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1-1> [남구의 숨겨진 스토리들]- '만화가 고우영'과 부산
감만동 빈민촌에서 뭔지도 몰랐던 만화를 쓱쓱 잘도 그리던 천재
고우영이 어릴 적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던 장소를 가리키는 박수웅 씨. 당시엔 담이 없었다. 박 씨는 고우영과 동항초등교 동기이다. 사진 제공=동길산 |
- 단짝 박수웅말고는 늘 혼자였던
- 부산 동항초등의 수재 학생
- 고우영이 연필을 들고
- 동담산과 마을 풍경을 그려내면
- 아이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만화의 날 특집
11월 3일은 만화의 날이다.
올해 이 날 포털 네이버(Naver)는 메인 화면을 만화의 날 특집으로 꾸몄다. 장편만화 세 편의 주인공을 올린 것.
만화 '짱구박사' 주인공 짱구박사와 '삼국지' 장비, '가루지기전' 가루지기가 그들이다.
세 만화 모두 왕년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작품으로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한 사람 작품이고 그 한 사람이 고우영(1939~2005)이다.
만화가 고우영. |
만화가 고우영.
그의 이름 석 자 앞에는 수식어 몇이 지남철처럼 따라다닌다.
'천재' '국민만화가' '최초의 신문연재 만화가'가 따라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생 시절에 만화가로 데뷔한 이력이며
발표하는 만화마다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내력은 그를 살아생전에도 사후에도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한다.
살아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현재진행형이게 한다.
현재진행형이기에 지금도 고우영 만화는 파릇하다.
제목만 들어도 '아, 그 만화!' 그런다.
앞에 든 대표만화를 빼고도 고우영 만화는 넘친다.
하기사 고우영 만화는 하나하나가 그를 대표한다.
그만큼 걸작들이다.
다 소개하기는 그렇고 얼추 이렇다.
스포츠신문 최초의 연재만화
임꺽정, 수호지, 일지매, 초한지, 서유기, 열국지, 홍길동, 대야망, 아라노와 오가녀, 수레바퀴, 십팔사략.
하나하나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국민만화였다.
'아, 그 만화!'였다.
◇ 남구에 이는 고우영 바람
1951년 6월 남구 감만동 풍경. 사진 상단 가운데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곳이 고우영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
최근 부산에서 고우영이 묵직하게 다가오고 있다.
몇 달 전 남구청 구보 남구신문(주간 하인상)에 게재된 부산교대 공기화 명예교수의 고우영 관련 칼럼이 발단이다.
공 교수는 "고우영 만화가가 부산 남구 감만동에 살았으며 감만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첫 만화책을 부산에서 펴냈다"며 대장암에 걸려 8년 전 향년 66세로 타계한 만화가를 부산화시키고 현재화시킨다.
고우영 흔적을 찾아 '고우영 길'을 만들고 만화천국 잔치를 열자고
제언하기도 한다.
"우영이는 나보다 한 살인가 두 살 많았어요."
공 교수는 칼럼에서 고우영 초등학교 단짝을 언급한다.
감만2동 동항초등학교 맞은편 철물점을 운영하는 박수웅(73) 선생이
그 단짝이다.
나이는 고우영 만화가가 한두 살 많았지만 6학년 내내 옆자리 단짝으로 지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가도 낱낱이 알던 사이였다.
두 사람 다 만주에서 유년을 보낸 이력은 둘을 더욱 끈끈하게 맺었다.
고우영은 자전 에세이를 생전에 써 두었다.
저자 서문에 1978년 5월이라고 명기돼 있다.
그러나 '구름 속의 아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내기는 사후인 2007년 4월이었다.
탈고와 발간 사이에 30년의 틈이 있다.
흔치 않는 일이라서 사연이 있을 테지만 일단은 넘어가자.
에세이 발간 이듬해에는 '고우영 이야기'가 나왔다.
작가론과 작품론, 자필 원고, 박재동·방학기·허영만 같은 동료 만화가 인터뷰가 실린 추모집 성격 단행본이다.
박수웅 선생 회고와 두 단행본을 토대로 만화가 고우영 생애를 유년기와 부산시절 중심으로 짚어본다.
"학적부는 없어도 졸업대장은 있습니다."(동항초등학교 이규섭 교장)
고우영은 중국 만주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해는 분분하다.
자전 에세이조차 둘로 나뉜다.
책표지 날개에는 1939년이라 밝혔고 본문에는 1938년이라 밝혔다.
그러기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어느 글에는 1939년으로 돼 있고 어느 글에는 1938년으로 돼 있다.
고우영 모교 동항초교 이규섭 교장이 보여준 졸업대장은 그런 논란을 대번에 잠재운다.
