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6-1>
[송상현 광장 스토리텔링] - 송상현의 부인이 띄우는 글
서방님 곁에 묘가 둘인데, 저는 어찌 이 먼데 누웠습니까
송상현 공의 후손들이 사는 청주시 강상촌(綱常村) 충렬사 입구의 마을 비석. 강상이란 마을 이름은 삼강오륜과 삼강오상,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사진=김정화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기획부장 |
- 동래 부임하시고 곧 전쟁이 났지요
- 부모님과 아이들을 버려 둘 수 없어
- 당신 곁으로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 당신을 사모하는 두 아이를 보냈고
- 그들은 당신 곁을 꿋꿋이 지켰습니다
- 덕분에 죽어서도 곁을 허락받았지요
- 난세에 충직한 영웅이었던 내 낭군
- 당신의 이름을 딴 푸른 광장에서
- 이제는 저의 영웅으로 만납시다
저는 임진왜란 때 동래성 싸움에서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 (宋象賢·1551~1592)의 처 이숙녀(李淑女)입니다. 2013년말 완공을 앞둔 부산시민광장을 명예롭게도 저의 서방님의 이름을 따서 '송상현 광장'으로 만든다고 해요. 그이의 충효와 기개가 오래도록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어 부인된 사람으로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이의 이름이 새겨지는 영광스러운 광장 개장을 앞두고 오늘은 그이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이야기해 보렵니다.
청주 강상촌에 마련된 송상현 공, 열녀 한금섬, 이양녀를 모신 정려각(왼쪽)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심었다는 느티나무. |
당신이 열아홉, 제가 열네살 되던 해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경사(經史)에 능해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었고, 26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잇따라 관직에 나아가니 얼굴 뵙기도 어려웠지요. 당신 41세 되던 해 (선조 24년, 1591년)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오늘날 공무원 1급)에 올랐을 때 저는 너무 기뻤어요. 파견 근무를 끝내고 제 곁에 계실거라 믿었던 게지요. 그런데 또 발령이 나더군요. 동래였죠. 왜적 때문에 아무도 안 가려는 곳이었지만, 당신은 누군가는 가야하지 않겠느냐며 지체없이 짐을 챙기셨지요.
당신은 한양에서 천리길 머나먼 동래에 도착하자마자 민심부터 살폈어요.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서도 성의 방비를 굳게 하고 백성만을 살피며 선정을 베푸셨지요. 평화롭던 시절도 잠시, 부임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어요.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튿날 동래성이 왜적들에 포위되었죠. 길을 비키라는 왜적들의 요구에, '죽을지언정 못 비켜준다' 하였으니 그때 이미 각오를 하셨겠지요. 그러나 1000여 명의 군사로 1만8000명이 넘는 왜군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요. 싸움이 시작된 지 반나절 만에 성은 함락되었고 불과 20일 만에 서울까지 왜군 손에 들어가고 말았어요.
거기서 당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죽음을 택하셨죠. 그 순간 우리 아이들 인급(仁及), 효급(孝及)의 얼굴도 떠올랐나요.
청주 충렬사 내 천곡기념관 송해성(왼쪽) 관리소장이 지난해 권오창 화백이 제작한 송상현 공 표준영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 소장은 부산의 송상현 동상 모습도 이것으로 바꿔 제작해 줄 것을 요청했다. |
부부는 일심동체라 제가 당신 곁에서 보좌해야 했는데, 편찮으신 시부모님과 아이들, 집안일을 챙기느라 따라 갈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 동래길에 13살 한금섬(韓金蟾)과 11살 이양녀(李良女)를 딸려서 당신을 챙겨드리도록 했지요. 흔히 세간에선 금섬이와 양녀가 기생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사실 금섬이는 기생 신분으로 사는 것이 기구하여 12살 되던 해에 강물에 빠져 머리카락만 둥둥 떠있는 것을 당신이 구해주어 그때부터 당신을 따르게 된 경우였구요. 양녀는 스승의 딸로서 스승이 돌아가시자 사고무친 고아가 되었기로 당신이 수양딸로 거둔 아이였죠.
둘 다 나이는 어리지만, 당신을 따르는 마음이 지극하기로, 금섬이는 당신 음식에 행여 나쁜 것이 있을까 기미상궁(氣味尙宮) 역할로, 양녀는 바느질과 당신 의복을 챙기는 침방상궁(針房尙宮) 역할을 맡겨 따라보낸 것이에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전쟁 중에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친지라, 후대에서 이 여인들을 기생 또는 첩, 열녀로 신분을 한 단계 올려준 것이죠.(송씨 문중 관계자 증언)
이 아이들이 당신을 우러르며 주인으로 모시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샌가 당신을 깊이 사모하게 되었나 봅니다. 그 사랑에 도덕과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나깨나 백성의 안위만 챙기는 당신이었기에 당신을 모셨던 이 여인들도 늘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요.
