를 썼나 보다.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수망령 북쪽의 계곡물은
여러 물길과 합쳐져 황강이 되고 남쪽 용추계곡의 물은 남강이 된다.
이곳부터는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5분 뒤 기백산과 금원산 중간 능선까지 이어지는 산림도로 갈림길을 지나
계속 계곡을 따라 내려서는데 죽죽 뻗은 낙엽송 군락지가 반긴다.
가을이 좀 더 깊어지면 갈바람에 황금빛 잎들을 흩날릴 것이다.
은신골 입구를 거쳐 관리사무소까지는 40분쯤 걸린다.
하산길 내내 정면 오른쪽 멀리 보이는 황석산 남봉과 북봉의
송곳처럼 날카로운 자태가 시야에 들어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 떠나기 전에
- 월봉산 거치는 진양기맥은 황강과 남강 가르는 산줄기
남덕유산에서 월봉산을 거치는 진양기맥은 낙동강의 최대 지류인 남강과 황강을 가르는 산줄기이기도 하다.
똑같이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과 황강은 진양기맥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면서 각각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
◆ 교통편
- 대전통영고속도로 지곡IC 통과하면 용추계곡까지 지척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버스는 진주 원지 경유편(3시간 소요)이
오전 5시40분부터 오후 7시40분까지 8~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직행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2시간 간격, 하루 6회. 1시간50분 소요.
함양터미널에서는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안의행 버스를 탄 뒤,
안의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오전 7시30분~오후 7시20분)하는 용추사행 버스를 이용한다.
함양읍에서 40분 안팎 소요.
차량을 이용할 경우 대전통영고속도로 지곡IC에서 내려 우회전,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안의면 소재지에서 3번 국도와 합류해 거창 방면으로 3㎞가량 가면 용추계곡 입구가 보인다.
좌회전 후 10분 정도 지나 용추사 앞 장안사 조계문(일주문) 주차장을 거쳐
콘크리트 포장로를 따라 2.5㎞ 정도 더 들어가면 용추자연휴양림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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