고우영의 한자이름 '高羽榮'과 태어난 해를 단기로 표기한 '4272' 붓글씨가 손가락 대면 먹물이 묻을 듯 새카맣다. 단기 4272년은 서기 1939년이다.
참고로 고우영은 동항초등 10회고 이규섭 교장은 24회, 선후배지간이다.
◇ 1·4 후퇴 때 부산으로..
고우영 만화의 주요 캐릭터들. |
고우영이 만주에서 태어난 자초지종은 자전 에세이가 밝히고 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상세하게 나와 있다.
아버지는 평양경찰서 보통계 경부였다.
경부는 지금의 경감으로 중간 간부였다.
어떤 사정으로 경찰을 그만두고 솔가해 만주에 정착했고 거기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고우영을 낳는다.
광복 이후 옛 경찰 동료들이 여러 차례 공직을 제의했지만 일제강점기
경찰 노릇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번번이 사양했다.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독학으로 동경제대 의예과에 합격한 신여성이었다.
형제자매는 7명.
만화가였던 두 형 상영·일영, 누나 계영, 셋 동생 대영·천영·금지였다.
우영(羽榮)은 '항우(項羽)처럼 용맹하고 관우(關羽)처럼 깊은 인간이 되어라'는 아버지의 바람이 담긴 작명이다.
고우영은 1945년 만주 태자강 재만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 해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신의주를 거쳐 1946년 평양 인근 시골학교 '기양인민학교' 1학년에 편입한다.
부모 고향이자 일가붙이가 사는 평양에 거처를 정하지 못한 건
일제 경찰이란 전력 때문이다.
기양은 시골이라서 은신이 가능했지만 공산정권이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시골도 불안해진다.
내무서원 감시가 따가워지자 월남을 감행한다.
아버지는 미리 월남하고 가족들은 어머니가 인솔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남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옮긴다.
서울에 정착한 고우영 가족은 가난과 고통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술과 낚시로 세월을 죽였고 생계는 어머니가 도맡았다.
계성초등학교 편입생 고우영은 서울 정착 첫 해 봄 GMC트럭 왼쪽 앞바퀴에 두 다리가 깔려 6개월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공산치하) 90일간을 악몽처럼 살았다.'
얼마나 악몽 같았는지 엄마에게 이런 당부까지 한다.
"나는 다리에 큰 상처가 있어요. 자동차에 치었을 때 생긴 것을 아시죠? 시체를 찾을 때 그걸 잊지 말아요."
이듬해 중공군 반격에 밀려 1·4 후퇴를 하면서 '눈길을 걸어 딱딱하게 얼어 버린 주먹밥을 녹여 씹으며 인천으로 걸어가 거기서 LST를 타고 부산으로' 온다.
◇ 단짝 친구의 생생한 증언
"군부대 막사 같은 데 있지요? 거기서 살았어요."
부산으로 온 고우영 가족은 남구 감만동에 자리를 잡는다.
현재 부산외대 바로 위 언덕자리다.
부산동항초등 2층 복도에 전시된 1951년 6월 감만동 사진을 보며 박수웅 선생은 고우영 만화가가 살던 집을
대번에 가리킨다.
누가 봐도 부대 막사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똑같이 생겨먹은 집들이 다닥 다닥 붙어있고 그 하나가 고우영 집이다.
고우영은 '고우영 이야기' 친필 원고에서 '남구 감만동 빈민굴'로 표현하고 있다.
사진 왼편에서 한가운데까지는 철조망을 둘러친 미군부대가 보인다.
병기기지보급창(OBDㅡOrdnance Base Depot)으로 미군은 철수했어도 부대는 여직 남아 있다.
감만동은 오래 전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해군사령부가 여기 있었으며 일제도 여기에 군사시설을 두었다.
부산 바다로 가는 해양 요충지라서 등대도 일찍이 세웠다.
감만 앞바다 제뢰등대는 현존하는 부산 최초 등대다.
감만이란 지명은 고려말 최영 장군과 맞물려 있다.
여기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를 장군이 물리쳤다고 칠 감(戡) 오랑캐 만(蠻)을 쓴다.
무민사는 최영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1·4후퇴로 1951년 동항초등학교 6학년에 편입한 고우영은 친구가 없었다.
왜 그러지 않을까.
또래보다 나이도 한두 살 많았지만 재산 다 놔두고 피신하듯 끝난 만주생활이며 북한에서 서울 인공 치하에서
겪은 산전수전은 고우영을 이미 애어른으로 만들었으리라.
단짝 박수웅 말고는 늘 혼자 다녔다.
지금은 후문이 된 동항초등 정문에서 왼편 지금은 시장이 된 돌각담과 돌각담 사이 골목길을 거쳐
'댄창'이라 불리던 논길을 거쳐 자갈밭 신작로를 거쳐 집으로 다녔다.