당신은 양녀를 시켜 아버님께 쓴 마지막 편지 혈선도(血扇圖)를 급히 보냈죠. 그런데 양녀는 서울로 가던 길에 동래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만에 다시 동래로 내려와 "차라리 소천(所天·아내가 남편을 이르는 말, 송상현을 의미) 곁에서 죽으리라" 통곡을 하며 당신 곁을 지키려다 되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포로로 잡혀가 3년 동안 모진 고생을 했어요. 수많은 왜장들이 회유와 협박으로 수청을 요구했으나 양녀가 죽기로 작정하고 거부하자 도요토미가 그 뜻을 높이 사 자신의 누이의 집에 기거하게 했지요. 그러던 중 일본에 큰 지진이 일어나 모든 집과 가옥이 무너졌을 때, 양녀가 기거하던 건물만 무사하자 이 여인을 건드리면 안되겠다 겁을 먹고 3년 만에 조선으로 다시 보내줬지요. 이후 양녀는 우리집 수양딸로 들어와 평생 시집도 가지않고 제 옆에서 당신을 기린 여인입니다.
섬이도 예감이 있었나 봅니다. 동래성이 함락되고, 온통 피바다로 난장판이 되자 성안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당신을 찾았죠. 당신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3일 동안이나 왜적을 꾸짖으며 당신을 위해 울어주던 여자예요. 조선 여인의 지조가 아무리 높다한들 열 세살 어린 것이 적병들 틈에서 남자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가 쉬운 일이었을까요. 평소 여인들을 대한 당신의 마음이 깊고 자애로웠음을 미루어 짐작해 보아요. 마지막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지켜준 두 여인에게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에요.
청주 묵방산에 모셔진 송상현(가운데) 공의 묘와 열녀 한금섬(오른쪽), 이양녀(왼쪽)의 묘. 이양녀의 묘는 헛묘이다. |
지금도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강촌2길 28번지 묵방산 당신 묘소 앞에는 한소사(韓召史)와 이소사(李召史)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죠. 사람들은 어째서 정실부인인 제가 같이 있지 않고, 두 애첩의 묘가 이렇게 나란히 모셔져 있는가 궁금해 하는 것 같아요.
제 인생사에 그 해답이 있어요. 당신이 돌아가시고도 저는 26년을 더 살았어요. 살림이 넉넉지 않았지만 첫째 인급이를 시켜 동래성 문밖에 묻혀있던 당신 유해를 청주로 모셔오도록 했지요. 전시 상황에 민간인 신분으로 적진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관원의 도움을 받아 임금이 임명한 장군의 신분으로 동래성에 들어갔어요. 당신의 인품과 충절에 감화하여 왜장 히라요시(平義智)는 당신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하여 당신을 죽인 왜병의 목을 치고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더군요.
임금께서 직접 보내신 명나라 장수 겸 풍수지리전문가 두사충(杜思忠)이 당신의 산소 자리를 골라주었는데, 그곳이 지금 당신이 잠들어 계신 청주 묵방산 자락입니다. 묘를 지을 당시 김섬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고 당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당신을 위해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친 여인이어서 당신의 묘 앞쪽 언저리에 자리를 마련할 수가 있었지요. 사실 지금 당신 묘 앞에 있는 양녀의 묘소는 헛묘에요. 임금이 당신 묘를 정할 당시, 금섬이 자리까지만 마련해주었기로 양녀는 금섬이 묘비에 이름만 새겨 같이 묻어놨으나 두 여인을 한 묘소에 쓰는게 아니라고 하여 묘를 따로 떼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에요.
당신 순직하시고 이듬해 시부모님 상을 겪고 연이어 두 아들마저 병으로 잃고 나니 사는 게 너무 허탈했어요. 모든 걸 내려놓고 서방님 곁으로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람 목숨이 명주실보다 질기더군요. 열네 살에 시집와서 남편 정도 모르고 살았는데 백발이 성성해서야 당신곁으로 가나 했지요. 신산스런 삶의 여정의 끝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하지만 저는 끝내 당신 곁에 눕지 못할 운명이었나요. 제가 당신 곁으로 갈 즈음에, 당신 옆에 묘 자리에는 공간도 없을뿐더러, 임금이 정해준 산소는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나라의 법도를 따라야 했어요. 그래서 저는 오직 후손들이 아프지 않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당신과 1km나 떨어진 황구산 기슭에 호젓하게 자리잡게 되었어요.
