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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도다리'…[만남과 부활] <상> 금순이를 찾아서

금산금산 2014. 1. 25. 20:13

 

신 '영도다리'…[만남과 부활] <상> 금순이를 찾아서...

누이야 살아 있다면 예서 만나자…'영도다리'는 오늘도 기다린다

 

  • 이경식 김화영 기자 yisg@kookje.co.kr
  • 2014-01-21
  •  

     

     

    영도다리는 오늘도 기다린다!

    만나지 못한 숱한 이산가족들을. 기다림에 허기진 마음들이 칼바람이 되어 47년만에 들린 다리의

    커다란 입 속으로 쌩쌩 몰아친다.

    하여, 다리는 갈구한다.

    이산가족의, 민족의 '완전한 만남'을. 다리는 또한 추구한다.

    세대 지역 계층 등 모든 어긋나고 분열된 존재들의 화합과 공존의 매개가 되기를.

    다리에 쏠린 뭇 사람들의 염원을 세 차례 걸쳐 담아낸다.


    - 이산가족·생이별 상징 '금순이'
    - 남북 합쳐 1500여 명
    - 상봉 번번이 무산된 데다
    - 어머니·누이·아들 생사 모른 채
    - 몸은 늙고 쇠약해졌지만
    - 아직도 만남의 희망 포기 못해


    영도다리를 다룬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이는 북에 두고 온 우리의 누이이자 어머니다.

    아니, 모든 이산가족을 상징한다.

    금순이와 생이별한 쓰라림을 헤아리지 않고는 영도다리를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영도다리와 '금순'이는 그래서 한몸이다.

    본지 취재팀이 금순이를 찾아 나선 이유다.



    범위를 좀 좁혀 보았다.

    '금순'이란 이름을 가진 이산가족은 얼마나 될까.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현재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2만9035명 중 생존자는 7만2491명.

    생존자 가운데 이름이 '금순'이인 북의 어머니나 누이를 찾는 신청자는 1250명에 이른다.

    북의 가족을 찾는 '금순'이란 이름의 남쪽 신청자도 272명 있다.


    하지만 북의 금순이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남의 금순이도 너무 늙고 쇠약해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여전히 서슬 퍼런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쟁투 속에 이산가족 상봉은 번번이 무산되고,

    금순이는 그 그늘에서 신음하다 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었다.


    ■  "어머니, 부디 살아만 계세요!"

    강현우(81·부산 사하구 감천동) 할아버지의 '금순이 찾기'는 애끓는 사모곡(思母曲)이다.

    함경남도 홍원군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랫말처럼 1951년 1·4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상륙작전용 수송함(LST)을 타고 단신 월남했다.

    인민군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고향집을 나설 땐 막내 삼촌(강성모)과 함께였지만 흥남에 닿기 전에 수많은 피란민들 틈에서 헤어졌다.

    고향에는 어머니(장금순·당시 37), 아버지, 할머니와 동생 4명이 남았다.


    "전세가 호전되면 곧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긴 이별이 될 줄이야…."

    부산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먹고 살기 막막해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공병으로 전선을 떠돌다 1955년 제대한 뒤 살길을 찾아 부산과 강원도 속초, 경기도 가평 등지를 떠돌며

    신발 갑피 제조, 문구점·양복점 운영, 미군 물자 거래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속초에선 10년간 벌어모은 재산과 가게를 화재로 몽땅 날리고 빈털털이가 되기도 했다.


    온갖 고초 속에서도 할아버지를 지탱한 건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혹여 가족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틈만 나면 영도다리를 찾았다.

    마분지에 가족 이름들과 고향주소 등을 써서 다리 세 곳에 붙였다.

    "1주일에 한 번씩 갔는데 쪽지를 붙이면 찢겨나가 또 다시 붙이고…그런 세월을 7~8년 보냈어."

    결혼도 45세 늦은 나이에 했다.