동항초등에 전시된 사진은 걸어서 15분, 20분 거리라는 고우영 통학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고우영 초등 동기는 모두 127명.
두 반이었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했다.
박수웅 동기는 초등학생 고우영이 그린 그림을 기억한다.
울타리 없이 플라타너스 몇 그루뿐인 교정에 앉아 학교 맞은편 동담산을 배경으로 그렸던 기왓집 몇 채며
골목길, 대밭을 기억하고 고우영 집에 놀러가서 봤던 고우영 만화도 기억한다.
동담산 그림은 영판 사진이었으며 만화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 봤던 고우영 만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1972년 일간스포츠에 실린 한국 첫 신문연재 만화 '임꺽정'을 접하고는 초등학생 고우영 만화 그 화필 그대로라서 '이 고우영이가 소식 끊긴 그 고우영이구나' 직감해 신문사로 편지를 보냈고 고우영 답장을 받았다.
박수웅 동기 역시 고우영은 천재였음을 수긍한다.
자전 에세이에서 밝히듯 고우영은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학교를 다닌 것은 불과 2년 6개월로 오그라든다.
3학년 2학기와 4학년, 6학년은 온전히 모두 배웠다.'
월남과 피난이 그의 학창시절을 오그라들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동항초등에서 전교 1, 2등을 도맡았다.
같은 만화가로서 필명을 떨치다 같은 해 두 달 상간으로 요절한 두 형이 서울대 미대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이규섭 교장 표현대로 '한 번 들으면 곧바로 기억'할 만큼 머리가 우수했던 까닭이다.
1952년 3월 22일 동항초등을 졸업한 고우영은 경기중학교에 1차 지원했으나 2점 차로 낙방하고
용두산엔가 영주동에 있던 동성중학교에 2차 지원해 합격한다.
둘 다 서울 소재 중학교로 임시수도 부산에 피난 와 있었다.
◇ 고우영 거리, 축제 만들자!
'쥐돌이.' 고우영이 펴낸 첫 만화 단행본이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53년 16쪽짜리 작품으로 출판업자 권유를 받아 펴냈다.
지금이야 만화가 흔하고 누구나 그리는 세상이지만 당시는 만화가 귀했고 아무나 그리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 시절 그 나이에 출판 권유를 받았다는 건 이미 고우영 만화가 알려졌고 인정을 받았다는 방증이다.
한 푼 두 푼 돈이 아쉽기도 했다.
여섯 살, 다섯 살 터울 두 형은 징집돼 군복무 중이었다.
둥글고 큰 귀를 가진 쥐를 남자아이로 의인화해 흥미진진 펼쳐지는 무용담을 담은 이 만화의 미국식 이름은
미키 마우스.
집 근처 미군부대 쓰레기장에서 우연히 주운 미국만화 '미키 마우스'에서 착안한 만화다.
미키 마우스의 한국식 이름이 쥐돌이다.
중학교 시절에도 고우영과 박수웅 단짝 관계는 이어진다.
박수웅이 다니던 경남중은 토성동에 있어 동성중과 거리가 있었지만 같은 배를 타고 통학했기에 가능했다.
감만동에서 시내로 오가는 대중교통은 달리 없고 배가 유일했다.
현재 우암동 부산은행 자리 적기 뱃머리에서 옛 부산시청 뒤편 뱃머리까지 배가 다녔다.
태풍이 불거나 풍랑이 심하면 부둣길을 걸어 다녔다.
차와 마차와 사람이 더불어 다녔다.
1953년 한국전쟁 정전으로 이듬해 부산에 있던 서울 학교들이 환도했고 고우영 가족도 짐을 싼다.
고우영이 중3으로 올라가던 해였다.
고우영은 서울 동성고교에 들어갔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그게 그의 마지막 학력이 되었다.
"요즘은 인물이 브랜드 시대 아닙니까."
남구청 문화체육과 김용민 홍보계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동항초등학교 후문에서 동천초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감만 창의문화촌까지 '고우영 만화의 거리' 조성이 어떨까 한다.
담을 허물고 벽을 허물어 소통의 거리를 만들면 어떨까 한다.
괜찮겠다 싶다.
창의문화촌을 들락거리는 예술가들이 나서고 주민들이 소매를 걷어붙이면
부산을 대표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거리가 되겠다 싶다.
여기는 삼국지 길, 여기는 수호지 길! 여기는 일지매 집, 여기는 극진 가라데 최배달 집!...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낄낄낄 나온다.
고우영 가시 돋친 만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나오던 그 웃음처럼....
내친김에 고우영 축제도 머리 맞대 구상해 보자.
동길산 시인
※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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