살아서도 당신 옆을 지키지 못한 제가, 죽어서도 당신 옆자리는 두 여인에게 양보해야 했던 거죠. 혹시라도 사람들이 당신의 묘소를 들렀다가 송 부사가 대단한 로맨티스트라서 애첩을 둘이나 거느리고 정실부인을 멀리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밝혀드리고 싶어요. 송 부사는 애민정신 충효사상으로 똘똘 뭉친, 차라리 목석같은 남자였다는 걸. 당신의 포부가 일성(日星)과 더불어 빛나고 산악(山岳)과 더불어 우뚝하기에 나랏님 뜻을 받들어 역사 인물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저를 잊지않고 곁에 있어 주시리라 믿어요.
서방님, 영웅이 무엇입니까. 난세에 영웅은 충직한 당신이지만, 저에게 영웅은 못다한 붉은 노래 목놓아 불러주는 당신입니다. 부산의 심장, 이 푸른 광장에서 충효로 박제된 동래부사 송상현이 아닌 인간 송상현, 가슴뛰는 내 낭군으로 돌아오시지요.
김정화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기획부장
▶취재 지원: ▷청주시 충렬사 내 천곡기념관 관리소장 송해성(68, 송상현 14대손) 씨 ▷천곡기념관 문화관광해설사 박병조(69), 안경옥(62) 씨
◇송공이 가려했던 '인간의 길'…새 광장에서 그 정신을 찾다
#21세기 마당
광장(廣場)이 열린다. 시민 대광장이다. 모두를 아우르고 모두를 품는 한마당이다. 부산에서 가장 큰 중앙대로 복판에 들어서는 소통 공간이다. 대규모다. 길이 700m, 폭 45~78m, 전체 면적 3만4740㎡. 서울 광화문 광장보다 더 크다. 내년 상반기에는 광장이 열려 시민들을 맞는다. 이름하여 '송상현 광장'. 애초 '부산중앙광장'이라 불리다 시민 공모를 통해 찾아낸 이름이다.
송상현이 누구던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장수, 효보다 충을 떠받든 인물, 휴머니스트. 동래부사로서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을 지키다 붉은꽃처럼 후두둑 져버린 사내. 그의 짧은 생애 속에는 부산정신이라 이름할만한, 함께 좇아야할 미래 가치가 깃들어 있다.
#모너머 고개를 넘어
송상현 동상이 자리했던 부산진구 송공삼거리 일대는 옛날 '모너머 고개'가 있었던 자리다. 일제 때 신작로(국도)가 나고 철도가 놓이면서 착평되어 지금은 고개 같지 않은 고개가 되었지만, 별의별 이야기가 다 전해져 온다. 도적떼가 들끓어 '넘기 어렵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미천한 갯가 사람들이 양반동네인 동래로 갈 수 없다는 뜻에서, 또는 개항 이후 부산부 쪽의 일본인들이 동래부 쪽으로 넘어올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말도 있다. 문헌에 나오는 마비현(馬飛峴)의 이두식 표기인 '말 나는 고개→말 넘어 고개'에서 유래한다는 얘기도 있다.
험난했던 부산 근대사는 모너머 고개를 중심으로 안과 밖이 나누어진다. 바다와 육지, 근대와 현대, 동래부와 부산부, 양반과 갯것, 옛길과 새길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부산역사는 이러한 안과 밖이 씨줄과 날줄을 형성해 현대로 건너왔다.
그 고개를 지금은 너무도 가볍게 간단히 넘는다. 차를 타면 단 1분, 걸어도 10분이다. 그동안 생각없이 지났는데, '송상현 광장'이 생각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정보통신이 세계를 하나로 잇는 시대지만, 여전히 넘을 게 있고 못넘을 게 있다. 또 지켜야 할 선이 있고, 물러서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이런 생각들이 광장에서 풀어질 것이다.
#한떨기 부산정신
송상현은 밀려드는 왜적을 향해 '싸우다 죽을지언정 길을 내줄 순 없다'(戰死易 假道難) 하고 목숨을 던졌다. 그 길은 물러설 수 없는 길이었다. 송상현은 비록 싸움에서 졌지만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수 백년의 시공을 넘어 다가온 길 하나가 가슴북을 울린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을 당해도 정신을 붙들고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적이 쳐들어온 길목에 송상현이란 이름을 다시 세운 뜻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길'을 말할 때 떠오르는 또 한 분은 요산 김정한이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요산의 작품 '산거족'에 나오는 이 말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준다. 송상현이 걸어갔던 길과 다르지 않다.
송상현과 요산이 일러준 길, 그것은 바로 부산정신이 아닌가. 이제 광장에서 그 뜻을 펼쳐야 할 때다.
박창희 선임기자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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