    살기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결혼은 부모님을 모시고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가족을 재회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술·담배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지난 17일 정오, 영도다리에 다시 섰다.

    '강성모 삼촌, 강현우가 기다림. 보시면 다리 밑 계단'이라고 매직펜으로 쓴 골판지를 들고.

     "가족들은 피란오지 못한 게 분명한 것 같고…함께 피란오다 헤어진 삼촌이 월남했다면 나를 찾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영도다리가 서서히 들어 올려지며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흘러나오자 할아버지는 눈물을 훔쳤다.

    "요즘 어머니가 꿈에 자주 나타나…내 생전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생사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  "가족들 생사라도 알았으면…"

       
    정병흠 할아버지가 지난 15일 부산 동구 수정동 자택에서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화영 기자

    정병흠(88·부산 동구 수정동) 할아버지가 찾는 '금순'이는 둘째 누이동생이다.

    할아버지가 1·4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월남할 때 고향인 함남 함흥에는 그를 많이 따랐던 금순(당시 15)이 등 여동생 3명, 부모님, 임신 중인 아내가 있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끌었던 건국준비위원회 함흥시지부 청년부장으로 활동했던 형은 1947년 남에 내려간 뒤 소식이 끊긴 상태였다.


    "공산당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쳐 나를 근처 여학교로 끌고 갔어. 어수선한 틈을 타 도망쳐 혼자 피란길에 올랐지. 상황이 워낙 화급하다 보니 가족들과 같이 피란할 엄두를 못 냈어…."

    이빨이 많이 빠진 데다 당뇨병까지 앓아 몹시 어눌한 할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꼬리를 흐렸다.

    북한에서 철도회사에 다녔던 할아버지는 월남 후 철도부대에 입대했다.

    군에 있으면서 먼저 월남한 형을 찾으려고 외출할 때마다 영도다리에 가서 쪽지를 남겼지만 허사였다.

    길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외삼촌 내외와 매형을 만났지만 가족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남한에서의 삶 또한 이산 사연 못지 않게 기구했다.

    트럭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만난 두 번째 아내는 출산하다 아이와 함께 숨졌고, 세 번째 아내는 두 남매를 남겨둔 채 28년 전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할아버지의 가족 상봉 희망은 날로 가늘어져 간다.

    "죽기 전에 고향 가긴 틀렸겠지. 저 세상에서 가족들을 기다릴 수밖에…."


    ■  "두고 온 아들 생각나 미칠 것 같애"

       
    조금순 할머니가 지난 12일 부산 북구 덕천동 E요양병원에서 북에 두고 온 아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화영 기자

    '금순'이는 북에만 있지 않다.

     남에도 북의 가족을 찾는 금순이가 많다.

    부산 북구 덕천동 E요양병원에서 3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조금순(93) 할머니도 그중 한명이다.

    할머니의 사연은 아들을 향한 단장가(斷腸歌)다.

    할머니는 아들(유명종·당시 9),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남으로 피란오다 고향인 함남 북청역에서 식구들과 헤어졌다.

    인산인해의 북새통 속에 식구들이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이다. 


    1·4 후퇴 전 국군 군속으로 들어가 트럭 운전을 했던 남편은 "남아 있으면 빨갱이한데 잡혀 죽는다"며 할머니의 등을 떠밀었다.

     "명종이를 두곤 절대 나만 피란 못 간다고 버텼지. 남편이 나중에 데리고 갈테니 먼저 가라고 해 흥남에서 미군 배를 탔어. 이렇게 못 만날 줄 알았으면 피란 안 왔어." 


    남에서 남편과 재회해 부산에 정착한 할머니는 남편이 운수사업을 해

     돈을 많이 벌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엄마를 찾아 헤맬 아들이 내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월남 후 가족을 찾아 거제도 피란민수용소에도 여러 차례 갔었고, 영도다리에도 수없이 나가 배회했다.

    "영도 살 땐 영도다리를 건너다니며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는 게 일이었지. 명종이 또래 애들만 보면 눈물이 났어."


    할머니는 남편이 43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나 네 자매를 혼자 키웠다.

    모진 세월이었다.

    할머니는 요즘 자꾸 초조해진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서다.

    "이젠 눈물도 말라 안 나와. 명종이가 살았으면 지금 73살 됐을텐데. 죽기 전에 꼭 얼굴 한번 봤으면…."

    귀가 어두운 할머니는 떠듬떠듬 힘겹게 말을 보탰다.

     



    #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유래


    - 굳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 날이 오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 1953년 대구서 제작, 실제 '금순이' 사연
    - '초생달만 외로이~' 탓 판금당하기도

       
    영도다리 위에 '초생달'이 떠 있다. 부산대교에서 촬영한 영도다리 전경 사진과 '초생달' 사진을 합성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굳세어라 금순아!'.

    6·25 월남 피란민의 애환을 품격 높은 노랫말과 곡조로 표현한

    불후의 명곡이란 평가를 받는 대중가요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국제시장' '영도다리' 같은 지명 때문에

    이 노래는 피란시절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레코드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1953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강사랑(1985년 작고, 당시 74) 작사, 박시춘(1996년 작고, 〃 83) 작곡으로 만들어졌고 현인(2002년 작고, 〃 83)이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

    이 노래의 탄생 배경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노랫말에 나오는 '금순'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금순'이일까.

    당시 '금순'이라는 이름이 흔해 작사가가 이 이름으로 월남 피란민을 상징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재 결과 그럴 수밖에 없는 애틋한 사연이 내재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인이자 대중가요 연구가인 이동순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이병주(2013년 작고, 〃 93) 전 오리엔트레코드사 사장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 노래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대구에서 박시춘과 함께 오리엔트레코드사에 몸 담고 창작 활동을 하던 강사랑은 1950년대 초반 '양키시장(현 교동시장)'에서 1·4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월남한 '금순'이란 이름의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양키시장에서 미군 물자를 팔고 있었다.

    매일 점심을 먹기 위해 양키시장을 지나다니던 강사랑은 그녀와 친해졌고, 그녀로부터 '흥남부두에서 오빠와 헤어진 뒤 영도다리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했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사연을 듣게 됐다.

    강사랑이 그녀의 얘기를 토대로 작사해 박시춘에게 넘겨 노래가 만들어졌고, 노랫말과 노래에 반한 이병주가 현인에게 곡을 줘 음반을 내게 됐다.

       
    1953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제작한 '굳세어라 금순아' 첫 음반. 김종욱 대중음악 연구가 제공

    이 교수는 2007년 이병주가 살아있을 때 대구MBC '금순아, 어데를 가고'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녹취한 이병주의 증언록과 자신이 이병주에게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이 같은 '굳세어아 금순아'의 탄생 배경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작사가와 작곡가가 이미 세상을 떠나 노래 탄생 배경과 과정을 직접 들을 수 없는 만큼 이병주 선생이 남긴 증언이 가장 확실한 근거"라면서 "작사가가 양키시장에서 만난 '금순'이와 한동안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이 노래에 얽힌 서글픈 내력도 있다.

    노래 발표 후 대중적 인기를 끌자 느닷없이 보안 당국의 사후 검열이

    들어왔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노래 구절을 문제 삼은 것. "왜 하필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달이 떴다고 표현했느냐" "왜 보름달이 아니고 초생달이냐" "왜 그 초생달이 외로이 떴다고 했느냐"며 집중 추궁했다.

    그러다 음반 판매금지까지 당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작사가는 초생달을 통해 피란민의 외로움, 쓸쓸함, 빈약, 적막, 처연함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라며

    "엄혹했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생달'에는 절망만 있는 게 아니다.

    희망도 내포돼 있다.

    이 교수는 "작고한 작사가 반야월 선생도 자신의 필명에 대해 '반달이기에 온달을 지향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보름달로 차오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